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쌩쌩하게 냉방이 되어 있던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후텁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어 왔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바닥에서 올라온 흙과 먼지가 간간이 부는 더운 바람을 타고 날리는 통에 중간 중간 시야는 희뿌옇게 변했다.
“그래도 손님들이 아주 없지는 않은가 보네.”
제법 널찍한 주차장에 드문드문 주차되어 있는 몇 대의 차량을 대충 둘러본 수영이 그렇게 말하자 윤재가 동조하듯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전 서울을 출발해 목적지로 향하던 중 윤재와의 의논을 걸쳐 수영이 차를 세운 곳은 허름한 간판을 달고 있는 막국수 집으로, 두 사람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것은 다른 거창한 이유 없이 그저 지나던 길에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전문 음식점이라기보다 일반 시골의 가정집에 가까워 보이는 수수한 외관을 하고 있는 가게는 무척이나 정감 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넓은 마당 주변에는 시골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이나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고, 쓰던 물건인진 장식용인지 모를 맷돌과 농기구들이 건물 벽 근처에 놓여 있었다. 규모나 오가는 사람들의 수만 빼고 보면 영락없는 시골 가옥의 모습이었다.
어릴 적 방학 때가 되면 종종 찾았던 외할머니 댁과 비슷한 외관을 하고 있는 가게를 잠시 천천히 둘러보던 윤재는 먼저 걸음을 옮긴 수영의 뒤를 따라 큼직하게 나뉘어져 있는 방안 중 한 곳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에어컨 대신 선풍기로 냉방이 되고 있는 방안은 좀 전까지 시원한 차 안에 있었던 두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은 덥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앉아 버티기 어려운 정도로까지 더운 상태는 아니었다.
마주한 윤재와 간단히 의견을 나눈 뒤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종업원에게 막국수 둘을 주문한 수영은 그 사이 종업원이 가져다놓은 컵에 물을 따라 자신의 앞에 놓아주는 윤재의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꽤나 더운 날씨 탓인지 드물게 윤재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더워?”
“오늘은 좀 그러네요.”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근처에 놓인 선풍기의 방향을 윤재 쪽으로 돌려주었다.
“안 더워요?”
“난 별로 더위를 안 타는 체질이라서.”
스스로가 대답한대로 수영은 붉어진 얼굴을 하고 중간 중간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근처 다른 손님들과 달리 혼자서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혼자서 시원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재킷은 차 뒷좌석에 두고 왔지만 이런 날씨에도 빳빳하게 잘 다려진 화이트 긴팔 셔츠를 소매만을 걷은 채 입고 있는 수영은 여기서 넥타이만 착용하면 당장 회사에 출근해도 손색없는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도착한 뒤 식사를 시작한 두 사람은 먼저 한 젓가락 맛을 보고나서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괜찮은데?”
“그러네요.”
메뉴판에 적혀 있듯 과일을 재료로 만들어진 육수 국물은 깔끔하면서도 시원했고 메밀로 만들어진 면은 딱 씹기에 좋은 굵기와 점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방의 외딴 곳에 위치한 데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도 몇 대 없는 것을 확인한 터라 특별히 맛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던 수영은 생각보다 입에 잘 맞는 막국수를 조금 빨라진 페이스로 먹기 시작했다.
수영보다는 조금 늦지만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페이스로 면을 모두 먹어치운 윤재는 마지막으로 큼직한 그릇을 들어 시원한 과일육수를 마셨다.
“맛있어?”
“네.”
“한 그릇 더 시킬까?”
“아뇨. 지금 정도가 좋아요.”
그렇게 대답하고서 들고 있던 그릇을 다시 상 위에 내려놓은 윤재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막 윤재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근처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네 살 가량의 어린 남자아이였다. 윤재가 미소를 머금자 아이도 생긋 웃었다.
뒤늦게 윤재의 미소를 알아차리고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수영이 자신의 뒤쪽에 앉아 있는 아이의 존재를 확인하고서 다시 윤재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아이 좋아해?”
미소 띤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다 문득 수영의 질문을 받고 자연스레 그에게 시선을 옮긴 윤재가 대답했다.
“그냥 귀엽다는 생각은 들어요. 특별히 막 좋아한다던가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요.”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아이를 갖고 싶으냐는 질문을 건넬까를 두고 잠시 생각하던 그는 결국 그 질문은 패스하기로 했다. 괜히 한 번 물어봤다가 막상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면 별로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그다지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닌 수영이었지만, 윤재와 관련해서 만큼은 아무리 대범한 성격의 그도 평범한 사람 수준으로 예민하게 변하는 때가 있었다.
“당신은 어때요?”
문득 되돌아온 질문에 수영이 곧바로 반문했다.
“어떨 것 같아?”
“.......”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던 윤재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요.’라고 조심스레 말하자 수영이 웃었다.
“특별히 싫어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아.”
이제껏 아기를 만드는 행위 자체는 질리도록 해왔지만 단 한 번도 아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던 수영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에게 있어 아기란 단순히 여자들을 안을 때마다 귀찮은 피임을 신경 쓰게 만드는 원흉 정도로만 인식되어 왔었다.
“평소 아이를 좋아하지 않던 사람도 자기 아이는 좋아하게 된대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자기 유전자가 들어간 애랑 남의 애랑은 다를 테니까.”
“.......”
“그래도 뭐, 어차피 우리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덧붙여진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가 이내 조금 어색해진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만큼 그 이상 직접적인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수영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파악한 윤재였다. 물론 그 역시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그 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서 서비스로 나온 수정과를 마시며 얼마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은 그쯤에서 슬슬 이동하기로 하고 계산을 마친 뒤 가게를 빠져나왔다.
주말이라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이 많은지 가게 바깥에 세워져 있는 각각의 차 번호판에는 이곳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지역의 이름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었다. 몇 십 분 사이 배로 늘어난 차량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홀로 이국적인 외형을 자랑하고 있는 수영의 차였다.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고가의 외제차를 조금 신기한 듯 쳐다보던 주변 사람들은 잠시 후 태연하게 운전석에 오르는 훤칠한 차주를 향해 부러움 반 시샘 반이 담겨있는 시선을 보냈다.
“이 차가 눈에 띄기는 한가 봐요. 다 한 번씩 쳐다봐요. 저쪽에 앉아 계신 할머니들까지도.”
그렇게 말하는 윤재를 슬쩍 한 번 쳐다보고서 곧바로 차를 출발시킨 수영이 입을 열었다.
“회사 출퇴근용으로 쓰려고 몇 개 후보 차종들 가운데서 그나마 제일 안 튀는 걸로 고른 게 이건데. 우리 집 사람들은 작은 어머니 한 분 빼고는 독일 차로 통일이거든. 독일제를 고집하는 건 외형보다는 안전성 때문이고.”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가 동조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갖고 있는 건 저렴한 국산차종이지만 독일 차가 좋다는 건 오래 전부터 들어와 익히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잘은 몰라도 실제 직접 이렇게 탑승해 보니 깔끔한 내부 디자인이나 승차감이 국산 차종보다는 많이 앞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러 면에서 부담이 되는 외제차보다는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버스 뒷좌석이 자신에겐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윤재였지만.
막국수 집을 떠나 다시 포장된 도로로 들어선 차는 이후 사십 여분을 더 달린 끝에 목적지인 작은 시골군의 동네로 들어섰다. 점차 좁아지며 포장이 벗겨진 흙길 위를 달리기 시작한 뒤로 바닥에서 일어난 자욱한 먼지가 차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에 세차를 다시 한 번 해야 할 듯 했다.
“이쪽 길로 쭉 들어가면 돼?”
“네. 저기 보이는 뒤 쪽 산이에요.”
가던 중간 허름한 슈퍼를 발견한 윤재가 잠시 수영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한 뒤 혼자 차에서 내려 곧장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가게 밖으로까지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는 머리 희끗한 할머니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걸어오는 윤재의 모습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던 수영이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한 시를 넘겨 출발한 뒤로 평소보다 느긋이 운전을 한 탓에 목적지 근처까지 온 지금 제법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뭘 샀어?”
조수석에 앉은 윤재가 문을 닫는 것까지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킨 수영이 물었다.
“과자 한 봉지랑 소주 한 병, 초콜릿 하나요.”
“초콜릿?”
“네... 아버지가 좋아하셨거든요.”
윤재의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수영은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한 차례 포장을 했음에도 이후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듯 군데군데 움푹 들어간 곳이 보이는 낡은 도로를 달린지 십여 분 만에 차가 도착한 곳은 그리 높지 않은 마을 뒷산 어귀를 앞에 둔 갓길이었다.
“이쪽 길로 올라가면 돼요.”
여름이라 온갖 종류의 풀이 잔뜩 우거져있는 산은 평소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 원래 나있던 길 중간 중간에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오후 다섯 시를 넘긴 시점에서도 아직 높은 기온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산을 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즐거운 일은 아니었지만, 일찍부터 정해두고 있었던 일정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수영은 그 어떤 짜증스런 기색도 얼굴 위에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길을 안다는 이유라 앞서 걷고 있는 윤재가 급격히 높아진 경사를 오르던 중간 조금씩 멈칫할 때마다 수영은 그런 윤재의 모습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결국 괜찮다고 말하는 윤재의 손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빼앗든 건네받은 수영은 혹시라도 앞서 걷던 윤재가 미끄러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부지런히 앞에서 움직이는 다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람의 기척에 놀랐는지 무성이 난 수풀 사이에서 높게 튀어 오르는 풀벌레들을 간간이 손으로 쳐내며 걷자 문득 멀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는 힘이 들었지만 저녁 시간으로 가며 해가 좀 기울어진 덕분인지 처음 산 어귀에 들어설 때보다는 조금 더위가 가신 느낌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처음으로 멈춰 선 윤재의 뒤를 따라 그의 곁에 발을 멈춰 세운 수영은 정면으로 보이는 작은 규모의 산소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이 풀로 우거져 있어서 내심 손으로라도 주변 풀을 정리할 각오를 하고 있던 그였지만 다행히 산소 주변은 무척이나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는 상태였다. 애초에 이곳에 오기로 한 윤재가 따로 낫을 준비하지 않은 것도 최근 들어 지인 중 누군가가 먼저 벌초를 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산소 주변을 뒤덮고 있는 새파란 잔디와 잔디 곳곳에서 튀어 오르는 벌레들, 후텁지근한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풀냄새.
소박한 규모의 산소 앞에 서서 잠시 동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수영이 그쯤에서 짧은 휴식을 마치고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 손을 집어넣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수영의 손에서 꺼내진 것들을 건네받은 윤재가 간소하게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무덤 앞에 차려진 것은 소주 한 병과 넓게 펼쳐져 놓인 봉지 과자, 세 등분으로 잘린 초콜릿이 전부였지만 윤재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일까 조금도 초라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 저, 윤재 왔어요.”
간략하게 준비를 끝내고 수영과 나란히 무덤 앞에 선 윤재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더운 날씨에 산을 오르며 발갛게 변한 뺨을 하고서 나직이 인사를 건넨 그는 옆에 서있는 수영의 모습을 슬쩍 쳐다본 뒤 다시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 누구랑 같이 왔어요. 이 사람이 아버지께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요.”
거기까지 말한 윤재로부터 시선을 건네받은 수영이 양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입을 열었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우수영이라고 합니다.”
마치 실제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정중한 목소리를 낸 수영의 지금 머릿속엔 언젠가 한 번 윤재의 집에서 봤던 사진 속 중년의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윤재와 꼭 닮아 있던 그 선한 인상의 얼굴은 많은 생각을 품은 채로 이 자리에 서있는 수영의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다.
바로 앞 무덤에 잠들어 계신 고인을 향해 지금 이 순간 수영이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죄책감이었다. 수년 전 비통한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던 윤재의 부친은 당시 수영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철저한 타인에 불과했었다. 이제 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과거 속에서 한참동안이나 깨끗이 머릿속에서 지워냈던 존재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마주하고 있는 지금 수영의 마음은 더없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단 한 번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윤재를 보았을 때, 수년 전 부친의 죽음을 고하던 당시의 그를 차갑게 버렸던 과거의 자신을 죽을 만큼 원망했었던 수영은 그때부터 줄곧 윤재의 용서를 얻어 그와 함께 이곳을 찾는 날이 자신에게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왔었다. 그저 단순히 윤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윤재에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존재를 향해 자신 역시 진심어린 감사와 애도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김윤재라는 사람을 세상에 내보내주셔서, 그를 이렇게나 바르게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오래 전에 있었던 당신의 비통한 죽음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는 말을 수영은 늦은 지금이라도 고인이 된 윤재의 부친께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저지만 어머님과 윤재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곁에서 보살피겠습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서는 아무쪼록 높은 곳에서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경건함이 묻어나는 묵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수영은 잠시 후 한참 만에 정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옮겨 옆에 나란히 서있는 윤재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부터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는 윤재는 아무런 말도, 수영에게 시선을 돌려오지도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좀 전까지 열로 발갛던 뺨이 원래대로 돌아온 대신 그의 눈가가 조금 붉게 변한 것처럼 보였지만 수영은 모르는 척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중간에 한 차례씩 주변을 스쳐가는 바람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주변은 무척이나 고요해서 다소 음산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그간 윤재가 혼자서 이 쓸쓸한 길을 올랐다 내려갔을 것을 상상하니 마음 한켠이 저려온 수영은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항상 윤재와 함께 이곳에 오리라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잠시 후 먼저 나선 윤재에 이어 종이컵에 담긴 술을 산소 주변에 둥글게 뿌린 수영은 윤재와 짧게 시선을 교환한 뒤 긴 몸을 낮춰 연이어 두 번의 절을 했다.
긴 시간이 흐른 뒤의 만남은 그렇게 경건한 분위기에서 서서히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저는 이런 성격이라 떠들썩하게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어울리지를 못해서 가끔 제가 친구를 집에 데려오면 부모님은 무척 좋아하셨어요. 어머니는 다 먹고 가라며 한 상 가득 푸짐하게 요리를 해주셨고, 아버진 가만히 근처에 계시다가 친구와 제가 있는 방으로 오셔서 주사위 게임판이나 윷놀이 세트를 건네주시곤 하셨죠.”
“.......”
“그러니까 만약 아버지가 지금 하늘에서 보고 계시다면 오늘 당신이 이곳에 온 걸 기뻐하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해요.”
묘소와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린 윤재가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말했다. 올라올 때는 고생을 했지만 그 대신 높은 곳에 올라와 내려다보는 확 트인 전망은 이곳까지 올라오며 느꼈던 고생을 단숨에 씻겨내 줄 만큼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잠시 입고 있었던 수트 재킷을 벗어 근처 바닥에 내려놓은 수영이 소매를 걷어 접어 올리며 잔디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가장 더운 한낮을 지나 슬슬 기온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인지 재킷을 벗자 그럭저럭 견딜 만한 더위라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물론 수영이 날씨에 맞지 않게 제대로 된 수트 차림으로 산에 오른 것은 오늘 이 자리가 윤재의 부친과 처음으로 만나는 중요한 자리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뻐하실까? 내 생각에는 귀한 아들 채 간 놈팽이인 거 아시면 오히려 화내실 것 같은데.”
묘하게 진지한 수영의 농담을 듣고 스치듯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자신도 천천히 수영의 곁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시야에 담기는 탁 트인 전망 안에는 오밀조밀 모여 있는 시골 가옥들뿐 아니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는 도로와 논밭들, 가득 물로 채워진 저수지도 들어 있었다.
“집은 몇 채밖에 안 보이는데 논밭이 많네. 주변에 낮은 산들도 많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수영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몇 번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대요.’라는 윤재의 말을 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태어난 이후로 줄곧 도심가에서 살아온 수영에게 있어 이처럼 자연친화적인 소박한 풍경은 무척이나 낯선 것이었다. 어릴 적 방학 때가 되면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의 다수는 조부모가 계신 시골에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친가는 물론 외가 쪽 조부모님마저도 도심가에 살고 계신 이유로 인해 수영은 어릴 적부터 사람들이 흔히 시골이라 말하는 농어촌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여기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계셔?”
“오래 전에 그랬었죠. 두 분 모두 돌아가신지 십년이 넘었어요.”
“그래...”
“원래대로라면 선산인 여기에 묻히셔야 했지만 두 분은 유언에 따라 화장을 했어요. 그런 두 분과 달리 아버지가 여기에 묻히신 건 어머니 뜻에 따라 결정된 거였고요.”
“.......”
“마지막까지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던 어머니는 어딘가 분명한 형태로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기를 바라셨던 것 같아요.”
윤재의 말을 들은 수영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타인의 입장에서 갑작스런 뺑소니 사고로 남편을 잃은 그 비통한 마음이야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끝내 남편을 전부 떠나보낼 수 없어 매장을 고집한 윤재의 모친의 마음이라면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수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실제로 떠나고 없지만 언제든 그를 기리고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을 터였다.
“참한 색시 얻어 평범하게 사는 걸 바랐다고 했지?”
“!”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윤재가 먼 곳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나는 미래에 부모님 기대치에 들어맞는 스펙 좋은 여자 만나서 살게 될지 모른다고 했고.”
“.......”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별로 오래 된 일도 아니야.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꽤 확고하게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으니까. 젊은 시절 실컷 놀다가 결혼을 하면 뒤에서야 뭘 하던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번듯한 가장 노릇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우리 형님처럼.”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재를 향해 스치듯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 수영이 연신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렇게 웃으며 할 수 있는 건 깨끗이 지난 일이라서야.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해. 그래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겠지만 느낀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어쨌든 우리 부모님 쪽이라면 걱정하지 마. 내가 바이라는 건 이미 예전부터 눈치 채고 계셨던 두 분이니까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린다고 해도 새삼 그 일로 크게 충격을 받지 않으실 거야. 물론 결혼에 대한 잔소리는 좀 하시겠지만.”
“.......”
“부모님께 허락받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까지도 일일이 부모님 허락받고 살아온 효자도 아니었고. 다만 지금 내가 신경이 쓰이는 건 우리 집보다는 너와 너희 어머니의 일이야.”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자 자연스레 표정이 굳어지는 윤재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 어머니에게서 예쁜 손주를 보는 꿈을 빼앗는 건 정말로 죄송스럽게 생각해. 그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정말로 어쩔 수가 없어. 하지만 어머니께 아무리 죄송한 마음이 들더라도 난 이제 와 널 놓지는 않을 거야. 너까지 나와 같은 불효자로 만드는 죄를 짓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이건 이해해줘.”
수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아 갔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눈에 띄게 굳은 얼굴이 되어 있는 그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가 이 현실적인 사안을 놓고 혼자서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해왔다는 것을.
“그걸 모르고서 당신을 선택한 게 아니에요.”
한참 만에 처음으로 들려온 윤재의 목소리는 나직한 동시에 단호했다.
“힘들 거 각오하고 있어요. 일단 그때 한 번 뵈었던 당신의 형님만도 무서웠으니까...”
“...형님? 그 정도 문제는 내 선에서 끝낼 수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자연스레 그날의 무례한 사건을 떠올리고 미간을 좁힌 수영이 형님의 이야기를 단칼에 자르자 윤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수영의 성격을 생각하면 허세가 아닌 듯 해서 오히려 한층 더 걱정이 됐지만 그와 동시에 그 단호한 말을 듣자 조금은 안도의 기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혹시 기억해?”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윤재가 대꾸 없이 침묵을 지키자 수영이 잠시 텀을 두고서 말을 이었다.
“헤어지자고 하는 너한테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로 원하면 사람 없는 시골에 가서 농사짓겠다고.”
“.......”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만약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여기가 좋지 않을까 싶어. 아까부터 계속 쭉 보고 있으니까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아. 경치도 좋고.”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는 넓은 논을 쳐다보고 있는 수영을 따라서 윤재도 고개를 돌렸다.
“그때는 상황이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당신처럼 도시생활에 익숙한 사람한테 농사는 무리일 거예요.”
좋은 집과 외제차, 볼 때마다 바뀌는 다양한 명품 수트에 갖가지 종류의 향수를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바꿔 사용하는 등으로 지나치게 세련된 생활을 해온 남자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논에서 모내기를 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상상이 되지 않는 윤재였다. 일단 외모에서부터 그는 농사일이라는 것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안 해서 그렇지 시작하면 다 할 수 있어. 그림을 그리는 거나 노래를 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분야만 아니라면.”
수영의 말을 들은 것과 동시에 한 장의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린 윤재가 무심코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꼭 농사를 짓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건 아니야. 일단 농사가 힘들다는 건 당연히 나도 알고 있고, 또 사실 난 편안한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곳은 최후의 보루로 삼으려고.”
“.......”
“앞으로 살면서 힘든 일이 생기면 넌 그때마다 이곳을 생각해. 정말 도망치고 싶을 땐 도망치지 말고 나한테 말해. 그럼 모두 다 손에서 놓고 너와 함께 여기로 올게.”
나직하게 이어지는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가 먼 곳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영이 그린 두더지 비슷한 그림을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던 그는 미세하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힘들 것을 미리 각오하고 있다고 해서 힘든 일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거대한 수영의 주변 환경이나 소중한 사람을 상대로 커다란 비밀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윤재에겐 벌써부터 적지 않은 부담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어지는 상황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그래서 조금 전 수영이 해준 말이 윤재에겐 더욱 깊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장소가 있고, 또 그때에 함께 손을 잡고 갈 사람이 있다는 것.
설령 그것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그와 같은 든든한 선택지 하나를 가지게 된 것만으로 윤재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고요한 윤재의 옆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수영이 손을 뻗자 윤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왔다. 바스락 잔디를 밟는 소리와 함께 사이의 틈을 좁혀 바짝 곁으로 다가선 수영의 단단한 팔에 등을 감싸 안긴 윤재는 잠시 진지하게 수영과 마주하던 시선을 거두고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까워진 체향이 한층 더 깊어진 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그저 가볍게 닿았을 뿐인 입술의 감촉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심스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침입해 들어온 뒤엔 처음 그저 간지럽던 입맞춤은 순식간에 달콤한 키스로 변했다. 얽히는 혀와 젖은 입술을 빨고 핥으며 정성스레 키스를 이끌어간 수영은 그런 그의 주도에 간신히 응하고 있는 서툰 윤재의 반응을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는 윤재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잠시 동안 겹쳐져 있던 입술을 떼어낸 수영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과도하게 능숙한 수영의 키스를 어떻게든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던 윤재는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자연스레 자신에게 향해오는 수영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의 귀가 눈에 띌 정도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뭔가 감상을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윤재가 죽을 만큼 부끄러워할 것 같다는 생각에 수영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슬슬 해가 질 것 같은데 더 늦기 전에 내려갈까. 서울 도착하기 전에 휴게소 한 곳에 들러서 저녁 먹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팔을 내밀어 윤재를 일으켜주었다.
여유를 부리는 사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주변을 인식하고서 조금 서둘러 앞에 차려놓았던 술과 과자를 정리하고 묘소 앞에 선 두 사람은 ‘다시 또 오겠습니다.’라는 정중한 인사를 마음으로 전한 뒤 아까 전에 힘들게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사가 높은 데다 바닥에 돌이 많이 박혀 있는 험한 길을 앞서 걷는 내내 수영은 중간에 한 차례씩 뒤를 돌아보고서 윤재와의 간격을 살폈다. 이런 장소에서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방해요소가 될 텐데도 그간 혼자서 이 길을 많이 지나다니며 익숙해져있기 때문인지 수영의 우려와 달리 윤재는 뒤처지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잘 따라오고 있었다.
문득 앞에서 걸음을 멈춘 수영을 의아한 듯 쳐다본 윤재가 자신도 수영의 옆에서 걸음을 멈추자 그제야 수영이 잠시 제 자리에 세워두고 있었던 긴 다리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좁아서 일렬을 유지해야 했던 길은 어느 새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게 변해 있었다.
“특별히 추천하는 휴게소 있어?”
“추천이요?”
“응. 휴게소마다 음식 맛이 다르잖아. 이왕이면 더 맛있는 데서 먹는 게 좋으니까.”
“...글쎄요. 휴게소는 몇 군데밖에 가본 적이 없어서. 그냥 다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래? 그럼 휴게소 말고 서울에 도착한 뒤에 먹을까? 서초랑 강남 쪽에 자주 가는 음식점이 몇 군데 있는데.”
“아뇨. 오늘은 아까 얘기한대로 그냥 휴게소에서 먹어요. 가끔은 휴게소 음식이 먹고 싶을 때가...”
거기까지 말하던 윤재가 문득 말을 멈췄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손을 잡힌 윤재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수영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다. 10센티가 넘는 키 차이로 인해 자연스레 나란히 서서 걷는 두 사람의 머리 위치는 꽤 차이가 났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네?”
“지금까지 나한테 무슨 호칭으로 부른 적 없지?”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생각에 잠긴 윤재가 잠시 후 ‘그러네요.’라고 작게 대답하자 수영이 잠시 텀을 두고 말을 이었다.
“한 번 불러볼래? 뭐라도 네가 편한 걸로 일단.”
조금 당혹스런 제안을 받고 어떡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윤재는 잠시 동안 그대로 침묵을 지킨 채 부지런히 걸음만 옮겼다. 아까 전에 처음 이곳을 지날 때 일부러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꾹꾹 밟아둔 덕분에 다시 같은 길을 지나고 있는 지금 한결 수월하게 걸을 수가 있었다.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 편히 수영의 손을 잡은 채로 그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윤재가 한참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우대리님.”
문득 들려온 말에 수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뭐야, 너 내 부하직원이야?”
가벼운 한숨을 섞어 질문을 던진 수영이 살짝 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처음 이곳을 오를 땐 꽤 먼 거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올라갈 때와 달리 힘들다는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자신의 승용차가 보이고 있었다. 이 길을 벗어나면 윤재의 손을 놓아야한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조금은 안타까운 기분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
“.......”
“다른 커플들처럼 닭살 돋는 호칭까지는 부탁 안 할 테니까 그냥 평범하게 이름으로 불러. 수영씨라고.”
수영의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이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윤재는 ‘시험 삼아 지금 한 번 불러봐.’라는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요. 나중에... 마음의 준비가 되면.”
‘이름 부르는데 무슨 마음의 준비씩이나...’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당장에 억지로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수영은 ‘그래.’라고 짧게 대꾸했다.
“휴게소 가면 뭐 먹을까?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 있어?”
“특별히 좋아한다기보다는... 갈 때마다 먹는 건 있어요.”
“뭔데?”
“돈가스랑 통감자요.”
윤재의 대답을 듣고 피식 웃음소리를 낸 수영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윤재를 슬쩍 쳐다보고 말했다.
“아니. 너 치즈버거도 그렇고 의외로 입맛이 애들 취향인 것 같아서. 왠지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드네.”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귀엽다니... 어디가요?”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어?”
“네.”
“뭐, 평소의 넌 워낙 조용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니까. 그래도 난 너보다 연상이니까 내 앞에선 어깨에 힘 빼고 마음 편하게 어리광부려도 돼. 다 받아줄게.”
“그런 이상한 건... 안 해요.”
수많은 연인들이 자연스럽게 하는 행위를 졸지에 ‘이상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윤재의 진지한 대답에 결국 수영이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의식적으로 뻔히 눈에 보이는 ‘척’을 하는 인간들이라면 그간 지겹게 봐온 그는 정작 귀여운 행동을 하고서도 그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옆의 남자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줄곧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어깨에 걸쳐 멘 수영이 산길 어귀에 도착하기 직전 윤재와 맞잡고 있던 손에 살며시 힘을 실었다.
점차 끝이 보이는 길을 걸으며 수영은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이 더딘 걸음을 걷는 남자라서,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오래 전 윤재의 부친의 부고를 들었던 그 날 멈췄던 시간이 비로소 오늘, 그가 잠들어 있는 이곳에서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
“어서 오세요- 아, 준석 형님. 오셨어요?”
“응. 오랜 만이야. 잘 지냈어?”
“네. 저야 뭐 늘 그렇죠. 그런데 오늘은 회사 분들이랑 같이 오셨나 봐요?”
잠시 후 준석의 뒤를 따라 줄줄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일행을 확인하고서 그렇게 물은 성호가 일단 비어있는 자리 중 가장 넓은 쪽으로 준석의 일행을 안내했다.
“여기 안주가 그렇게 맛있다는 얘길 듣고 왔어요.”
“준석씨가 추천해서 온 거니까 만약에 맛없으면 준석씨가 돈 다 내야 돼. 알았지?”
“이야- 메뉴도 꽤 다양하네요. 양파 소스 오징어...? 이건 어떤 맛이지?”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한 마디씩 꺼낸 일행을 향해 미소로 화답한 성호는 잠시 후 일행의 말에 따라 손에 든 주문서를 하나하나 체크해나가기 시작했다.
“알탕 하나에 김치찌개 하나, 골뱅이 무침 하나, 양파 오징어 둘, 감자튀김 하나, 그리고 소주 다섯 병이랑 맥주 다섯 병. 맞으시죠?”
“네-.”
주문서를 한 번 더 확인한 성호가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서 곧바로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하던 중간 문득 등 뒤로 따라붙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 준석 형님?”
“응.”
성호의 어깨를 툭 한 번 두드리고 먼저 주방 앞에 도착한 준석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늘 그렇듯 앞치마를 걸친 채 열심히 뭔가를 만들던 윤재가 뒤늦게 준석의 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왔다.
“어, 왔어?”
“응. 인사나 잠깐 하려고. 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일해.”
혹시나 바쁜 윤재의 시간을 빼앗을까 싶어 그쯤에서 몸을 돌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준석을 지나쳐 주방 안으로 들어선 성호가 들고 온 주문서를 데스크 한 곳에 놓은 뒤 그 사이 윤재가 완성해 놓은 접시들을 차례로 쟁반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준석 형님 오늘은 회사 동료 분들과 같이 오셨네요.”
“그래?”
“옆자리에 되게 예쁘신 여자 분이 앉아 계시던데요?”
설렘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는 성호를 슬쩍 쳐다본 윤재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벌써 몇 개월 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여자 친구에게 차인 뒤 줄곧 솔로생활을 유지해 오고 있는 성호는 최근 들어 부쩍 입버릇처럼 외롭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엔 친구의 주선으로 아주 오랜만에 소개팅 자리에 나갔던 모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상대와 잘 되진 않은 듯 했다.
“이게 마지막 접시인가요?”
“응.”
몇 차례에 걸쳐 홀과 주방을 바삐 오가며 서빙을 마친 성호가 조금 전 떠난 손님들이 남기고 간 빈 접시들을 모아들고서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손님이 빠져나간 뒤 조금 쉴 시간을 갖게 되어 의자에 앉아 있던 윤재가 성호의 손에 들려 있는 접시와 냄비를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그보다 앞서 고무장갑을 팔에 끼운 성호가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다고 말했다. 종일 쉼 없이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체력적인 손실이 컸지만, 손님이 없어 놀면서 불편한 마음으로 월급을 받느니 다소 몸이 고단하더라도 이렇게 일을 하는 쪽이 행복한 성호였다.
몇 개월 전 건너편에 오픈했던 <머꼬머꼬>가 얼마 전 급격한 매상 악화로 문을 닫은 뒤 <민들레>를 찾는 손님의 수는 눈에 띄게 늘어난 상태였다. 처음 얼마동안은 <머꼬머꼬>측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이벤트가 끝나고 가격이 원래대로 오르자 곧바로 그쪽을 찾던 손님의 수는 뚝 떨어졌다.
이벤트 기간 동안 <머꼬머꼬>를 찾았다가 이벤트가 끝난 뒤 다시 <민들레>로 돌아온 손님들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 발길을 한 손님들의 상당수는 단순히 싼 맛에 많은 양을 먹을 수 있다는 이점에 끌렸던 것뿐인 듯 했다. 실제 <머꼬머꼬>의 이벤트 기간이 끝나고 두 가게가 비슷한 수준의 가격 격쟁을 시작하자마자 <민들레>를 찾는 손님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 그 증거라면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특별히 떠들썩한 이벤트를 한 적은 없지만 저렴한 가격과 깔끔한 맛으로 꾸준히 손님을 모아온 <민들레>는 당장에 큰 흑자는 보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기본 이상은 유지해오고 있었다.
“여기, 양파 오징어 두 접시 더 갖다 주세요!”
밖에서 들려온 준석의 목소리에 곧바로 성호가 ‘네!’라고 짧게 대답하자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윤재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성호의 옆에 서서 소스가 든 통을 꺼낸 그는 능숙한 솜씨로 이 가게의 초 절정 인기메뉴 제작에 들어갔다.
“어제 만들어놨는데 벌써 한통을 거의 다 썼네.”
통에 남아 있는 소스를 양푼에 덜어내며 윤재가 중얼거리자 수세미로 열심히 접시를 닦아내던 성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제가 꾸준히 관찰한 결과 매상의 절반은 양파 소스 오징어 같아요. 사장님이 직접 개발하신 거라 더 기쁘지 않으세요?”
“기쁘지. 사실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좋아하실 줄은 몰라서 좀 당황스러운 기분도 들지만.”
“센스가 좋으신 거예요.”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겸손하게 대답하고 웃는 윤재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호가 세제로 닦아놓은 접시들을 차례로 물로 헹궈내며 말했다.
“사장님 요즘 좀 변하신 것 같아요.”
뜻밖의 말을 듣고 문득 손을 멈춘 윤재가 무슨 의미냐고 조용히 시선으로 물었다.
“그냥 제 느낌이지만... 전이랑 웃는 모습이 변했다고 할까요. 예전에도 웃지 않으신 건 아니지만 그때는 어딘가 좀...”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공에 시선을 던진 성호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래. 쓸쓸한 느낌이 들었었거든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어도 완전히 웃는 게 아니라 반은 다른 곳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
“그런데 요즘은요. 웃으면 그냥 웃고 계신 것처럼 보여요. 다른 데에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지금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요.”
생각지 못한 성호의 말에 윤재는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줄곧 성호의 눈에 그렇게 비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의문에 이어 진지하게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 본 그는 그러나 열심히 생각해 봐도 아무래도 스스로의 입장에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가 다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옆에 선 성호도 싱크대 한 켠에 쌓아둔 접시와 냄비들을 서둘러 물로 헹궈내기 시작했다.
“잘 모르겠는데, 나는.”
문득 들려온 윤재의 말을 듣고 성호가 씩 웃었다.
“어쨌든 좋은 쪽으로 변한 거니까 좋게 생각하세요.”
잠시 후 성호가 설거지를 마칠 때쯤 윤재의 손에서 완성된 양파 소스 오징어 버터구이도 무사히 접시에 옮겨졌다. 남아 있는 소스가 많지 않음에도 평소보다 좀 많은 양이 사용됐는지 주방 안엔 꽤 강한 양파의 향이 퍼져 있었다.
“준석 형님의 일행이라 더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것 같은데요?”
“보나마나 준석이가 엄청 과대광고를 해놨을 텐데 거기에 조금은 맞춰줘야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문득 카운터 쪽에서 들려온 전화벨소리를 듣고 주방 입구에 시선을 던졌다.
“아, 제가 가서 받을 게요.”
씩씩한 목소리로 말하고서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성호의 듬직한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윤재가 좀 전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완성작이 담겨져 있는 접시 두개를 먼저 쟁반으로 옮긴 뒤 서비스로 나가는 과자도 커다란 그릇에 담뿍 담아 그 옆에 놓았다. 모처럼 준석이 데리고 온 손님인 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신경을 써주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잠시 후 쟁반을 손에 든 윤재가 주방 입구로 향하던 중간 갑자기 다시 안으로 들어온 성호를 확인하고 걸음을 멈췄다.
“왜?”
“우대리님한테서 온 전화인데요, 내일 저녁으로 되어 있는 회식 예약을 모레로 옮겨달라고 하시네요.”
“그래? 알았어.”
“일단 직접 나가서 전화 받으세요. 대리님이 사장님 좀 바꿔달라고 하셔서... 아, 그건 저 주세요. 제가 옮길게요.”
잠시 멈칫하다 자신에게 쟁반을 넘기고서 카운터로 향하는 윤재의 모습을 바라보던 성호는 곧 주방을 나서 멀찍이 떨어진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는 준석 일행에게로 향했다.
“양파 오징어 버터구이가 왔습니다.”
활기찬 목소리를 내며 다가와 커다란 두 개의 접시를 차례로 테이블에 내려놓는 성호를 쳐다본 준석이 말했다.
“한 접시가 2인분 기준인 걸로 아는데 많이 담았네. 이건 거의 4인분인데?”
“네. 준석 형님 일행분이시니 사장님이 특별히 많이 담으셨어요.”
성호의 대답을 듣자마자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소리를 냈다.
“준석씨 덕분에 실컷 먹네. 양파 소스 오징어인가 이거 중독성이 대단한 것 같아. 집에 가도 계속 생각 날 것 같아.”
“서비스로 나오는 과자도 처음 보는 건데 맛있어요.”
“안주들이 가격에 비해 양이 다 많은 것 같아요, 여기는. 근데 또 엄청 맛있기도 하고요.”
“저도 최근에 들러본 가게들 중에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나중에 여자 친구랑 둘이서 와봐야겠어요.”
흡족한 반응을 보이며 다시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한 동료들을 슬쩍 쳐다본 준석은 빈 그릇을 쟁반에 담아 다시 주방으로 향하는 성호의 뒷모습에서 멀찍이 떨어진 카운터 앞에 서있는 윤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좀 전에 전화를 받은 윤재는 아직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피크 시간이 지난 덕분에 가게 안은 조금 한산하게 변해 있어서 멀찍이 떨어진 이곳까지 중간 중간 윤재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전달되어 오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대화의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단체 예약 주문인 건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뭔가를 말하고 있는 윤재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준석이 문득 테이블 아래에서 자신의 무릎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
뭘까.
상대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자코 입을 다문 채 수화기를 들고 있던 윤재가 어느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윤재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도 아닌 준석이 새삼 지금 이 순간 눈의 깜빡임조차 잊은 채 윤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그가 봐온 익숙한 미소와는 묘하게 다른 구석이 눈에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로 얌전한 분위기만을 풍겼던 익숙한 미소와는 다르게 지금 웃고 있는 윤재의 얼굴에선 묘한 청량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만약 색으로 표현한다면 밝은 민트색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처럼 웃는 윤재는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던 준석의 머릿속에 문득 한 조각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벌써 몇 년 전 여름 즈음 평소답지 않게 조금 들떠 있었던 짧은 시기 동안의 윤재의 모습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잘 웃기도 하고 말수도 많아졌던 그 시기의 윤재를 잠시 머릿속에 떠올리던 준석은 다시 카운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곧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윤재의 얼굴에 남아 있는 미소는 분명 조금 전 준석이 떠올렸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것과 꼭 닮아 있는 것이었다.
오래 전 아주 짧게 목격되었다 사라졌던 그 시절의 반짝거리는 공기가 어째서인지 지금 윤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이상하게도.
“준석씨, 준석씨도 빨리 먹어. 멍하니 있는 사이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한테 음식 다 뺏기겠어.”
문득 들려온 동료의 목소리에 그제야 윤재에게 집중하고 있던 시선을 거둔 준석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동료들과 가볍게 미소를 교환했다. 아니나 다를까 좀 전까지 푸짐하게 채워져 있던 접시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주를 집는 대신 눈치 빠른 옆의 동료가 새롭게 채워준 잔을 손에 든 준석이 잠시 후 다시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조금 전까지 그곳에 서있었던 윤재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기분 탓인 걸까. 아니면 취기로 인해 순간적으로 착각을 한 것일까.
몇 분 전 보았던 묘한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한 준석은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벌컥벌컥 시원한 소리를 내며 단숨에 맥주 한 컵을 비운 그는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고서 뒤늦게 그 사이 한층 더 활발해진 동료들의 대화에 합류했다.
모처럼 만에 야근에서 벗어나 만끽하는 즐거운 밤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