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지금까지 수영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당연하게도 비단 윤재 한 사람 뿐만은 아니었다.
그간 수영이 관계를 가져온 수많은 상대들 가운데에는 가차 없는 그의 태도에 상처를 받아 오열에 가까울 정도로 목 놓아 운 이들도 많았고, 그들 중 일부는 조금이나마 수영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혹은 관심을 끌겠다는 목적으로 일부러 어설픈 눈물 연기를 펼쳐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눈물이던 혹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든 수영에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었다. 애초에 상대의 눈물을 보고 곧바로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면 그런 가차 없는 방식의 이별 통보를 규칙처럼 반복하지도 않았을 그였다.
상대의 마음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보기 흉하게 우는 것도, 상처받는 것도 자신이 아니었다. 형식적인 말로 위로를 건네고 헤어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었다. 어차피 다시 얼굴 볼 일도 없을 테니 상대가 그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던 아니면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던 그 이후의 일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쭉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해왔고, 이후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오는 동안에도 그와 같은 생각엔 일말의 변함도 없었다. 그것은 긴 세월에 걸쳐 완고하게 지켜온 성(城)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수영은 소리 죽여 우는 윤재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지금, 절대 영원할 것 같던 그 단단하던 성이 허무하리만큼 손쉽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허망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듯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명한 변화들을 일말의 저항이나 거부 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동안 최종 승인을 내리지 않았던 것 일뿐 사실 이미 답은 나와 있던 거였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듯 <민들레>를 찾을 때마다 자연스레 윤재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던 때에 이미.
“나와 있으면 초라해지는 것 같다고 했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윤재의 등을 스치듯 쓸어내린 수영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이건 적당히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넌 내가 봐온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깨끗하고 빛나는 사람이야. 정말로 초라하고 더러운 인간들이라면 그동안 지겹게 봐온 내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돼. 설령... 남들 보기에 내가 너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래봐야 현실은 일방적으로 너한테 매달리고 있는 남자일 뿐이야. 혹시라도 누군가 너한테 쓸데없는 소릴 지껄이면 그대로 말해. 우수영이라는 남자가 도무지 껌처럼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고. 그럼 나도 바로 그렇다고 솔직하게 맞장구쳐줄 테니까.”
잠시 동안 윤재의 등을 안고 있던 팔을 풀어내고서 그의 양손을 모아 붙잡은 수영이 천천히 긴 몸을 낮춰 서늘한 거실 바닥에 무릎을 댔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역전되자 조금 놀란 표정이 된 윤재의 얼굴을 그는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윤재의 뺨에 남아 있는 눈물자국이 눈과 가슴에 아프게 박혀 왔다.
어스름한 거실, 무릎을 꿇은 남자와 가만히 선 채로 그를 내려다보는 두 남자가 양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은 기묘함을 넘어서 경건한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떻게 보면 사제의 앞에 조아린 신도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다르게 보면 왕비의 앞에 엄숙히 무릎을 꿇은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영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현실로 인식한 윤재가 곧바로 맞잡고 있는 손에 힘을 실었다. 당황한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지금 윤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건 평소라면 설령 술에 취하더라도 절대 이런 행동을 할 남자가 아니었다. 늘 거만한 얼굴과 무심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해왔던,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저항도 잊은 상대에게 무참하리만큼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했던 남자와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지금 윤재와 마주한 수영은 눈빛만으로 수많은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단 둘뿐이라고 해도 이런 뜻밖의 상황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윤재가 억지로나마 수영을 일으키려했지만 당연하게도 밑에서 버티고 있는 수영 쪽의 힘이 월등히 강했다.
“여기가 아니라 사람 많은 명동 거리 한 가운데에서도 지금과 똑같이 할 수 있어, 난. 네가 상대라면 창피할 것도, 숨길 것도 없어.”
“.......”
“날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건 세상에 너 하나밖에 없어. 그러니까 행여라도 네가 무엇 하나 부족한 인간이라는 생각 같은 거 하지 마. 네가 잠시라도 그런 기분을 느낀다고 생각하면 난, 널 그렇게 만든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흡사 고해와도 같은 말을 들은 윤재는 그제야 어째서 수영이 기어이 이런 행동에까지 나선 것인지 이해했다. 더불어 지금 그가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나 때문인 거 알아. 네가 겪지 않아도 될 지저분한 일을 몇 번이나 겪은 게 다 날 만났기 때문이라는 거. 널 힘들게 한 주제에 이렇게 다시 널 잡는 게 내 욕심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속마음을 전하고 있는 수영의 목소리는 평소의 냉정함을 잃은 채 감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동안 널 아프게 한 거 앞으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다 지워낼 수 없겠지만, 그 만큼 앞으로 내가 더 노력할게. 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뭐든 할 테니까 그냥 지금은... 이대로 널 포기하라는 말만 하지 마.”
그렇게 하겠다고도,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윤재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올려다보던 수영이 천천히 긴 다리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다시 평소의 입장으로 돌아와 윤재를 내려다보게 된 그는 자연스레 새어나오는 한숨을 삼키고서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대로 더 기다려 봐도 끝내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적어도 당장에 고집스런 거절의 말은 돌아오지 않았으니 굳이 좋게 해석하면 한 번의 기회는 얻은 셈이었다.
어쩌면 단순히 지금의 윤재에겐 이 이상 뭔가를 깊이 생각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실제로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듯 피로해 보이는 윤재의 얼굴은 그의 정신과 육체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더 이상 그 두 사람이 널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야. 내 이름 걸고 분명히 처리해둘 테니까 거기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떤 방법을 취하려는 거냐고 윤재의 시선이 묻고 있었지만 수영은 거기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하나 그 이상으로 끔찍한 보복이 두 사람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윤재의 성격상 기뻐하기보다 적지 않은 마음의 부담을 안게 될 거라는 걸 수영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은혜는 잊더라도 보복은 철저하게 하는 주의의 수영으로선 이 정도의 조치도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이 이상 윤재에게 말 못할 비밀을 늘리고 싶지는 않다는 판단 하에 그는 앞으로의 상황을 관리하는 것 이외에 추가적인 보복 조치는 취하지 않는 것으로 내심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윤재가 나중 일에 대한 걱정을 덜어낼 수 있도록 일부러 두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를 짧게나마 전달한 수영이 잠시 텀을 두고서 말을 이었다.
“아까 전에 내가 한 말, 진지하게 생각해줘. 지금 바로 대답해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한참을 망설이다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해온 윤재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수영이 이 이상 지친 상대를 붙잡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조심스레 움직이려는 윤재를 순순히 욕실로 보내주었다.
이후 짧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윤재는 이부자리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 당연하게도 잠들기 전의 그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수영에게 이만 돌아가 달라는 말을 건넸지만, 수영이 고집스레 그 말을 듣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사이 결국 윤재는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늘 습관처럼 수영을 상대로 내보이던 경계심마저 잃어버릴 만큼 그는 쭉 지쳐있었던 거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좋을 텐데.’
가만히 서서 잠든 윤재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수영이 몇 시간 전 에서 목격했던 장면을 아픈 마음으로 떠올렸다.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놀 듯 키득거리며 올라탄 해준의 아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윤재의 겁에 질린 얼굴이 지금도 수영의 머릿속 안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단 몇 분만 더 늦었다면-이라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빠르게 뛰었다. 그것은 분노보다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작은 창문에서 들어오고 있는 어스름한 빛에 비친 윤재의 부어터진 얼굴이 수영의 눈에 아프게 박혀 왔다. 이제 상황은 대략적으로 정리되어 가고 있었지만 오늘 보았던 그의 상처 입은 모습들은 마치 각인처럼 평생 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터였다.
혹시라도 스치면 통증을 느끼게 될까 싶어 손을 뻗지 않은 채로 그저 조용히 윤재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하던 수영이 문득 침묵을 깨고 들려온 희미한 선율을 캐치하고 자연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얇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은 조금 전 그가 거실 소파에 벗어둔 수트 재킷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핸드폰 벨소리였다.
윤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은 수영이 곧바로 재킷을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싸늘한 밤바람이 흐트러뜨린 머리카락을 정리할 생각도 없이 곧바로 통화버튼을 누른 그는 이내 들려온 여진의 목소리를 듣고 짧게 대꾸해주었다.
[거의 다 끝난 상황이야.]
보고하는 여진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짧게 들려온 목소리만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상 아마도 여진이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은 듯 하다고 나름대로 짐작한 수영은 지금 막 불을 붙인 담배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간신히 여유를 찾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지금에야 그는 지나간 몇 시간 동안 자신이 본능적인 흡연 욕구마저 깨끗이 잊을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일들에 몰두해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잘 찍었어?”
[네. 분부하신대로 잘 찍었습니다. 도련님.]
“농담할 기분 아니야.”
[알았어. 네가 주문한대로 얼굴 잘 나오게 찍어놨으니까 입막음용 자료로는 확실할 거야. 처음엔 자길 건드리면 후회할 거라면서 고래고래 악을 쓰더니 중반부턴 그만하라고 질질 짜면서 애원을 하더라. 그 옆에 있던 자식은 너한테 너무 심하게 맞아서 거의 비몽사몽인 상태였고. 결국 중간에는 토하기까지 해서 어찌나 짜증나던지.]
전해들은 상황을 근거로 짧게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던 수영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해온 과정에서 어느 정도 상대의 성격적 기질을 파악하는 눈을 갖게 된 수영은 각각의 인간에 따라 달리 상대하는 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호연은 싫으나 좋으나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자로, 일찍이 강하게 밟아두지 않으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한 뒤 언제든 기회를 엿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는 높은 위험군의 인간이었다.
“중간에 봐주거나 한 건 아니지?”
[봐주긴, 오히려 서로 한 번씩 더 박겠다고 난리 치는 걸 중간에서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여진의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수영은 이후 간략하게 몇 마디 대화를 더 주고받은 뒤 짧은 통화를 마쳤다. 곧바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은 그는 통화를 하는 사이 담배 끝에 제법 길게 불어나있는 재를 툭툭 난간 너머로 털어냈다.
미약한 불을 품은 재가 새까만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잠시 가만히 쳐다본 수영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몸을 돌려 베란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섰다가 바로 앞에 보이는 장면을 가만히 시야에 담았다.
짝을 맞춘 양말과 수건, 티셔츠와 바지.
빨래걸이에 걸려 있는 옷가지들이 중간 중간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있었다. 주인의 성격을 반영하듯 빳빳하게 잘 펴진 채로 걸려있는 옷가지들 가운데에 자리 잡은 엷은 민트색의 티셔츠는 이전에 <민들레>에 들렀을 때의 수영이 두어 번 본 기억이 있는 것이었다.
생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삭막한 분위기가 도는 자신의 아파트와 달리 깔끔한 성품을 지닌 주인의 손길을 받아 잘 정리된 좁은 집안은 어딜 보더라도 소박하고 따스한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보통 신경 쓰지 않으면 곧잘 시들 법한 화분은 한참 전에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싱싱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베란다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몇 가지 청소도구도 일부러 신경을 써서 정리한 듯 어느 것 하나 엉키는 것 없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집안을 채우고 있는 잘 관리된 물건들은 평소 윤재가 얼마나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는 스치는 시선 안에도 두지 않았던 사소한 장면들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야에 들이고 있는 수영이 다시 새로운 담배를 꺼내 그 끝에 불을 붙였다. 이내 익숙한 맛과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피로한 눈을 감았다가 뜬 그는 여전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들을 어느 선에서 적당히 정리하고서 셔츠 소매를 걷었다.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예리한 은빛의 시곗바늘이 어느새 자정이 넘어간 시각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문득 멀찍이서 들려온 엉망인 노랫소리를 듣고 베란다 아래로 시선을 던진 수영이 이제 막 가로등 앞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취객을 발견하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후미진 동네라 차들이 오가는 횟수는 극히 적었지만, 그를 대신하듯 거슬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며 행인의 떠드는 소리가 벌써 몇 번째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제대로 된 통제로 인해 다소 삭막한 느낌마저 드는 수영의 동네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소음들이었다.
평소 혼자서 이 집을 지켜온 윤재는 이런 소음들에 익숙해져있을까-라는 생각을 짧게 하던 수영이 당장 얇은 벽 너머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윤재의 얼굴을 떠올리고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윤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과 또 그에 지쳐하고 있다는 것도. 그런 윤재의 마음을 알면서도 끝내 그를 놓아주는 선택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이기심에 수영은 스스로도 질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윤재가 자신을 향한 시선에 진심어린 경멸이나 혐오의 감정을 담았다면 어쩌면 생각의 방향을 조금은 바꾸었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그가 순수하게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러나 때때로 윤재가 보여 온 미묘한 표정과 시선은 수영으로 하여금 그의 마음 안에 남아 있는 미련, 혹은 희망의 한줄기 빛을 마지막까지도 완전히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자신을 피하는 것이 정말로 자신을 원망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정말로 자신을 순수하게 싫어해서가 아니라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싶은 수영이었다. 자신만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식의 오만한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간절히 윤재를 잃고 싶지 않다는 순수한 바람이 본능처럼 그를 이끌고 있었다.
이런 제멋대로에 이기적인 남자의 손에 사로잡힌 윤재가 가엾다고 수영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몇 번을 반복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 외에 다른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윤재의 존재를 잃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단순히 아쉬움이나 슬픔을 느끼는 정도의 감정으로는 끝낼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담배 끝에 붙어 있는 재를 툭툭 두드려 베란다 아래로 떨어낸 수영이 난간에 기대어 있던 몸을 돌려 좀 전부터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는 소리를 따라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몇 분 전 택시에서 내린 뒤 얼마간 정체불명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던 중년의 남자가 근처 전봇대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열심히 속안의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 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에 힘을 실으려다 갑자기 덮쳐온 통증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모처럼만에 숙면을 취했던 덕분에 눈을 뜨고도 잠시 멍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그는 온몸 곳곳에서 동시에 느껴지고 있는 통증을 통해 어제 하루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일들을 기억해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제 막 오전 열 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실신하듯 잠이 든 상태였음에도 의지와 별개로 움직이는 몸은 정해진 생체리듬에 충실히 따르는 것인지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평소와 거의 비슷했다.
‘내가 잠든 뒤에 돌아간 건가...’
늘 봐온 눈에 익은 방안의 풍경을 시야에 담은 채로 자연스레 어젯밤 마지막으로 보았던 수영의 존재를 머릿속에 떠올린 윤재가 문득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온 작은 소음을 듣고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했다. 문이 닫혀 있어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묘한 위화감이 윤재의 머릿속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늘 혼자인 게 당연한 집안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였지만 이후 다시 들려오는 소리나 기척은 없었다.
역시 어제 하루 그런 큰일을 겪은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서 가볍게 한숨을 내쉰 윤재는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평소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시간에 눈을 떴기 때문인지 간헐적으로 미약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는 몸의 상태만 제외하면 그저 평범한 하루의 시작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일단 가장 먼저 세수를 하기 위해 닫혀있던 문을 열고 방을 나선 윤재가 좁은 거실을 절반쯤 지났을 때 문득 느껴진 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일어났어?”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한 윤재의 얼굴 위로 선명한 당혹감이 떠올랐다. 상황을 인식하고서 처음의 놀란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어서 자연스레 그의 얼굴 위로 어째서-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 윤재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건 방금 전까지 좁은 부엌 식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수영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진지하게 인식하고서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본 윤재가 역시나 좀 전 자신이 시간을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오늘 출근은...”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오늘은 주말도 공휴일도 아닌 평일이었다. 그런 날 오전 열 한 시 십 여분을 막 지나고 있는 시점에서 수영이 회사가 아닌 이곳에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오늘 하루 병가를 냈어.”
짧게 대답한 수영이 식탁 위에 펼쳐져 있는 책을 덮었다. 이어서 마주한 윤재의 얼굴을 살피는 과정에서 미간을 좁힌 그가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은 건 많이 가라앉은 것 같은데 멍은 남아 있어.”
수영의 말을 듣고서 간신히 현실로 돌아온 윤재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약간의 힘이 가해진 것만으로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그는 걱정이 담긴 수영의 시선을 마주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오늘 새벽에 여기서 잔 건가요?”
“응. 소파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그냥 그대로 잠들어버렸어.”
수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윤재가 잠이 든 이후 애초에 곧바로 이곳을 떠날 생각도 없었던 그는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로 인해 결국 눈을 거의 붙이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출근 여부를 놓고 저울질하던 끝에 오늘 하루 회사를 쉬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뒤에야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수영은 밤을 샌 후유증으로 인해 지금 현재 약간의 두통 증세를 느끼고 있었다.
최근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은 뒤로 줄곧 바쁜 나날을 보내온 터라 단 하루라고 해도 일을 손에서 놓는 것에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중요한 일을 뒤로 미뤄두게 만들 만큼 수영은 윤재의 일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특별히 회사를 쉬고 하루를 이곳에서 보낸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질 거라는 계산 하에 내려진 결정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바로 어제 그런 심각한 일을 당한 윤재가 혼자서 이 집을 지키는 동안 틀림없이 온종일 그 일을 떠올리게 될 것을 예측하고서 조금이나마 그와 같은 상황을 막아보겠다는 생각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나쁜 기억은 최대한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내는 편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은 현명한 방법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물론 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가게 열 거야?”
질문을 받은 윤재가 잠시 망설이던 끝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와 같은 대답을 미리 예상했다는 듯 수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단 거울 한 번 보고 와. 아무래도 내가 볼 땐 지금 그 얼굴로 밖에 나가면 사람들 눈에 많이 띨 것 같은데...”
걱정이 담긴 수영의 말을 듣고 곧바로 몸을 돌려 욕실로 향한 윤재가 잠시 후 잘 닦여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눈 밑쪽에 생긴 퍼런 멍이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터진 입술에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도 보기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보다 뺨에 남아 있는 찢어진 상처와 뺨 위쪽에 넓게 퍼져있는 검푸른 멍은 결코 사람들 앞에 내보일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도저히 어딘가에 부딪쳤다는 흔한 변명으로는 덮을 수가 없었다.
를 빠져나온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윤재는 잠시 동안 멍하니 그대로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반쯤 열려 있는 문에 형식적인 노크를 남기고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수영이 그를 돌아보는 윤재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 멍이 엷어질 때까지 가게는 쉬는 편이 낫지 않겠어?”
가능하면 일을 하고 싶지만 지금의 얼굴 상태로는 아무래도 손님들 앞에 서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을 내린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서 ‘오늘은 그래야겠네요.’라고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급하게 전화를 받고 나오느라 가게를 통째로 성호에게 맡겨놓은 것이 줄곧 마음에 걸렸던 터라 오늘은 조금 일찍 가게에 나가 청소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던 그는 다시 거울에 비친 얼굴을 재차 확인한 뒤 그쯤에서 억지로나마 남은 미련을 정리했다. 일단 성호에겐 오늘 쉰다고 점심시간을 넘기기 전에 연락을 해줘야 할 듯 했다.
다시 혼자가 되어 간단히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욕실을 나선 윤재가 그 사이 거실에 서서 재킷을 걸치고 있는 수영을 발견하고 시선을 던졌다. 넥타이만 풀어냈을 뿐 어제 봤던 그대로의 단정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는 수영은 홀로 이런 협소한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가려고요?”
젖은 수건을 손에 든 채로 윤재가 묻자 수영이 곧바로 대답했다.
“회사에 보내줘야 할 자료가 있어서 잠깐 집에 갔다가 올게. 간 김에 아예 옷도 편한 걸로 좀 갈아입고. 아마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거야. 참, 점심 먹을 시간 다 됐는데 올 때 뭘 좀 사올까?”
다시 돌아올 거라는 자신의 말을 듣고서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된 윤재를 잠시 그대로 바라보던 수영이 스치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곤란하다는 표정 짓지 마.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내일부터는 또 자주 못 만나게 될 거야. 안 그래도 최근 들어 회사 일이 많거든.”
“이런 바쁜 시기에... 갑자기 병가를 내도 괜찮은 거예요? 혹시... 정말로 어디 아픈 건가요? 어제 거기에 남아 있다가 다치기라도 한 건...”
일단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서 아까 전 병가를 냈다는 수영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넘겼던 윤재는 뒤늦게 정말로 수영이 병가를 낼 만큼 크게 다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줄곧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던 윤재의 얼굴 위로 지금 막 스치듯 떠오른 우려의 감정을 읽어낸 수영이 마음속으로만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손을 좀 다친 것뿐이야.”
그렇게 말한 수영이 윤재의 앞에 손을 펼쳐보였다.
“.......”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살피던 윤재가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주먹을 쥐면 뼈가 튀어나오는 부분에 잔 상처가 몇 군데 남아 있었지만 당장 보기에 큰 상처로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병가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상처는 절대로 아니었다.
다시 거두어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수영의 손에서 윤재는 곧바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잔 상처들이 남아 있지만 새삼 정말 예쁜 손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평범한 자신의 손이나, 남자답게 뼈마디가 불룩 튀어나온 성호와 준석의 손과 달리 수영의 손, 특히 손가락은 말 그대로 순정 만화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길고 고운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겉보기엔 마냥 아름답기만 한 저 손이 어젯밤엔 무지막지한 흉기로 변했었지만.
“어제의 일 때문에 마음에 걸려서 신경 써 주시는 거라면 전 괜찮아요. 혼자 있을 수 있어요.”
“.......”
“이제 그 두 사람이 더 이상 절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것만 지켜진다면 더 이상 바라는 건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애써 태연한 태도를 취하려 노력하고 있는 윤재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그렇게나 애처롭게 울던 윤재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로서는 지금 들려온 윤재의 괜찮다는 말을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일부러 신경 써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조금이라도 더 너랑 같이 있고 싶은 것뿐이야.”
빙빙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속마음을 전한 수영은 설마 이처럼 직설적인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를 향해 엷은 미소를 내비쳤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까 혼자서 먼저 밥 먹지 마. 알았지?”
“.......”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로 갈등하고 있는 듯한 윤재를 잠시 관찰하듯 지켜보다 문득 회사에 보내야 하는 파일의 존재를 머릿속에 떠올린 수영이 그쯤에서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고 홀로 집안에 남겨진 윤재는 한동안 물끄러미 현관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다고 윤재는 생각했다. 자신을 향해 조심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말투며 표정이. 어제의 일을 기점으로 마음 안에서 단단한 결심을 내린 듯한 수영을 마주하는 건 윤재에게 있어 조금은 낯선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동안 널 아프게 한 거 앞으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다 지워낼 수 없겠지만, 그 만큼 앞으로 내가 더 노력할게. 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뭐든 할 테니까 그냥 지금은... 이대로 널 포기하라는 말만 하지 마.’
어젯밤에 들었던 수영의 말을 윤재는 다시 한 번 찬찬히 머릿속에 떠올렸다.
간절한 말들만큼이나 윤재를 놀라게 한 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했던 수영의 행동이었다. 그것은 비단 윤재 뿐 아니라 수영을 아는 자라면 결코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필사적인 수영의 모습을 이전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윤재는 분명한 형태로 굳어져가던 마음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답은 이미 나왔는데 어째서...’
가슴이 묵직하게 조여드는 느낌에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문 윤재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굳게 닫힌 낡은 현관문에 시선을 던졌다. 한 시간 여 뒤 다시 이 문이 열리고 수영이 이 집으로 돌아올 모습을 상상하자 일순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든 그는 무심코 축축이 젖은 수건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