45.
낮 동안은 화창할 거라는 일기예보대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무척이나 좋았지만, 오히려 날씨 좋은 주말인 탓에 일부 구간에서는 차가 막혀 제대로 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정체 구간을 지난 뒤 다행히 어느 정도 속도를 낼 수 있게 된 시점에서 초조한 상태에 있는 두 사람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차 안의 공기는 점차 무겁게 가라앉아만 갔다.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윤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중간 중간 앞에 붙어 있는 시계에 시선을 던져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평소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은 당장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경직되어 있는 상태였다.
목적지인 병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신호에 따라 횡단보도 앞에 차를 멈춰 세운 수영이 운전대를 쥔 채 고개만을 돌려 조수석을 지키고 있는 윤재를 쳐다보았다. 줄곧 입을 다문 채로 앞 유리창에 시선을 두고 있는 윤재는 반쯤 넋이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실 거야.”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윤재가 수영과 시선을 마주하고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신호가 바뀌어 다시 차를 출발시킨 수영은 이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중간에 한 번씩 옆으로 시선을 던져 윤재의 상태를 확인했다. 양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윤재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엔 고요했지만 내면 속 그의 심리 상태가 어떨지 수영으로선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보통 같으면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형식적인 위로의 말조차 입 밖에 내지 않는 수영도 지금 만큼은 어떻게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윤재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윤재는 분명 초조하고 불안하고 또 무서운 기분을 안고 있을 터였다.
이미 몇 년 전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부친을 떠나보낸 그에게 있어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가족마저 잃게 된다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힘든 일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홀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도 마치 타이밍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중간에 한 번씩 정신을 차리고 시계에 시선을 던져 시간을 확인하고 있는 윤재의 모습은 지금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 상태인지를 직접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마 당장 손을 뻗어 만져 보면 윤재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을 거라고 수영은 확신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수영이 주어진 환경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으로 속도를 낸 덕분에 처음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바로 윤재의 이모가 전화로 얘기했던 수술실로 향했다. 다리가 불편한 윤재는 열심히 달려도 남들의 조금 빨리 걷는 정도의 속도밖에는 나오지 않는 탓에 보폭 자체가 넓은 수영이 중간 중간 발을 멈추어가며 뒤쳐지는 윤재의 걸음에 속도를 맞춰주었다.
“윤재 왔니?”
수술실 앞에 서있던 윤재의 이모-은심이 급하게 다가오는 윤재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신도 다리를 움직였다. 자연스레 윤재의 곁에 서있는 낯선 남자에게 시선을 던지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그녀는 인사에 앞서 모친의 상태부터 묻는 윤재에게 다시 시선을 되돌렸다.
“수술 후에 장에 문제가 생겼대. 개복 수술 뒤에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라는데 사실은 이틀 전부터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언니가 계속 아프다고 했었거든.”
“위험한 상태는 아닌 거죠?”
“그래, 그 정도는 아니야. 조금 전에 의사 선생님이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의 위험한 상태는 아니라고 하셨어. 정확한 부분까지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지만.”
은심의 대답을 듣고서 간신히 한 차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윤재는 그럼에도 여전히 얼굴에서 걱정의 기색을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긴 시간에 걸쳐 이뤄진 항암 치료로 인해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모친이 며칠 사이 두 차례의 수술을 받게 된 상황은 줄곧 그녀의 몸 상태를 옆에서 지켜봐온 윤재로 하여금 깊은 우려를 품게 만들고 있었다.
“저... 이쪽 분은...”
문득 들려온 은심의 말에 그제야 자신이 잠시 동안 수영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윤재가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친구에요. 저보다 세 살 위인데 예전 직장 생활을 하며 일로 알게 된 사이에요.”
얼마 전 준석을 상대로 자신이 먼저 나서서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윤재를 슬쩍 한 번 쳐다본 수영이 잠시 텀을 두고 상대적으로 훨씬 키가 작은 은심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우수영입니다.”
“아, 그래요... 전 윤재의 이모에요. 지금 상황이 이런지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에 그렇지만 와줘서 고마워요.”
“수술은 얼마나 걸린다고 하나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이어진 질문을 받고 은심이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가서 대답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도 정확한 얘기는 못 들었으니 일단 기다려 봐야죠. 자, 이쪽으로 와서 좀 앉으세요. 윤재야, 너도 서있지 말고 앉아. 앞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는데 계속 서있을 수 없잖아. 너 왔으니 이모는 잠시 근처에 좀 나갔다 올게. 곧 올 거야.”
복도로 사라지는 은심의 뒷모습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던 윤재가 수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기까지 태워다 주셔서 고마워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기약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수영의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윤재가 그렇게 말하자 수영이 곧바로 윤재의 팔을 잡아 그를 근처의 의자로 데려가 먼저 앉힌 뒤 자신도 그 옆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너희 어머니 뵙고 갈 거라고 얘기했잖아.”
“지금 상태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 지 몰라요.”
“기다릴 각오하고 온 거니까 상관없어.”
곧바로 돌아온 단호한 대답에 잠시 그대로 수영의 얼굴을 바라보던 윤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닫혀 있는 수술실 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러도 주변을 채우고 있는 고요함은 깨질 줄을 몰랐다.
눈앞에 저 굳게 닫혀 있는 문이 언제 열릴지 알 수가 없어 애가 탔다. 모친의 무사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수 없는 윤재는 고요한 복도 끝의 의자 한켠을 차지하고 앉은 채로 천천히 양 손을 마주잡았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수술실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윤재는 이후 한참동안이나 수술실 입구에 시선을 둔 채로 미동 없이 자리를 지켰다.
위치상 반대로 향해 있는 윤재의 얼굴을 일체 볼 수 없었지만 지금 현재 그가 어떤 심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수영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성격이 아닌 윤재는 지금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짊어지려 노력해왔을 터였다. 나이보다 의젓해 보이는 분위기는 평소 그가 품고 있는 소신과 행동이 자연스레 만들어낸 것일 터였고, 천성적인 부분에 더해 결정적으로 윤재를 홀로 서게끔 만든 것은 부친의 죽음이었을 거라고 수영은 짐작하고 있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이제 자신이 가장이 되어 모친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그러나 겉으로는 의젓한 가장의 모습을 차츰 갖춰가고 있는 윤재도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면에서는 모친에게 적지 않은 의지를 해왔을 터였다. 아무리 건강이 악화되어 약해진 여자라고 해도 결국은 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그의 모친은 지금까지 윤재를 지탱시켜주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해주고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몇 해 전 하루아침에 부친을 황망하게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윤재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겉으로는 아무리 태연하고 의젓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실제 그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의, 그것도 장애까지 안고 있는 청년이었다. 당장 맡아 운영하고 있는 가게만 해도 아직 이렇다 할 뚜렷한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는 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윤재가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감당해내기에 지금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정황은 너무도 어둡고 무거운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데 어째서 그의 어깨에 놓여 있는 짐은 조금도 그 무게가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
수영이 알고 있는 수많은 지인들 중 어느 누구도 윤재처럼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또 그들 가운데에는 윤재만큼 바르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수영 자신만 놓고 보더라도 늘 노력하는 것 이상의 결과물들을 너무도 쉽게 손에 쥐어왔다. 마치 태어난 순간 커다란 복권에 당첨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어째서 눈앞의 이 남자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제껏 다른 지저분한 것에 눈 돌리지 않고 한 결 같이 올곧고 성실하게 살아왔음에도 정작 손에 쥔 것이라곤 하루하루 무게를 불려가는 짐밖에 남아 있지 않은 윤재의 삶이 수영에겐 너무도 아프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수술실 입구를 향한 채 미동 없이 앉아 있는 윤재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수영이 희미하게 미간을 좁히고서 입을 열었다.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잠시 그대로 조용히 수영의 시선을 마주했다.
“위험한 상태는 아니라고 아까 이모님이 말씀하셨잖아. 이 정도 큰 병원이면 의사들 실력도 믿을 만 하니까 믿고 기다려.”
지금 수영의 입에서 나온 것이 위로의 말이라는 것을 한 템포 늦게 알아차린 윤재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네.’라고 대답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삭막한 공간에 오직 자신 혼자만 있다는 생각으로 수술실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던 윤재는 새삼 수영의 존재를 다시금 인식한 뒤로 조금이나마 마음이 진정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장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자신을 대신해 움직여 줄 사람이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이 부여하는 안정감인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곁에 있는 수영의 존재가 부담이 아닌 위로처럼 느껴지고 있는 윤재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모친은 마취 상태에 놓인 채로 다른 병실로 옮겨졌다. 함께 수술실에서 나온 주치의는 곧바로 달려온 윤재를 상대로 얼마 전의 개복수술 이후 장폐색 증상이 나타나 앞으로 일정의 회복 기간을 거치며 변화하는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조심스레 모친의 상태를 전했다. 이미 두 차례의 재발이 있었던 만큼 중간에 호전의 기미가 있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상황을 낙관하기 어렵다는 말을 덧붙인 그는 적어도 한동안은 지금처럼 입원한 상태로 치료를 이어가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해왔다. 물론 윤재로선 그저 주치의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목마르죠? 드세요. 윤재 너도.”
병실 안에서 윤재와 나란히 앉은 채로 윤재의 모친이 마취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수영이 문득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주스 캔을 받아들었다. 사실은 목이 마른 것보다도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잠시라도 윤재를 두고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은 심정의 그는 흡연에 대한 욕구를 떨쳐내고 주스 캔을 딴 뒤 그것을 옆에 앉은 윤재에게 건넸다.
조금 전 이모가 건네는 캔을 괜찮다는 말로 받지 않았던 윤재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중간 문득 옆에서 내밀어진 캔을 발견하고 자연스레 수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전 괜찮아요. 드세요.”
“얼굴이 창백해. 어머니 깨어나시기 전에 목이라도 좀 축여 놔.”
좀처럼 손을 거둘 것 같지 않은 수영의 기세에 잠시 망설이다 마지못해 캔을 받아든 윤재가 천천히 주스를 목안으로 흘러 넘겼다.
줄곧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주스는 시리다는 표현을 써도 될 만큼 무척이나 차가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막상 주스를 목안으로 넘기고 나자 급격히 갈증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고 있는 윤재는 그제야 자신이 사실은 꽤나 목이 말라 있는 상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그렇게 얼마의 무거운 시간이 흘렀을까.
창가가 어스름하게 변할 때쯤이 되어 희미하게 들려온 신음에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윤재가 모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취가 서서히 풀린 뒤에도 한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모친-정심은 몇 번에 걸쳐 나른한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한 뒤에야 간신히 윤재의 얼굴을 인식했다.
“윤재야...”
“네, 저에요. 몸은 어떠세요? 어디 아픈 데 없으세요?”
“응... 괜찮아.”
잔뜩 걱정이 담겨 있는 윤재의 질문을 받고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한 정심이 살며시 눈동자를 움직여 윤재의 곁에 서있는 수영을 올려다보았다.
무척이나 잘 생긴 청년의 얼굴.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몽롱한 기운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곧바로 그 기억을 되살려내지 못한 정심은 눈이 마주친 뒤 스스로를 윤재의 친구라고 소개해온 수영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헤어질 것처럼 모친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윤재를 잠시 조용히 바라보던 수영이 모자간에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문득 옆에서 정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영씨라고 했죠...”
이름을 불려 고개를 돌린 수영이 자신에게 향해진 윤재의 시선을 먼저 마주한 뒤 정심의 곁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섰다.
몇 분 사이 몽롱한 상태에서 어느 정도 깨어난 것일까, 좀 전과 달리 정심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수영을 향하고 있었다. 몇 개월 전 수영이 단 한 차례 <민들레>에서 봤을 때와 비교해 눈에 띠게 초췌해진 그녀의 얼굴은 그럼에도 여전히 상냥하고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처음 인사 나누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니 부끄럽네요... 집이면 식사대접이라도 했을 텐데...”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경황이 없을 때에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돌아온 수영의 정중한 말을 듣고 천천히 눈을 깜빡인 정심이 다시 한 번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윤재의 예상대로 모처럼 만에 아들의 새로운 친구를 소개받은 그녀는 순수하게 기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윤재...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착한 아이에요...”
“어머니.”
자연스레 자신에게 향해진 수영의 시선에 민망한 기분이 든 윤재가 모친을 향해 그만 하라고 눈짓을 보낸 순간 문득 그의 머리맡으로 나직한 중저음이 내려앉았다.
“알고 있습니다.”
“!”
갑작스런 수영의 대꾸에 윤재가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그 사이 모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워낙 얌전한 아이라 친구를 데려오는 일이 흔치 않은데... 병원까지 데려오다니... 수영씨와는 많이 친한가 보네요.”
정심의 말을 듣고 윤재를 슥 한 번 쳐다본 수영이 쓴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평소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 많지 않은 아들을 내심 걱정해 왔던 정심이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구태여 성격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금 윤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또래의 평범한 청년들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술자리를 갖고 연애를 할 정도로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실제로 하루하루 불어나는 병원비만 해도 그가 혼자서 감당하기 벅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심은 그렇기 때문에 한 시라도 빨리 자신이 퇴원해서 조금이나마 아들의 부담을 덜어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야속한 현실은 그런 그녀의 바람을 차갑게 외면하고 있었다.
행여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윤재의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남아있기를 정심은 바라고 있었다. 외아들로 태어나 줄곧 바쁜 맞벌이 부모 아래서 외롭게 성장해 온 아들이 언젠가는 그를 끔찍이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기를. 받기보다 주는 것에 더 익숙한 아들이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주는 소중한 사람과 만날 수 있기를 정심은 늘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해 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도는 그녀의 몸 상태가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더욱 더 간절해져만 갔다.
“우리 윤재... 잘 부탁해요.”
마치 스물여덟의 성인 아들이 아닌, 코흘리개 아들을 부탁하는 것과 같은 말.
그 안에서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을 읽어낸 수영은 곧바로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는 대신 얼마동안 진지한 태도로 생각에 잠긴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것은 곁에 서있는 윤재가 지금까지 들어온 것 중 가장 진지한 수영의 목소리였다.
*
아침 뉴스에서 보았던 일기예보대로 저녁때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가 고요하게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예상 밖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야 병원을 빠져 나온 수영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조금 피로해진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미리 정해져 있던 저녁 약속을 병원에 있던 중간 전화 연락을 통해 취소했던 그는 이제부터 남은 저녁 시간을 귀가 후 회사에서 가져온 일을 하는 데에 사용할 예정을 갖고 있었다.
한층 간절해진 담배 생각을 일단 떨쳐내고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수영이 처음 자세 그대로 얌전히 조수석을 지키고 앉아 있는 윤재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위험한 상태까지 가지 않으셔서 다행이야.”
수영과 스치듯 시선을 마주한 윤재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당장 내일 아침에 다시 병원에 갈 예정이긴 하지만 일단 지금 집에 돌아가서는 편히 마음 놓고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윤재였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만큼 모친의 입에서 습관적으로 나오는 괜찮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앞에 시선을 던져 지금의 시간을 확인한 윤재가 차안을 채우고 있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갑작스런 인사를 받고 흘깃 윤재를 쳐다본 수영이 다시 앞 유리창으로 시선을 옮기고서 말했다.
“내가 병문안 가고 싶다고 아까 낮에 전화로 말했었잖아. 나 하고 싶은 대로 한 것뿐이니까 네가 인사할 필요 없어.”
“그래도...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 기다려야 했잖아요. 저녁 약속까지 취소하고서. 예정 없이 기다리는 거... 당신은 싫어하지 않았나요?”
오래 전 수영과 만나던 당시의 일을 떠올린 윤재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즉답 없이 운전대를 잡은 손만을 살짝 씩 움직인 수영이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 사이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앞 유리창에 머물러 있었다.
“싫어하지만 오늘은 싫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잖아. 사실 너랑 있는 내내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느라 중간부터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어.”
“.......”
“어머니가 널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더라. 너도 그렇고.”
아까 전 병원 복도를 지나다 우연히 윤재의 이모인 은심의 전화 통화 내용을 들었던 수영은 생각보다 높은 병원비의 액수에 내심 조금 놀랐었다. 정확한 내부 실적까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겉으로 보이는 <민들레>의 운영 상황이 그다지 순탄치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윤재가 혼자 힘으로 그 많은 액수를 감당할 수 있을지 수영으로선 심각하게 걱정이 됐다.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자신의 도움을 받는 것을 끝내 거부할 윤재를 알고 있는 수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윤재의 눈을 피해 자신이 그를 대신해 병원비를 낼 수 있을 만한 방법을 진지하게 강구하고 있었다.
젖은 도로 위로 차량들이 지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져 들려오는 가운데 얼마 동안 차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윤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그냥 흘려 넘기세요.”
눈에 익은 골목을 시야에 들이고 천천히 속도를 줄인 수영이 침착한 말투로 대꾸했다.
“어떤 말씀? 네가 착한 아이라고 하신 거?”
“.......”
“.......”
“...저를 부탁한다고 하신 거요.”
잠시 망설이다 직접적으로 말을 꺼낸 윤재가 수영을 바라보았다.
윤재의 말에 즉답하지 않은 채 좁은 동네 안으로 능숙하게 차를 진입시킨 수영은 마침내 눈에 익은 빌라 앞에 차를 세우고서야 한참동안 붙잡고 있던 운전대에서 손을 떼어내고 제대로 윤재를 쳐다보았다.
“난 흘려 넘길 생각 없어.”
“알잖아요. 그건 그냥 지나가는 인사치레 같은 거였어요. 별 의미 없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와 너희 어머니,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약속이야. 그건 너라고 해도 터치할 수 없어.”
“.......”
“나는 뻔뻔하긴 해도 거짓말쟁이는 되기 싫으니까 그냥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노력할 거야.”
거기까지 말한 수영이 윤재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덧붙여진 말은 없었지만 대신해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각오해.’라고.
고집스런 남자를 상대로 당장 어떤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 알 수 없어진 윤재가 일단은 이쯤에서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수석 문으로 팔을 뻗은 순간, 문득 그보다 한 템포 빠르게 옆에서 뻗어져 온 손이 그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에 앞서 익숙한 스킨 향을 한층 강하게 코로 느낀 윤재가 등에 둘러지는 단단한 팔의 감촉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자신이 수영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실은 그는 그러나 곧바로 귓가를 스친 말을 듣고 움직임을 멈췄다.
“무리하지 마.”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이어진 말을 듣고서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너 혼자서 다 짊어질 필요 없어. 그러지 마.”
아까 전 병원에서 미동 없이 앉아 한참이나 수술실 문만 바라보고 있던 윤재의 뒷모습을 떠올린 수영이 깊은 한숨을 참아내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혼자서 힘에 부치면 옆에 있는 사람도 써먹어. 나든 성호든, 아니면 그 이준석인가 뭔가 하는 친구든. 네가 부려먹겠다고 하면 내 몸 얌전히 내 줄 테니까.”
지금 당장 윤재의 어깨 위에 짊어져 있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수영으로선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다만 아까 전 병원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고 연약해 보여서 수술실 앞에서 나란히 자리를 지키는 내내 수영은 그런 윤재의 모습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초라할 만큼 비쩍 마른 등을 꼭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간절히. 바로 지금과 같이.
“들어가서 쉬어. 피곤할 텐데.”
차에서 내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윤재를 향해 그렇게 말한 수영이 그대로 차를 출발시키려고 하자 문득 반쯤 열려 있는 조수석 창문 너머로 윤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갑작스런 윤재의 말을 듣고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인 수영이 곧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다시 돌아온 윤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재의 한 손에는 중간이 불룩하게 튀어 나와 있는 종이백이 들려져 있었다.
곧바로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의자 위에 종이백이 놓이는 것을 지켜본 수영이 ‘이게 뭐야?’라고 질문을 던지자 열린 문틈 사이에 선 윤재가 대답했다.
“전에 주방용품 옮겨다주셨을 때 주전자 놓고 가셨잖아요.”
윤재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그 사실을 떠올린 수영이 ‘아.’하고 짧게 소리를 내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전자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만큼 돌려받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있는 그였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자꾸 고맙다고 하면 대가로 뭔가 요구하고 싶어지니까 그만 둬.”
“.......”
“내일 가게 문 열려면 푹 쉬어.”
짧게 인사를 교환하고 차를 출발시킨 수영은 사이드미러에 비친 윤재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지켜보다 앞 유리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랑비를 맞으며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확인한 수영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 모친의 상태는 위급한 상황까지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계속 치료를 받는 동안 모자 모두 적지 않은 고생을 감수해야 할 터였다. 처음엔 몇 년 전과 마찬가지로 마른 체형을 하고 있는 윤재를 보고 단순히 체질상 살이 찌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던 수영도 이제 어느 정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상황을 알게 된 지금 윤재가 바짝 마른 몸을 하고 있는 게 오히려 당연한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영이 몇 차례 같이 식사를 하며 관찰했던 윤재는 그때마다 겉보기와 달리 평범한 성인 남자 수준의 양을 무리 없이 먹었었기 때문에 단순히 입이 짧아 살이 찌지 않는 거라는 이론을 대입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물론 몇 차례 함께 식사를 한 것만으로 평소의 식습관까지 모조리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교통신호에 따라 잠시 차를 멈춰 세우고 뻐근한 목을 쓸어내린 수영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놓여 있는 종이백을 쳐다보았다.
윤재는 주전자가 들어 있다고 했지만 그 날 샀던 주전자의 크기를 생각하면 종이백의 배 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불룩 튀어 나와 있었다.
앞 유리창 너머로 신호 상황을 확인하고서 종이백으로 손을 뻗은 수영이 일단 가장 먼저 잡힌 주전자를 꺼낸 뒤에도 아직 묵직한 무게를 유지하고 있는 종이백을 가까이로 가져와 안을 살피던 중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주방용 비닐봉지에 뭔가가 들어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비닐봉지를 열어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수영은 예상대로 손바닥에 서늘한 감촉을 닿아온 것과 동시에 지금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물건의 정체를 확신했다.
비닐 안에서 드러난 세 개의 유리통 안을 채우고 있는 건 각각 다른 종류의 반찬으로, 혹시나 이동 중에 국물이 샐까 염려한 듯 세 통 모두에 꼼꼼하게 비닐 랩이 감겨져 있었다.
-‘혹시... 지금 또 만들어 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또 부탁해도 돼?’
언젠가 백화점을 나서는 길에 윤재와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를 머릿속에 떠올린 수영이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당시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던 터라 아쉽게 그대로 잊혀지는가 싶었던 대화를 윤재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윤재...”
나직이 윤재의 이름을 중얼거린 수영이 문득 뒤에서 들려온 경적소리를 듣고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 운전대를 잡았다. 묘하게 차안의 온도가 조금은 오른 것 같은 기분에 차창을 살짝 내린 그는 곧바로 옆으로 손을 뻗어 오디오의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연신 밀려들어오는 바람을 잠시 동안 얌전히 뺨으로 맞아주던 수영이 천천히 한손을 들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일단 차에서 내리면 담배부터 입에 물어야겠다고, 여전히 머릿속 한켠에 윤재의 얼굴을 둔 채로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