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48화 (48/66)

48.

모친이 언급된 뒤부터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된 윤재는 앞서 차로 향하는 해준의 뒷모습을 얼어붙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연하게도 자신을 협박하는 정체불명의 남자와 같은 차를 타는 것에 강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는 윤재는 해준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질 때까지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곧바로 따라오지 않는 윤재를 돌아보고 쯧 하고 짧게 혀를 찬 해준이 발걸음을 돌려 다시 윤재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윤재가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지 짐작하고 있는 만큼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그의 태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해준이었다. 아마 입장이 바뀐다면 자신 역시 비슷하게 행동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잔뜩 겁먹을 거 없어. 진짜로 얘기만 좀 하려는 것뿐이니까.”

보통의 상대라면 좀 더 험하게 나갔겠지만 지금의 상대는 보기 안쓰러울 만큼 비쩍 마른 데다 한쪽 다리마저 온전치 않다는 사실을 감안한 해준은 일단 짜증스런 기분을 한 차례 가라앉힌 뒤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남들은 한창 잠들어 있을 싸늘한 새벽.

몇 시간에 걸친 노동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윤재는 그럼에도 눈빛만큼은 또렷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눈앞의 상대가 상대인 만큼 의식적으로 더 바짝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고 있는 중일 거라고 짐작한 해준은 잠시 후 미간을 찌푸리는 작은 표정의 변화를 보인 윤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멀리 갈 것 없이 얘기가 하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해요.”

한참의 침묵 끝에 윤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쉽사리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윤재의 태도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해준은 어른으로서의 배려를 발휘해 자신이 여기서 한 발 뒤로 물러서주기로 했다.

“차를 타지 않겠다면 좋아. 난 얘기만 할 수 있으면 장소야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

“그럼 어디로 가서 얘기할까? 난 추운 건 질색이라 바깥만 아니면 돼.”

어쨌든 하나는 양보해주겠다는 해준의 대답을 듣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윤재는 그러나 여전히 눈에서 경계의 빛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장소 선택권을 부여받은 윤재가 두 시간 여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반짝거리던 간판의 불이 완전히 꺼져 있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실 이 부근의 술집 가운데서 가장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는 <민들레>가 영업을 끝낸 이 시간에 아직까지 남아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해준의 차에 탈 생각도, 그렇다고 당장 달리 갈 곳도 없는 상황에서 잠시 고민하던 윤재가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해준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시 문을 열 테니 가게 안에서 얘기하죠.”

“상관없는데... 차는 내줄 거야?”

“저 골목 끝에 자판기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사와도 상관없어요.”

“생긴 거랑 다르게 영 불친절하네.”

비아냥대는 해준의 말을 흘려 넘긴 윤재가 먼저 몸을 돌렸다.

결국 내렸던 셔터를 다시 올리고서 가게 안으로 들어간 윤재는 홀의 중심을 밝히는 불 하나를 켠 뒤 그 사이 태연하게 자신을 뒤따라 안으로 들어선 해준을 돌아보았다.

청소를 시작할 때쯤 난방을 껐던 탓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가게 안을 슥 한 번 둘러본 해준은 테이블 아래 잘 정리되어 있는 의자 중 하나를 빼내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이전과 꼭 닮아 있는 그의 행동은 자연히 윤재로 하여금 기시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내 차를 타느니 가게에 단 둘이 있는 쪽이 나은 모양이지?”

“어차피 차를 타도 단둘이 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돌아온 딱딱한 반문에 ‘뭐, 그렇긴 하지.’라고 가볍게 대꾸한 해준이 가게에 들어선 이후로 줄곧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윤재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다리도 불편한데 그만 앉지 그래?”

“난 상관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요.”

모친의 이야기가 나온 뒤로 잔뜩 경직되어 있는 윤재의 모습을 잠시 동안 관찰하듯 쳐다보던 해준은 한 시라도 빨리 자신과 헤어지고 싶을 상대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하고 그쯤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지는 알고 있지?”

“.......”

“그 전에 일단 한 가지는 사과해야 할 것 같네.”

사과라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윤재가 쭉 그를 향하고 있던 해준의 시선과 마주했다.

“아무래도 내가 당신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 그냥 잠시 붙어먹다가 떨어져 나갈 잔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

“당신은 몰라도 그 남자는 당신한테 진심인 모양이야. 사실 지금도 잘 안 믿기긴 하지만.”

어째서 해준이 그와 같은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건지, 또 어째서 일부러 자신에게 이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인지 윤재로선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얘길 하는지 궁금하지? 뭐, 사실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되든 변할 건 없거든. 아니, 오히려 그 덕분에 날 여기로 보낸 사람만 제대로 열이 받았지. 원래도 성격이 별로 좋은 편은 아닌데 화가 나면 진짜 무섭거든.”

그 말 대로였다. 일단 의뢰를 받은 입장에서 ‘그 날’ 에서 우연히 들었던 수영과 그곳 오너의 대화내용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호연에게 전달했던 해준은 전화로 보고를 받고 난 뒤에도 얼마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호연의 반응을 통해 그가 얼마나 강한 충격을 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곧바로 거친 목소리가 들려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한동안의 침묵 뒤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도 고요해서 오히려 해준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사실 해준과 마찬가지로 윤재와 수영의 관계가 한시적일 거라고 판단했던 호연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두 사람의 관계가 소멸될 거라는 생각 하에 최근까지 한 발 물러서서 방관하는 태도로 상황을 지켜봐 왔었다. 호연이 윤재의 존재를 알게 된 것만도 어느새 3개월이 넘어 섰으니 지금까지 그가 수영과 관련해서 들어온 과거의 예시들을 대입하면 이제??둘 사이의 관계도 슬슬 시들어갈 시점이 된 것이었다.

멋진 바(bar)를 가진 능력 있는 오너의 얼굴로 태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속으로는 항시 수영과 윤재의 관계가 끝날 타이밍을 저울질 하고 있었던 호연으로선 시간이 흘러갈수록 커져가던 희망이 한순간에 짓밟히는 보고를 받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해준은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었다.

알고 지낸지 십년이 훌쩍 넘는 기간을 통틀어 호연이 이처럼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있는 해준은 놀라는 한편으로 지금의 이 상황이 이제껏 호연에게 받아온 도움에 대한 마음의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고 있었다. 거기에 얼마 전 착수금의 형태로 적지 않은 금액의 돈까지 받음으로써 반드시 이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함께 떠안게 된 해준은 이미 한 번의 친절한 경고가 깨끗이 묵살당한 상황에서 다소 독한 생각까지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수영이 설마 윤재를 상대로 이렇게 진지하게 나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그는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시점에서 더 이상 얌전히 기다리는 건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이번엔 진짜 제대로 처리해.’

-‘알았어. 일단 처리는 하겠는데 그렇다고 우수영이 너한테 온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맡은 것만 책임 져.’

오늘 이곳에 오기 전 호연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해준이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약이 오를 대로 바짝 오른 상태의 호연은 만약 <민들레>의 주인이 이번에도 말을 못 알아듣거든 정신을 차리도록 경고하는 차원에서 아주 반쯤 죽여 놓으라는 조언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처럼 과격한 말을 전하던 목소리는 너무도 침착해서 마주한 해준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 진짜. 장호연도 사랑에 눈이 머니 자존심이고 뭐고 이제 완전히 대놓고 질투하는 속 좁은 계집애가 다 됐구만...’

오만하게 턱 끝으로 남자를 부리던 호연의 과거를 떠올리자 씁쓸한 기분이 든 해준은 그쯤에서 짧은 회상을 멈추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당신이 밀어내.”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해준이 윤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애초에 그 남잔 당신 짝이 아니야. 유유상종이라는 말 알지? 사실 그쪽엔 당신보다 더 잘 맞는 상대가 있거든. 비슷하게 뻔뻔하고, 가진 것 많고, 코끝으로 사람을 부리는 오만한 상대가. 둘이 아주 죽이 잘 맞지. 돈 많이 드는 취미도 비슷하고 말이야. 어느 한 쪽이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지.”

“.......”

“그러니 당신도 당신에게 꼭 맞는 상대를 찾아. 당신처럼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 그게 당신을 위한 길이야.”

“나를 위한 길이라고요?”

뜻밖에 곧바로 대꾸를 해오는 윤재를 조금 가늘어진 눈으로 쳐다본 해준이 같은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래. 당신을 위한 길이야.”

“날 생각해서, 날 위한 조언을 해주겠다고 일부러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요? 내가 아니라, 그 사람과 내가 이어지는 걸 보는 게 싫은 누군가를 위해서 여기에 온 거라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오는 윤재를 얼마간 조용히 마주보던 해준이 문득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재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담배를 꺼냈다.

“이유가 뭐가 되던 무슨 상관이야. 결국 중요한 건 결과일 뿐이지.”

“.......”

“전에 당신이 그랬지. 당신이 우수영을 사랑하면 다 괜찮아지는 거냐고. 혹시 그 생각 지금도 가지고 있는 거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윤재를 쳐다보며 한 차례 길게 연기를 뱉어낸 해준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좋겠어. 그건 진짜 멍청한 생각이니까.”

“.......”

“딱 잘라 말할게. 그냥 이것저것 생각할 거 없이 눈 딱 감고 끝내. 저번에 여기에 왔을 때 내가 점잖게 조언했었는데 당신은 내 말을 무시했지. 근데 이번엔 그럴 수 없을 거야.”

“처음부터 내 의견은...”

“그래, 당신 의견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지금 의견을 묻거나 부탁하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똑똑히 잘 들어. 얌전히 내 말대로만 하면 당신한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나도 어렵게 사는 사람 괴롭히는 취미는 없으니까. 당신은 그냥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조용히 살면 되는 거야. 나쁘지 않지?”

“내가 왜... 내 의지가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일방적인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죠?”

“그렇게 안 하면 당신 인생이 망가져버릴 테니까.”

태연한 목소리로 협박을 하는 해준을 굳은 얼굴로 바라본 윤재가 곧바로 이어지는 말을 듣고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주변 사람들한테 당신이 남자랑 자고 그런 거, 말 한 적 없지?”

“.......”

“없겠지. 당신은 딱 봐도 그런 거 주변에 꽁꽁 숨기고 살 타입이니까. 뭐, 대다수 게이나 바이가 성 정체성 숨기고 살고 있으니 특별할 것도 없지만.”

“나는 그런 적...”

“아, 그래? 딱 잡아 떼시겠다? 신께 맹세코 우수영이랑은 몸을 섞은 적이 없다고? 그럼 어디 진짜 끝까지 한 번 해볼까? 내가 당장 내일부터 주변에 소문내고 다닐 테니까 당신이 알아서 그런 적 없다고 변명하고 다녀 봐. 보아하니 거짓말이 영 서툴 것 같긴 한데 잘 하면 속아 넘어가는 사람도 몇 명은 있겠지. 근데 난 당신보다 훨씬 말발이 좋거든.”

경직된 윤재의 얼굴을 슬쩍 훑어보고 다시 한 번 깊이 연기를 빨아들인 해준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담배 끝을 툭툭 쳐서 맨 바닥에 재를 털어냈다. 어차피 좋은 소리도 못 들을 입장에서 이제 와 굳이 귀찮게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내가 보기에 당신, 아웃팅 당하면 절대 못 견딜 거야. 앞으로 지금까지처럼 평범한 삶은 살 수 없는 거라고.”

아웃팅이라는 단어에 움찔하는 윤재를 쳐다보고 속으로 웃은 해준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먼저 차버리는 거야. 그런 잘난 남자를 찰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적당히 우월감도 좀 느끼면서. 그럼 그 남자도 자존심이 강하니까 머지않아 깨끗이 당신을 포기하고 떠나겠지. 그럼 끝. 각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거야. 어때, 깔끔하지?”

“.......”

“.......”

“만약... 내가 노력해도 그 사람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생각보다 자신감이 꽤 높네?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명백한 비웃음이 섞인 질문에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의 일도 있으니까 이번엔 시간 길게 못 줘. 나도 돈 받고 움직이는 거라 내 뜻대로 다 할 수가 없거든. 그래도 일단 내 재량으로 줄 수 있는 마지노선은 한 달 정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알아서 잘 활용해봐. 당신 능력껏.”

멀찍이 서있는 윤재를 바라보며 그렇게 덧붙인 해준이 거의 다 타버린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준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곧바로 그에게 시선을 던진 윤재가 천천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상대의 모습을 경계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굳이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당연히 그 남자한테 이 얘긴 비밀이야.”

“당신을 뒤에서 사주한 사람이 누구에요?”

“왜? 이제 와서 알아서 뭐하시게?”

“나는 그 사람 얼굴도 모르는데 그냥 이렇게 앉아서 무방비로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 그 사람은 이런 하찮은 가게 주인이랑 얼굴 맞대고 얘기도 못 할 만큼 겁쟁이인가요? 겨우 그 정도 용기도 없어서 사람까지 사서 이런 더러운 짓을 하는 거예요? 비겁하게! 이러고 자신은 뒤에서 세상에 둘도 없이 깨끗한 얼굴을 하고 살고 있겠지요!”

한동안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던 윤재의 입에서 처음으로 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지켜본 해준이 희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지금 들려온 말은 하나하나가 너무도 옳아서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만약 자신이 호연의 편만 아니었다면 옳다며 박수까지 보냈을 지도 모르겠다고 해준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이 상황을 누군가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면 절대 다수가 윤재의 말에 동조할 것이었다. 아니, 실제로 같은 편의 입장인 해준조차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호연이 뒤에서 비겁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건. 윤재의 말대로 뒤에서는 이런 작당을 꾸미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너무도 태연하게 성공한 오너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는 그는 해준이 봐도 얄미울 정도의 완벽한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윤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무엇이 더 낫다고 할 건 없었지만 사실 호연은 용기가 없어서 윤재와 만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용기의 문제였다면 이미 이곳을 방문했던 그 날 모든 것을 끝내버렸을 그였다.

호연은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의 손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든 비겁하다는 얘기를 듣기엔 충분했지만 다른 사람의 손을 씀으로 인해 자신의 손은 아직 깨끗하다는 자기만족을 위해서는 나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호연은 가진 자였고 결국 이 세상은 가진 자의 뜻대로 돌아간다는 것이 정론인 만큼 명백한 약자인 윤재가 지금 여기서 아무리 억울하니 뭐니 호소해봐야 승리자는 호연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결론은 그것이었다. 선량한 약자는 결국 비겁한 강자를 이길 수는 없다는 것.

윤재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호연의 입장 역시 이해하고 있는 해준은 둘 사이를 잇는 남자를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애초에 호연과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호연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자신에게 반하게 만든 상황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는 것을 이미 이별한 순간 호연의 존재를 깨끗이 머릿속에서 지워냈을 수영은 지금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이 없었던 탓에 정말로 좋아하게 된 사람에게 어떻게 어필해야 하는 것인지 그 요령을 모르는 호연은 결국 이런 무리한 방법까지 동원해 가며 떠나간 남자를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별처럼 빛나던 과거의 호연을 아는 해준의 입장에선 안타까움을 넘어서 진지하게 처량함마저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중립의 눈으로 봤을 때, 호연의 마음을 붙잡은 수영이 정작 자신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대에게 진심이 되어버린 것이 이런 비틀린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윤재는 결국 이 상황과 관련하여 그저 순수한 희생양일 뿐이었다.

“당신의 입장이면 화낼 만 해. 이해해.”

“.......”

“하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지금 여기서 당신이 아무리 성토해봐야 결국엔 좀 전 당신의 말대로 뒤에 숨어있는 그 ‘비겁한 놈’이 웃게 될 거야.”

냉정한 해준의 말을 듣고 미간을 좁힌 윤재가 문득 자신의 어깨에 놓이는 해준의 손을 알아채고 몸을 뒤로 빼려하자 곧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급격히 좁혀졌다.

“더는 당신이 고통 받을 필요 없어. 나와 다시 만나기도 싫잖아? 솔직히 난 당신이 슬슬 마음에 들어가고 있지만. 다시 이렇게 보니까 농담이 아니라 당신 진짜로 꽤 매력 있는 것 같아. 얼굴도 취향이고.”

자신의 어깨를 쥔 손에 살짝 힘이 실리는 것을 느낀 윤재가 놓으라고 말하기 직전 해준의 손이 깨끗이 떨어져나갔다.

“일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이제 좀 자둬야겠지? 나도 슬슬 잠이 오니까 이만 가볼게.”

“.......”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었으리라고 믿어. 다음은 없으니까 잘 처신해. 어느 날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당신을 쳐다보거든 내가 움직였다고 생각하면 돼.”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섬뜩한 협박을 남긴 해준이 가게를 나선 뒤 얼마간 미동 없이 그 자리를 지키던 윤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스름하게 밝혀진 가게 앞은 좀 전까지 세워져 있던 고급 승용차가 떠나 휑하게 변해 있었다.

처음 해준의 입에서 모친이 언급된 뒤 차에 타라는 제안까지 들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일단은 큰 문제없이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도 있었지만, 그와의 만남으로 인해 마치 시한폭탄이 몸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불안함을 안게 된 윤재는 다시 혼자가 된 뒤에도 좀처럼 표정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당신이 먼저 차버리는 거야. 그런 잘난 남자를 찰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적당히 우월감도 좀 느끼면서. 그럼 그 남자도 자존심이 강하니까 머지않아 깨끗이 당신을 포기하고 떠나겠지. 그럼 끝. 각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거야. 어때, 깔끔하지?’

굳이 해준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처음 수영과 재회를 한 뒤 줄곧 그를 밀어내려고 노력해온 윤재였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해서 따로 의식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수영을 밀어내려 노력하는 것을 멈추고 어느 샌가 그가 자신의 곁에 머무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방치해두기 시작했음을 윤재는 아까 전 해준의 말을 들은 뒤에야 간신히 자각했다. 웃음이 나왔다. 줄곧 그가 떠나길 원하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 그를 떠나보낸다는 사실에 무거운 기분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에게.

재회를 한 이후로 서서히 이곳을 찾는 횟수를 늘리더니 어느 틈엔가 자신의 일에 진지하게 화내고 안타까워하기 시작한 수영의 모습을 보며 윤재는 이제 더 이상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진지하게 사귀고 싶다고 한 수영의 제안 역시 그냥 한순간 스쳐가는 말일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수영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에서부터 이미 윤재는 무의식적으로 조금씩이나마 수영이 자신의 곁에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이 이리도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수영과 깨끗이 끝을 낸 뒤 원래의 삶을 되찾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져야 정상일 텐데. 당연하게도 그와 다시 맺어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을 텐데.

몸을 섞는 연인은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고 같이 밥을 먹는 정도의 친구는 되어도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수영이 가끔씩 그답지 않게 던지는 농담을 듣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씩은 꼭꼭 <민들레>에 얼굴을 비추는 그와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싫지 않았다.

-‘혼자서 힘에 부치면 옆에 있는 사람도 써먹어. 나든 성호든, 아니면 그 이준석인가 뭔가 하는 친구든. 네가 부려먹겠다고 하면 내 몸 얌전히 내 줄 테니까.’

더없이 진지하던 그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순간 자신을 감싸고 있던 품의 체온과 익숙한 향도. 마치 조금 전의 일처럼 신기할 만큼 생생하게 떠오른 기억은 한동안 머릿속에 머물러 있다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러나 어차피 애초에 그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 날의 어스름한 새벽녘, 수영을 거절한 시점에서 이미 모든 것은 정리되어야 할 수순이었던 거였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 윤재는 한참 만에 다리를 움직여 자리를 벗어났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서 자리를 옮겨 조금 전 해준이 멋대로 버리고 간 담배꽁초와 재를 치우기 위해 무릎을 굽힌 그는 순간적으로 일시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거대한 침묵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깊이 가라앉아 가는 기분을 애써 추스르고 구겨진 담배꽁초를 주워 손바닥에 담은 윤재는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서 쉬어야 한다는 하나의 생각만을 떠올리며 서둘러 바닥에 버려져있는 담뱃재를 손날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

“오늘은 손님이 많네. 전에 왔을 때는 이상할 만큼 적어서 좀 걱정이 되더구만...”

“네, 요 앞 가게가 행사를 그만 둔 뒤로 원래 오시던 분들이 다시 이쪽으로 오시더라고요.”

“에이- 철새들. 다른 데서 행사를 하든 말든 우린 그동안 쭉 여기로만 왔다고. 이 정도면 의리 있는 거지?”

“네, 그럼요.”

“그럼 서비스로 뭐 한 접시 더 안 나오려나...?”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대놓고 서비스를 기대하는 양과장의 모습을 보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성호가 이참에 분위기를 몰아가기 위해 옆에서 ‘서비스’를 작게 외치는 양과장의 일행을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시야에 들였다.

과연 이런 들뜬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점잖게 원래의 페이스를 지키고 있는 수영이 성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온 순간 가벼운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얼마 전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은 이후 매일 같이 야근에 시달리느라 오랜만에 간신히 회식 차 동료들과 <민들레>를 찾은 수영은 가게 안에 들어선 것과 동시에 자연스레 윤재부터 찾았지만 주방 일이 바쁜 건지 윤재는 수영의 일행이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친 지금까지도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사장님이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평소 사무실 내에서 <민들레>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가장 앞에 나서서 윤재의 칭찬을 늘어놓던 혜리가 주방 입구를 쳐다보며 묻자 지금 막 주문서를 들고 등을 돌리려던 성호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네. 오늘은 평소보다 손님이 많아서요. 지금 안에서 바쁘게 일하고 계세요.”

“그렇구나... 오랜만에 얼굴 보고 싶었는데... 그간 일이 많아서 좀처럼 회식을 가질 기회가 없었거든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짓는 혜리에게 작은 미소로 대꾸를 한 성호는 지금쯤 한창 혼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윤재를 떠올리고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어? 벌써 나갈 거 다 세팅해 놓으신 거예요?”

“응. 거기 앞에 접시 네 개 한 쟁반에 담아서 3번 테이블로 가져가면 돼.”

예상대로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다가간 성호가 바로 옆 테이블에 놓여 있는 완성된 접시를 쟁반으로 옮기며 말했다.

“밖에 우대리님이 동료 분들과 같이 와계세요. 오랜만에 양과장님도 오셨고요.”

“...그래?”

성호의 말에 형식적으로 대꾸를 한 윤재의 시선은 커다란 양푼 안에서 버무려지고 있는 샐러드에 머물러 있었다.

“오랜만에 온 혜리씨도 사장님 얼굴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시간 날 때 잠깐 나가서 인사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소중한 단골손님이니까 좀 더 신경 써 드리는 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달하던 성호가 문득 윤재의 손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사흘 전부터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윤재의 분위기를 읽어낸 성호는 처음엔 단순히 자신의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했지만 그와 같은 분위기가 사흘째 이어지자 윤재에게 자신이 모르는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서서히 진지하게 들고 있었다. 영업을 시작하기 전 혹시나 싶어 윤재에게 최근 모친의 상태에 대해 물었던 성호는 다행히 안심이 되는 대답을 들은 지금에도 여전히 마음 안에서 우려의 그림자를 깨끗이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만큼 더욱 마음이 쓰이는 성호였다.

“인사는 조금 뒤에 주문받은 접시 내갈 때 할게. 일단 그것부터 좀 서빙해 줄래?”

“아, 네.”

지시에 따라 주방을 나서는 성호의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쫓은 윤재는 이내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반쯤 완성되어 있는 샐러드를 마저 버무리기 시작했다.

바깥에 수영이 와 있다는 사실이 윤재의 가슴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조만간 수영이 <민들레>를 찾으리란 걸 짐작하고 또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해준과의 만남 이후 처음으로 수영의 얼굴을 마주하게 될 상황을 바로 눈앞에 둔 윤재는 마치 커다란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배우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괜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 일에 매진하려하면 할수록 궤도를 이탈한 머릿속 일부는 홀로 먼 다른 곳을 배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얼마간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품은 채 손을 움직이던 윤재가 양과장의 테이블에서 주문받은 안주들이 담긴 쟁반을 들고 홀로 나갔다. 주방을 나서자마자 자연스레 양과장 일행이 차지하고 있는 창가 쪽 넓은 자리에 시선을 던진 그는 자연스레 눈에 익은 일행 가운데서 수영의 모습을 찾아내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어머, 윤재씨 왜 이제 나왔어요? 빨리 예쁜 얼굴 좀 보여주지...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혜리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로 답한 윤재는 나머지 일행과도 몇 마디 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들고 온 쟁반에 담긴 접시들을 차례로 테이블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이어 혜리의 손을 거쳐 다시 자리를 잡은 접시들은 각각의 안주들로 과하다 싶을 만큼 넉넉하게 채워져 있었다. 단골손님을 우대하는 평소 영업 정책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많은 양이었다. 물론 그 풍성한 접시들을 확인한 손님들의 입은 자연스레 귀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와- 양이 엄청 나네.”

“역시 이 맛에 단골손님 한다니까.”

“이렇게 많이 주면 뭐 남겠어요? 사장님.”

무척이나 좋아하는 양과장 일행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들으며 짧은 시간 자리를 지키던 윤재가 자신을 향하고 있는 선명한 시선을 알아채고 테이블 아래로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떠들썩한 가운데 오직 자신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는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불편한 마음을 안고서 그쯤에서 몸을 돌려 주방으로 돌아온 윤재는 이후 한참동안 홀로 나가지 않았다. 열린 입구에서 연신 들려오고 있는 양과장을 중심으로 한 일행의 대화소리가 꽤나 길게 이어지는 내내.

대화 내용의 대부분은 최근 시사와 관련된 문제로, 어느새 걸쭉하게 취해버린 듯한 몇몇 직원은 정치 이야기를 하는 도중 중간에 거친 욕을 섞기도 했다. 그 와중에 중간 중간 짧게 들려오는 수영의 낮은 목소리는 끝이 발갛게 변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던 윤재의 손을 한 차례씩 멈추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도 간혹 스치듯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자연히 귀가 반응하는 것을 의지만으로 막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 뒤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던 수영의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느낀 윤재는 잠시 손을 멈춘 채 줄곧 홀에서 일을 하던 성호가 계산에 나선 듯 보이는 양과장과 나누는 짧은 대화를 들었다.

“잘 먹었어요-.”

“또 올게요~.”

“저희 갑니다. 사장님~.”

한 차례 떠들썩하던 바깥이 일시에 잠잠해지고 나서 얼마 뒤 윤재가 멈춰 있던 손을 다시 움직인 것과 동시에 문득 그의 등 뒤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식 다 끝날 때까지 눈길 한 번 안주다니 너무 한 거 아니야?”

“!”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단정한 수트 차림을 한 채로 주방 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수영의 모습을 확인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조금 전 수영이 다른 일행과 함께 가게를 나섰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로서는 지금의 이 상황이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의식적으로 한 차례 마음을 진정시킨 윤재는 천천히 곁으로 다가오는 수영의 모습에서 떼어낸 시선을 주방 안 아무 곳에나 적당히 던진 채 입을 열었다.

“일이 바빠서요... 죄송해요.”

“그렇게 진지하게 사과하지 마. 그냥 농담한 거니까.”

“.......”

사이를 채우고 있는 어색한 공기를 읽어낸 것일까, 얼굴 위에 드리워져 있던 엷은 웃음기를 지워낸 수영이 뭔가를 말하려고 한 순간 그보다 한 발 앞서 윤재가 입을 열었다.

“다른 일행 분들과 같이 나가신 줄 알았는데요.”

“그럴까 했는데 보아 하니 일이 좀 바쁜 것 같아서.”

“...네?”

“손님이 어느 정도 줄어들 때까지 손 좀 보태주고 갈게. 뭐, 사실 도와준다고 해봐야 난 요리는 못 하니까 기껏해야 테이블을 치우거나 서빙을 하는 정도겠지만.”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일순 눈을 크게 뜬 윤재가 수영의 눈에 보이지 않는 쪽의 주먹을 살며시 말아 쥐었다. 이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부서진 손톱 부근의 통증이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자 현실로 다가왔다.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이제 진짜로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마치 일상처럼 너무도 자연스레 다정한 말을 건네 오는 남자를 태연하게 대하는 것은 거짓말이 서툰 윤재에게 있어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상했다.

처음부터 수영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 늘 당연하게 그를 밀어내려 했던 자신은 결국 이런 상황을 기다려왔었던 것일 텐데 막상 이별의 순간을 머릿속에 그리자 조금도 후련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괜찮아요. 어제는 오늘보다 손님이 더 많았는데 성호랑 둘이서 문제없이 일했어요.”

“그래도 셋이서 하면 각자 맡을 분량이 많이 줄잖아.”

어느새 재킷을 벗은 수영이 근처 빈 선반에 벗은 재킷을 놓으려하는 것을 급하게 손으로 막은 윤재가 말했다.

“정말로 괜찮아요. 이제부터 슬슬 손님이 줄어들 시간이니까 둘이서 충분해요.”

뜻밖에 단호한 태도로 거절을 거듭하는 윤재를 몇 초간 진지하게 쳐다보던 수영이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급격히 차분해진 수영의 목소리 톤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낀 윤재가 ‘아뇨.’라고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이 바깥에서 테이블을 치우던 성호가 중간에 접시를 놓쳤는지 딱딱한 유리재질이 바닥에 부딪치며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타이밍에 들려온 소리를 당장의 도피처로 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수영의 곁을 스쳐 지난 윤재가 주방을 나섰다.

“무슨 일이야?”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바닥에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을 한 곳에 모으던 성호가 뒤에서 들려온 윤재의 질문을 받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죄송해요. 옮기다가 떨어뜨렸어요.’라고 대답했다.

“손에 피 나잖아. 다친 거야?”

“아, 살짝 베었나 봐요. 괜찮아요. 두세요, 제가 금방 치울게요. 아...”

그 사이 연이어 안으로 들어선 두 손님 일행을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쳐다본 성호가 문득 가까워져 오는 묵직한 구두굽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주방을 빠져나온 수영이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성호의 옆에 긴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부서진 잔해로 손을 뻗었다.

“바닥은 내가 치울 테니까 가서 손님들 주문 받아.”

소매까지 걷고 제대로 일을 도우러 나선 수영의 모습을 보고 반색한 성호가 ‘네!’라는 경쾌한 대답을 남기고서 이제 막 새롭게 테이블을 채운 손님의 곁으로 향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덜컥 수영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떠난 성호의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쫓던 윤재가 그 사이 긴 몸을 구부린 채 깨진 잔해를 모으고 있는 수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큼직한 조각부터 먼저 한 쪽에 모아둔 뒤 근처 테이블 위의 티슈를 뽑아 나머지 작은 파편도 쓸어 모은 수영은 이어 접시와 함께 낙하해 바닥 여기저기로 흩어져 있는 음식물 잔해도 따로 치우기 시작했다.

제대로 성의를 담아 일하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윤재는 잠시 후 한참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단골손님 일행을 확인하고 무거운 걸음을 떼어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슬슬 손님의 수가 줄어들 시간이 되었다는 윤재의 말과 달리 갑자기 한꺼번에 들어 닥친 다수의 손님들로 인해 거의 빈자리 없이 채워진 홀은 각자의 대화소리와 여기저기서 주문하는 목소리가 합쳐져 꽤나 시끌벅적하게 변해있었다. 성호의 말에 의하면 바로 앞 가게가 공격적인 마케팅을 중단한 뒤로 손님의 수가 부쩍 늘은 듯 했는데 그를 뒷받침하는 증언이 몇몇 손님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꼬머꼬>와 관련되어 나온 그들의 말은 일단 행사 때문에 가봤지만 뭘 주문해도 맛이 꽝이라는 평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싸게 행사를 한다고 해도 처음 가는 손님이면 몰라도 한번 그곳의 안주를 맛 본 손님은 절대 두 번은 안 갈 거라는 혹독한 비평까지 나오고 있었다.

한참 동안 시끌벅적하던 가게는 자정을 기점으로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주방과 홀을 오가며 서빙과 테이블을 정리하는 일을 도운 수영은 어느 정도 손님의 수가 줄어든 것을 확인하고 허리에 매어져 있던 앞치마를 풀었다.

사실 퇴근 후 오늘 회식을 패스하고 곧바로 귀가해 아까 전 사무실에서 문제가 발견됐던 파일을 다시 검토할 예정을 가지고 있었던 수영은 2차 회식 장소가 <민들레>라는 말을 듣고 처음의 계획을 변경해 이곳에 와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생각지 못했던 일에 적지 않은 시간까지 사용한 그는 이제 윤재와 성호 두 사람만으로도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을 확인하고 슬슬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앞으로의 개인적인 일정도 있지만 무엇보다 괜히 도와줬다는 생색을 낼 마음이 없는 그는 영업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남은 시간이나마 윤재가 마음 편히 일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갈게.”

“.......”

“수고해.”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재킷을 팔에 걸치며 먼저 말을 건넨 수영이 설거지를 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온 윤재와 그 사이 홀에서 치운 그릇을 들고 주방 안으로 들어선 성호로부터 연이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가게를 나섰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많은 차들로 채워져 있던 가게 앞은 한산하게 변해 있었다.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고개를 든 흡연 욕구를 물리치고 운전석에 오른 수영은 자정이 훌쩍 넘어서 있는 시간을 확인한 뒤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문제가 발생한 파일을 남은 시간 내에 전부 수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해결을 해놓고서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잠을 청하고 싶은 것이 지금 그의 바람이었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채 점차 멀어져가는 <민들레>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던 수영은 가게 안에서 느꼈던 어딘가 모를 싸한 느낌을 뒤늦게 찬찬히 떠올렸다.

오늘 수영이 만난 윤재는 좀처럼 시선을 맞춰오지도 않았고 말수도 무척이나 적었다. 자신의 시선이 진지하게 변할 때면 곧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표정으로 되돌아갔지만 확실히 오늘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단정할 수 없지만 당장 보기엔 마치 뇌와 몸이 따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평소에도 윤재가 말을 많이 하거나 적극적으로 상대의 시선을 마주하는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그와 같은 면모가 두드러졌었다.

주방을 나서기 전 언제나처럼 ‘또 올게.’라는 말을 건네자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짓던 윤재의 모습을 떠올린 수영은 아마도 예민해진 자신의 기분의 탓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빈 도로 위를 달리는 차의 속도를 한층 높였다.

그러나 그 날 그렇게 수영이 단순한 기분 탓으로 정리했던 결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바뀌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아무래도 전에 있었던 일이 신경 쓰여 일부러 바쁜 시간을 쪼개 <민들레>를 찾은 그는 자신을 상대로 여전히 경직된 태도를 보이는 윤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분명 그에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마음으로부터 확신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상대로 예전과 비교해 눈에 띠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던 윤재를 생각하면 짧은 사이 급격히 경직된 그의 분위기는 결코 기분 탓이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회사에 있을 때도 집에 있을 때도 수영의 머릿속에선 윤재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몇 번을 물어도 돌아오는 건 그저 ‘아무 일도 없어요.’, ‘괜찮아요.’라는 대답뿐이어서 윤재를 중심으로 한 생각은 점차 좋지 않은 방향으로 향해갔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엔 최대한 일에만 매진하고 싶었지만 잠시나마 틈이 나면 또다시 윤재의 굳은 표정을 떠올리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며 수영은 몇 번이나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런 기분 상태로는 귀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수영은 오늘도 야근을 마치자마자 자택이 아닌 <민들레>로 행선지를 정했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했던 탓에 피크 시간을 훌쩍 넘겨 가게에 도착한 그는 한산해질 즈음 자신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 준 뒤 곧바로 등을 돌리려는 윤재를 불러 제자리에 멈추게 했다. 손님의 수가 적어진 만큼 일을 핑계로 도망갈 수 없게 된 윤재는 잠시 앉으라는 수영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낼 수 있어?”

못 내겠다고 하면 한밤중에라도 찾아갈 결심을 하고 있는 수영이 일단은 점잖은 태도로 물었다.

갑작스런 수영의 질문을 받고서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윤재가 잠시간의 침묵 뒤 대답했다.

“네.”

뜻밖에 흔쾌히 떨어진 승낙을 받고 오히려 조금 놀란 기분이 된 수영은 ‘몇 시쯤 만날까요?’라는 윤재의 질문을 받고서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예상과 달리 너무도 순순히 진행되는 상황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그는 그러나 그와 같은 당장의 감정을 일단 접어둔 채 만나기 좋은 시간대를 정해 대답했다.

“그럼 그 날 봐.”

“...네.”

“안녕히 가세요. 우대리님.”

“수고해. 성호도.”

간단히 만날 시간만을 정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은 나란히 선 윤재와 성호에게 인사를 남긴 뒤 가게를 빠져나왔다.

막상 원하는 대답을 듣고도 개운치 못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현 상황은 좋지 않은 예감을 부르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입구에 서있는 윤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짧게 시야에 담고서 몸을 돌린 수영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재킷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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