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너 요즘에 얼굴 보기 힘들다. 일이 그렇게 많은 거야, 아니면 내가 보기 싫은 거야?”
“둘 다죠, 뭐.”
“하여간 솔직하기는, 자식.”
나란히 비어있는 잔에 차례로 술을 따른 준석이 다소 긴장이 풀려 있는 얼굴 위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와 마주한 자리에 앉아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남자는 준석보다 두 살이 많은 대학 선배로, 이름은 지창준이라고 했다.
한동안 각자 일이 바빠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했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꾸준히 얼마간에 한 번씩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의 친분을 쌓고 있는 두 사람은 나란히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직장 내의 고민이 있으면 종종 술자리를 가지며 서로에게 털어놓곤 했었다.
“지금 여자 친구 없지?”
만날 때마다 한 차례씩 받는 질문에 ‘그렇죠. 뭐.’라고 담담하게 대답한 준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잠시 웃던 창준이 문득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 근처까지 왔어? 응. 여기 이름 <달맞이꽃> 맞아. 그 편의점 안쪽으로 돌아서 쭉 들어오다 보면 분홍색 간판 보일 거야. 바로 안으로 들어오면 돼. 응, 그래. 와.”
짧게 통화를 마친 창준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준석과 시선을 마주하고 순간적으로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눈앞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무엇보다 지금 들려온 통화의 내용을 그대로 넘길 수 없는 준석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서 물었다.
“지금 여기로 누가 오기로 한 거예요?”
질문을 받고 슬쩍 입구 쪽에 시선을 던진 창준이 곧바로 대답을 하는 대신 불룩 튀어나온 배를 벅벅 긁었다. 원래도 살이 찐 체형이었지만 최근 못 본 사이에 못해도 10kg 이상은 불어난 듯 보이는 그의 외형은 이제 과장을 넘어서 부장으로 보일 만큼의 중후한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선배.”
모처럼 둘만의 만남이라 긴장을 풀고 있던 준석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창준을 불렀다.
계속 준석의 질문을 무시할 수도 없어 잠시 입구에 두고 있던 시선을 다시 준석에게로 옮긴 창준이 결국 그쯤에서 비밀을 해제하기로 하고 늘어난 살로 덮인 턱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전에 천호 결혼식장에 같이 갔을 때, 네가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던 여자 있었지?”
질문을 받고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린 준석이 이내 한 여자를 기억해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준석이 쳐다보자 묘한 미소를 머금은 창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그 아가씨야. 네가 웬일로 관심을 보이기에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아서 여기로 오라고 했지. 내가 아는 후배야. 이름은 서윤하, 지금 디자인 관련 회사에 다니고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표정을 굳힌 준석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돈독한 친분을 쌓고 지내온 창준이 그간 자신의 생각을 해줘서 여러 번 소개팅을 주선하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물론 지금의 이런 깜짝 소개팅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와 같은 호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어쨌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한 순간이라고는 하나 그때 결혼식장에서 자신이 창준에게 그 낯선 여자의 존재에 대해 물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만큼 평소 오지랖이 넓은 창준이 발 벗고 나설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 자신이라면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야 분명히 말하자면 준석이 그 날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낯선 아가씨의 존재를 창준에게 물었던 건 그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윤재와 닮았다는 단 하나의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그 날 하루로 깨끗이 사라지는 게 당연한 정도의 미미한 관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증거로 준석은 조금 전 창준이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옆 자리에 벗어두었던 수트 재킷을 들어 걸치며 준석이 말하자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창준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소리야? 지금 거의 다 왔다는데.”
“일부러 신경써주신 건 알겠는데 이런 건 미리 말씀해주세요. 전 지금 누굴 만나서 연애할 생각이 없어요.”
“네가 관심이 가는 상대라고 하니까 일부러 부른 거라고.”
“특별히 관심이 있다거나 소개해달라는 등으로 직접적인 얘기 한 적 없잖아요. 그때 누구냐고 물었던 건 그냥 단순히 제가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거기까지 말하던 준석이 문득 가게의 입구로 들어서는 한 여자의 모습을 시야에 들이고 말을 멈췄다. 그런 준석의 반응을 보고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창준은 곧바로 번쩍 손을 치켜들고 ‘이쪽이야’라고 짧게 소리쳤다.
잠시 후 가까이로 다가온 서윤하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먼저 창준과 짧게 인사를 교환한 뒤 천천히 몸을 돌려 준석을 쳐다보았다. 일부러 신경 써서 단장한 듯한 얼굴 위로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얼굴만큼이나 사근사근한 느낌이 나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최악의 타이밍으로 달아날 기회를 잃어버린 준석은 열심히 가운데에서 좋은 분위기로 이끌어가려고 노력중인 창준을 향해 슬쩍 매서운 눈짓을 보낸 뒤 어쩔 수 없이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다시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익숙한 골목길로 들어선 준석이 재킷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뒤 다시 한 번 가장 최근 기록에 남아 있는 단축번호를 눌렀다.
‘집에 있기는 한 건가...’
통화연결음이 어느 정도 이어지는 것을 잠자코 기다리다 이번에도 받지 않는 모양이라며 종료버튼을 누르려던 준석이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부지런히 움직이던 발을 멈췄다.
[여보세요.]
“뭐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아... 진동으로 해놔서 소리가 잘 안 들렸어. 계속 거실에 있었거든.]
“거실? 뭐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그림 좀 그릴까 해서... 그보다 무슨 일이야?]
윤재의 입에서 나온 ‘그림’이라는 단어에 무심코 준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윤재의 그림을 좋아했다.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하는 윤재의 모습도.
한동안 일이 바빠 연필을 잡는 시늉도 내지 못 하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가 하는 생각이 든 준석은 곧바로 전화를 건 용건을 떠올리고 말을 이었다.
“좀 전에 <민들레>에 갔었는데 문이 닫혔더라. 그래서 지금 너희 집에 가는 중이야.”
[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윤재의 목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을 읽어낸 준석이 잠시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이며 말했다.
“거의 다 왔어. 요 앞 슈퍼에서 술하고 안주 몇 개 사서 갈 거니까 기다려.”
[잠깐, 이렇게 갑자기 왜... 올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거기까지 말하다 자신이 전화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잠시 말을 멈춘 윤재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알았어. 와.]
“응. 좀 있다가 봐.”
여기까지 온 친구를 돌려보낼 만큼 매정하지 못한 윤재를 알고 있는 준석은 허락이 떨어진 뒤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서 핸드폰을 제자리에 되돌렸다. 연락을 받지 못한 건 윤재의 책임이라고 해도 이렇게 약속도 정하지 않은 채로 무작정 찾아가는 것 역시 그다지 옳은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일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가게를 쉬지 않는 윤재의 성실한 성격을 알고 있는 준석으로썬 오늘 <민들레>가 문을 닫은 것과 관련해 윤재에게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고,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걱정이 그를 이곳까지 이끌어온 것이었다. 다행히 들려온 전화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데다 한창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처음 우려와 달리 윤재에게 특별히 큰 문제가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로 인해 오히려 고작 그림을 그리겠다는 이유로 가게를 쉰 건가 하는 새로운 의문이 생겨나긴 했지만.
그나마 윤재가 마실 수 있는 도수 낮은 맥주 세 병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들고 슈퍼를 나선 준석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온 듯한 느낌이 드는 후미진 골목길을 슬쩍 둘러보았다. 오래 전 고등학교시절부터 교복 차림을 하고서 이 근처에 있는 윤재의 집을 드나들었던 기억이 있는 준석은 도시개발 사업에서 제외된 덕분에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익숙한 풍경을 잠시 말없이 눈동자에 담았다.
지금 준석이 서있는 자리도 예전에 교복차림을 한 윤재와 나란히 오고간 적이 있는 장소였다.
누군가를 사이에 두고 괴롭히고 있는 중학생들을 발견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던 윤재와 그런 그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덩달아 불량학생을 다그치는 역할을 맡았던 자신. 울먹이는 피해학생의 등을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말하던 윤재의 다정한 목소리를 준석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새하얀 하복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나 있었던 윤재의 하얀 팔과 함께.
그 후로 1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준석은 여전히 윤재의 곁에 있었다. 그것도 가능한 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이거면 충분한 게 아닐까...’
이미 수없이 떠올렸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반복한 준석은 그쯤에서 다시 옮기기 시작한 걸음의 속도를 차츰 올린 끝에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익숙한 윤재의 집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고 조금 뒤 가까워지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곧 현관문이 열렸다.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를 받아든 윤재가 재빨리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하는 것을 슬쩍 쳐다보고서 늘 그래왔듯 자연스레 거실로 향한 준석은 곧바로 시야에 포착된 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쩐 일로 제대로 그림을 그릴 마음이 들었는지 펼쳐진 스케치북은 테이블이 아닌 나무이젤에 받쳐져 있었다. 대부분의 날 동안 작은 방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젤이 당당히 거실에 나와 있는 것을 준석이 목격한 것은 실로 오래간 만의 일이었다.
아직 중반 정도밖에 채색되어 있지 않은 그림의 주인공은 새하얀 작은 집들이었다. 주변에 채색되어 있는 색으로 보아 사막이나 그 비슷한 자연환경이 품고 있는 장소 같은 느낌이었다. 새하얀 벽과 진흙색이 뒤섞인 네모난 건물들이 촘촘히 모여 있는 모습은 장난감 도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밤(Shibam)이라고, 예멘에 있는 도시를 떠올리면서 그려봤어. 전에 tv여행 프로그램에 나오는 걸 잠깐 봤었는데 꽤 인상에 남았거든.”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준석의 표정이 다음 순간 그대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비닐과 쟁반을 양손에 들고 나온 윤재의 얼굴은 준석으로써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무척이나 심각한 상태를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흉하게 남아 있는 시퍼런 멍 자국이었지만, 그 외에도 윤재의 작은 얼굴 곳곳에는 또 다른 멍과 잔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준석의 얼어붙은 시선을 알아채고서 일단 근처 테이블에 가져온 것들을 차례로 내려놓은 윤재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나가던 취객이랑 시비가 붙어서 몸싸움이 좀 있었어. 사실 몸싸움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좀 더 많이 얻어맞긴 했지만.”
“......”
“그래도 나도 가만히 맞고 있지만은 않았어. 혼자만 당한다고 생각하니까 열이 받더라고. 그래서 죽자 살자 달려들었지.”
혹여 자신만 일방적으로 맞았다고 하면 준석의 속이 더 상할 것을 알고 있는 윤재는 작게나마 허세를 부려보았다.
“...어떤 새끼야?”
수화기 너머의 성호와 똑같은 질문부터 던져오는 준석을 향해 스치듯 쓴웃음을 지어보인 윤재가 일단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부스럭부스럭 비닐 안에서 준석이 사온 술과 안주를 꺼내기 시작한 그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파출소 가기 전에 사과 받고 화해했어. 치료비도 받았고.”
“연락처는 받아놨지?”
금방이라도 연락처를 알아내 달려갈 기세인 준석을 잠시 쳐다보던 윤재가 대답했다.
“아니. 안 받았어. 그 자리에서 다 해결됐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너, 바보야? 이렇게 심하게 얻어맞고 고소도 안 하고 끝냈다고!?”
“그땐 이렇게 크게 흔적이 남을 줄 몰랐어. 아프긴 했지만 좀 지나면 금방 나을 줄 알았지.”
침착한 윤재의 태도에 한층 더 화가 치밀어 오른 준석이 계속해서 입 밖으로 새어나오려 하는 욕지거리를 애써 속으로 삼켰다. 마음 같아선 멍청하다 어쩌다 하며 한바탕 크게 쓴 소리를 쏟아내고 싶었지만, 가뜩이나 이런 꼴이 된 윤재를 이미 돌이킬 수도 없는 지난 일로 책망하는 건 역시 준석으로써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조금 전 윤재는 자신도 공격을 했다고 했지만 저런 비쩍 마른 몸으로 주먹을 휘둘러봐야 상대에게 얼마나 타격을 줬을지, 아니, 애초에 정말로 쌍방간의 몸싸움이긴 했던 것인지 이 세상 누구보다 김윤재라는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준석은 아무래도 조금 전 들었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야 어째서 윤재가 오늘 가게 문을 열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된 준석은 여전히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분노를 끌어안은 채 몇 번째인지 모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별로 아프지 않아. 일부러 누르면 아프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느낌도 없어. 사실 오늘도 당장 보기에 흉하지만 않았으면 가게 문을 열었을 텐데 지금 이 얼굴로 손님을 받으면 계속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게 될 것 같아서 그냥 하루 쉬기로 한 거야. 내일은 가게 문은 못 열더라도 지하철역 근처에 서서 전단지라도 돌리려고. 얼굴이 이러니까 인형탈 쓰고 해볼까 해. 전에 성호랑 인형탈 쓰고 가게 홍보를 하는 것도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마침 이 기회에 한 번 해보려고.”
정작 심한 꼴을 당한 피해자이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행여 자신의 속이 상할까 싶어 괜찮다는 말만 열심히 반복하고 있는 윤재의 모습이 안쓰럽다 못해 아프게 느껴진 준석은 이쯤에서 굳어 있는 표정을 풀고 윤재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기로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두고 다그쳐봐야 윤재의 마음에 생채기만 남길 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멍청이.”
갑자기 들려온 준석의 말에 조금 커다래진 눈을 한 윤재가 금세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뭘 또 바로 인정 하냐, 넌. 하여튼 순해 빠져갖고...”
“순하기는 누가. 나도 그간 사람들 상대로 장사해 와서 알고 보면 얼마나 억세고 거친데.”
“하이고... 세상에 억세고 거친 인간들 다 죽었냐. 간디어르신 뺨치는 평화주의자 김윤재가 억세게? 당장 너랑 풀 뜯어 먹는 토끼랑 싸워도 난 네가 이길 거라는 확신이 안 든다.”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윤재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은 준석이 곧바로 손을 뻗어 윤재의 턱을 쥐고서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눈은 안 맞은 거지?”
“응. 눈은 괜찮아. 광대뼈 위쪽하고 입 근처를 좀 맞았어. 눈을 다치거나 코뼈가 나갔으면 병원에 갔을 텐데 다행히 위험한 부분은 빗겨가서...”
“이런 꼴이 되 갖고 다행은 무슨.”
가까이서 보니 좀 더 심한 윤재의 얼굴 상태를 확인하고서 그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떼어낸 준석은 잠시 후 화제를 전환할 요량으로 윤재가 던져온 질문을 받고 입가에 드리우고 있던 미소를 거두었다.
“근데 어쩐 일로 가게에 다 들렀어? 요즘 야근 때문에 퇴근하면 바로 집에 들어갔었잖아.”
당연히 나올 법한 윤재의 질문에 준석은 애매한 미소를 머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오늘 뜻밖에 만남을 가졌던 윤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내내 준석은 처음 생각보다는 괜찮은 기분을 느꼈었다. 현재 디자인 관련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윤하는 제법 좋은 센스를 가진 여자로, 말주변도 좋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었었다. 굳이 매의 눈을 대입하더라도 딱히 흠잡을 곳은 없어 보였다.
다만 대화가 진행되면 진행되어갈수록 준석은 잠시나마 윤재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윤하가 사실은 윤재와 전혀 다른 별개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또 진지하게 깨닫게 되었다.
닮은 것은 얼핏 보았을 때의 눈매뿐이었다.
옆에 앉아 과일 껍질을 벗겨내고 있는 윤재의 손을 쳐다본 준석이 쓰게 웃었다.
아까 전 장소를 옮겨 커피숍에서 마주한 윤하의 손톱은 평소 잘 관리를 해온 듯 반들반들 예쁘게 다듬어져 있었다. 주방에서 일을 하느라 늘 바짝 깎여져 있는 윤재의 손톱과는 전혀 달랐다.
윤하는 최신 트렌드의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본다고 했다. tv를 보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하고, 어쩌다 tv를 보더라도 트렌드와는 관계가 먼 여행 프로그램이나 동물다큐 프로그램을 위주로 시청하는 윤재와는 그 역시 전혀 다른 취향이었다.
자신이 윤하와 마주하고 있던 시간 내내 순수하게 그녀를 알아가는 것이 아닌, 그녀의 안에서 끈질기게 윤재와 닮은 부분을 찾아내고 있었던 스스로의 모습을 깨달았을 때, 준석은 쓴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자신도 비참했지만, 그 이상으로 윤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윤하가 아무렇게나 대해도 상관없을 정도의 허영심에 찌든 그저 그런 여자였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 텐데, 이런 경우 불행하게도 그녀는 알아갈수록 정말로 괜찮은 여자였다.
“아까 전에 아는 선배 주선으로 소개팅 비슷한 걸 하고 왔어. 오랜만에 여자랑 만나서 얘기하고 헤어지니까 갑자기 네 생각이 나길래 <민들레>에 들러본 거야.”
어째서 윤하와 만난 이야기를 윤재에게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건 체념인지도 모른다고 준석은 생각했다.
“왜 갑자기 내 생각이 난 건데? 모처럼 즐거운 시간 보내고 나니까 성호랑 둘이서 가게보고 있을 내가 불쌍하게 느껴져서?”
웃으며 농담을 건네 오는 윤재의 모습이 준석의 눈에는 아프게 박혀오고 있었다.
윤재가 정색을 하며 싫은 반응을 보여 올 거라고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지만, 역시나 너무도 깔끔하기만 한 그의 태도는 준석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쓰라린 현실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나한테는 아까울 정도의 아가씨더라.”
“그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었어?”
“얘기 해보니까 나랑 맞는 구석이 좀 있었어. 얼굴도 꽤 취향이고...”
“그래? 잘 됐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싶지만 그래도 난 꼭 너만큼은 좋은 사람이랑 만나서 행복하기를 바랐거든. 지금도 그렇고.”
“왜... 꼭 ‘너만큼은’인데?”
기대 따위 버리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 준석은 잠시 텀을 두고 들려온 윤재의 ‘넌 세상에서 내가 제일 아끼는 친구니까.’라는 대답을 듣고 속으로 짧게 실소를 흘렸다.
아팠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웃는 윤재의 모습도, 그의 얼굴에 남아 있는 흉한 멍 자국도 지금 이 순간 준석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넌 어때?”
문득 자신에게 향해진 질문에 윤재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로 눈을 깜빡이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의 윤재가 종종 보이는 버릇이었다.
“누굴 진지하게 만나거나 할 생각 없어?”
한 마디가 덧붙여진 뒤에야 준석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한 윤재는 그러나 당장 그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고요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커다란 접시 위에 예쁘게 깎인 채로 놓여 있는 사과였다. 무심코 직업병이 나온 것인지 열 맞춰 놓여 있는 사과 조각은 모두가 귀여운 토끼모양을 하고 있었다.
묘하게 진지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윤재의 옆에서 가만히 컵을 입으로 나르던 준석이 잠시 후 문득 침묵을 깨고 들려온 윤재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준석아.”
늘 익숙하게 들어왔던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린 준석이 ‘왜?’라고 물었다.
“인연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평소라면 웃으며 대충이라도 대답을 해주었을 준석은 이상할 정도로 진지한 윤재의 태도에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되돌아온 질문을 받은 윤재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최근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나한테도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싶은 생각도 조금은 들고.”
“.......”
곧바로 뜻이 파악되지 않는 윤재의 말을 두고 얼마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준석이 앞에 놓인 맥주병으로 손을 뻗자 곧바로 가로채듯 그것을 손에 든 윤재가 비어있는 준석의 컵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준석과 달리 윤재의 컵은 처음 채워졌던 양에서 아주 약간만 줄어든 상태였다.
“인연은 만들어가는 거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흔해빠진 대사 한 마디를 툭 던진 준석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10년 전에 만나서 지겹게 얼굴 마주 보고 사는 것도 다 인연이지 뭐.’라고 덧붙이자 윤재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얼굴 가득 번진 언제나와 같은 해사한 미소로 인해 윤재의 얼굴 위에 남은 흉한 멍 자국들이 준석의 눈엔 한층 더 아프게 박혀왔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윤재가 말했다.
“지겨워도 계속 보자. 우리들 할아버지가 돼서 누군가 먼저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야, 그런 말 들으니까 벌써 쉰내가 나는 것 같잖아.”
“하하...”
활짝 웃는 윤재의 얼굴이 좋았다.
그의 말대로 나란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결코 충분한 정도까지에는 도달할 수 없겠지만 그걸로 어느 정도는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쭈글쭈글한 영감이 된 윤재와 함께 낚시도 하고 장기도 두면서 어쩌다 한 번 툭툭 던져지는 그의 썰렁한 농담에 장난스레 대꾸해주는 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은 작전상 후퇴일 뿐이었다. 언젠가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오면 자신은 결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
“그럼 그 아가씨와는 언제부터 사귀는 거야?”
토끼사과 등 부분에 포크를 찍으며 윤재가 묻자 준석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아가씨라고 했지, 사귄다는 말은 안 했잖아.”
“어... 안 사귈 거야?”
“당분간은 일이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다. 쉬는 날이면 잠부터 자야하는 남자친구라도 상관없다면 생각해 보겠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가져오는 선 자리는 억지로라도 중간에 한 번씩 나가보려고. 요즘 잔소리가 너무 심해지셔서 못 버티겠다.”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컵을 단숨에 비운 준석이 슬쩍 고개를 돌려 거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을 쳐다보았다.
“저기가... 실제로 있는 곳이라고 했지?”
준석을 따라 자신이 그려놓은 그림에 시선을 던진 윤재가 대답했다.
“응. 예멘에 있는 고대 도시야. 사막의 맨해튼이라고 불린대.”
윤재의 대답을 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준석이 잠시 텀을 두고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언제 한 번 직접 가보자. 둘이서.”
갑작스런 제안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윤재가 이내 사뭇 진지해진 표정을 지었다.
“위험한 곳인데... 괜찮아? 자살폭탄 테러도 있었던 곳이야.”
“괜찮아. 너랑 같이 죽는다고 하면 그것도 행복하게 받아들일 거니까. 쉰내 날 때까지 살아서 서로의 관을 지키는 것보단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준석이 새롭게 채운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지금 내가 한 말이 진심이라는 걸... 너는 모르겠지.’
명색이 술집 사장님이 되어서 겨우 맥주 두어 모금을 마시고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윤재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준석은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이젤에 놓여 있는 반쯤 채색되어 있는 그림을 쳐다보았다.
사막의 맨해튼.
윤재의 섬세한 손끝에서 피어난 고대 도시는 위험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무척이나 나른하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끈적한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손님들 각자의 대화소리가 여기저기서 웅성이며 들려오고 있는 바(bar) 안은 밤 아홉 시가 넘어가자 급격히 손님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깨끗이 처리했지?”
긴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 끝에 불을 붙인 수영이 의식적으로 소리를 낮춰 묻자 그의 옆에서 길게 연기를 내뱉은 여진이 곧바로 대답했다.
“여태껏 내가 직접 맡아서 뒤탈 생겼던 적 있었어? 내가 그렇게 허술하게 일 처리하는 놈 아니라는 거, 수영이 네가 더 잘 알잖아? 안 그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여진의 말을 듣고 들고 있던 담배를 입술 사이에 밀어 넣은 수영이 조금 전 여진으로부터 건네받은 USB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어젯밤 집에 도착해서 봤던 영상은 예상한 그대로의 수준이어서 특별한 인상은 남지 않았다. 한 때는 자신과 몸을 섞었던 남자가 여러 사내들에게 돌려지는 장면을 앞부분만 비교적 신중하게 확인한 수영은 이후 상당량 남아 있는 뒷부분은 띄엄띄엄 스킵을 해가며 대략의 상황만을 확인해둔 상태였다. 영상이 만들어진 이유야 입막음 및 재발 방지를 위한 보험 차원의 의미일 뿐, 애초에 수영은 호연과 해준이 뒷구멍으로 심한 모욕을 당하는 꼴을 구태여 진지하게 감상하며 즐길 정도의 악취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에게 그 정도의 관심을 선사할 마음도 없었다. 두 번 다시 그들이 윤재와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어느 정도 일 얘기가 마무리 지어진 시점에서 짧은 일상 얘기로 화제를 전환시킨 여진이 모처럼 수영과 제대로 얼굴을 맞이한 김에 줄곧 지인으로부터 듣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현석이가 너 요즘 왜 바(bar)에 안 보이냐고 묻더라. 네가 전에 잠깐 만나 놀았던 여자가 지금도 만날 때마다 네 얘길 꺼낸다면서 아주 지겨워 죽겠다고. 얘기 들어보니까 얼굴도 꽤 반반하고 엄청 글래머였다던데?”
부러움 반 시샘 반이 섞여 있는 여진의 시선을 뺨으로 받으며 조용히 연기를 내뱉은 수영이 아직 처음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잔을 들었다.
“이젠 예전처럼 가볍게 놀러 다닐 마음이 안 들어.”
뜻밖의 대답을 들은 여진이 커다래진 눈을 하고 웃었다.
“뭐야, 요즘 유행하는 농담이냐?”
“농담처럼 들려?”
진지한 수영의 반문에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를 금세 지워낸 여진이 덩달아 진지해진 표정을 짓고서 말을 이었다.
“너... 그때 그 남자... 그 둘한테 얻어맞았던 남자랑 사귀고 있는 거야?”
조심스런 여진의 질문을 받은 수영이 두 모금의 술을 천천히 목안으로 넘긴 뒤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면 좋겠다.”
“뭐야... 그럼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네가 그렇게까지 나선 거야?”
며칠 전 에서 있었던 일들을 곧바로 머릿속에 떠올린 여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꽤 긴 시간을 알고 지냈지만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수영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여진은 지금도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수영이 정말로 감정 조절을 실패한 끝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게 아닌가 하는 섬뜩한 생각까지도 한순간이나마 진지하게 떠올렸던 그였다. 정작 수영을 그렇게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던 존재는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눈에 띠는 점이 없는 평범한 남자처럼 보였지만, 둘 사이의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는 인간들 죄다 버리고 이게 대체 무슨 비효율적인 상황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뜻밖의 수영의 모습을 보는 것이 여진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어쨌거나 그 헛물을 켜고 있는 글래머 아가씨도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린 여진이 눈에 띠게 손님이 늘어난 가게 안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중 문득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어, 저기 구석 쪽에 앉아 있는 거, 정연석 아닌가? 아까만 해도 저 자리에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 들어온...”
말하던 중간 갑자기 옆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여진이 그 사이 멀어져가고 있는 수영의 뒷모습을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변 손님들의 시선을 받으며 긴 다리를 움직여 홀을 가로지르고 있는 수영이 향하고 있는 방향에는 함께 온 일행과 즐겁게 떠들고 있는 연석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