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걸 받다가 나는 한숨을 쉬며 애들을 진정시키고 식탁으로 갔다.
“형, 절대 긴장하면 안 돼.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는 거야. 알겠지? 가기 전에 우황청심환 하나 사 먹고 가자. 내가 밥 먹고 사 올게. 긴장될 때는 심호흡하면 괜찮아져. 깊게 마셨다가 길게 내뱉고. 후, 하, 후, 하.”
잔뜩 긴장한 얼굴로 덜덜 떨면서 이진혁이 말했다. 아니, 난 카메라 울렁증도 없는데…….
“정확히 언제야? 언제 간대? 일단 급하니까 매일 1일 1팩 하자. 요새 화질이 좋아서 가까이에서 찍으면 모공도 다 보인다니까? 나중에 밥 먹고 눈썹 정리도 좀 해. 진짜 뭐냐고, 덥수룩해서. 산적이세요? 본인이 아이돌이라는 자각은 있으세요?”
딱히 산적 소리 들을 만큼 눈썹이 덥수룩하지도 않은데 유노을이 오버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찔렸기 때문에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형, 내 선크림 쓰고, 내 옷도 빌려 줄게. 그리고 신발도 내 거 신어. 갈 때 내 간식도 가져가서 배고플 때마다 하나씩 까먹어, 몰래. 당 떨어지면 손 떨리고 그러잖아.”
김강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어린애가 숨겨 둔 비상금 오백 원을 내게 건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급해도 어린애 코 묻은 돈을 뺏어 쓸 수는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심호흡도 하고 마스크 팩도 하고 선크림도 바를 테니까 우선 밥 먹자.”
“근데 어떻게 세가온이랑 둘이 나가게 되는 거지? 아직 어떤 프로그램인지도 모르는 거 맞지?”
이진혁이 숟가락을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무것도 몰라. 그냥 게스트로 나가는 건가? 너무 놀라서 그런 것도 안 물어봤네. 아무튼 곧 연락 주겠다고 했으니까 그때 되면 알겠지, 뭐.”
“혹시 세가온은 미리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형이랑 같은 프로그램에 섭외된 거 알고 좀 친해지려고 찾아왔던 건가?”
유노을이 그럴듯한 추리를 했다. 계속 찜찜했던 게 이제야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런가 봐. 그럼 나쁜 마음으로 접근한 건 아니었네.”
자기가 만든 스크램블드에그를 숟가락으로 퍼먹으면서 김강이 중얼거렸다. 어제 열변을 토했던 유노을이 좀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머쓱해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아침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는 내가 했다.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벌써 매니저 형한테 연락이 온 건가 싶어서 확인하자 정우진이었다.
“여보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어어, 괜찮아.”
혹시 예능 때문에 전화한 건가? 안 그래도 나도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어서 마침 잘됐다 싶었다.
-아침 드셨어요?
“응, 방금 먹었어.”
-아……. 그럼 점심은요?
“점심? 점심은 이제 나중에 먹겠지?”
-그럼 점심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사 드리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제가 살게요.
밥을 사 준다는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같이 출연할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서 하자고 돌려서 하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몇 시에 볼까?”
-한 시간 뒤에 볼까요? 선배님 준비하시고 해야 하니까……. 저는 지금 당장도 괜찮아요.
그 말에 나는 벽걸이 시계를 확인했다. 한 시간 뒤라고 해 봐야 오전 열 시인데……. 점심을 먹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아니면 그냥 카페에 가자는 소린가? 아무튼 언제 보든 별로 상관이 없어서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 아직 안 씻어서, 그럼 씻고 보자. 내가 씻고 연락할게.”
-네,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자 유노을이 내게 물었다.
“어디 나가?”
“어, 세가온이 잠깐 만나자고 해서. 예능 때문에 할 말 있나 봐.”
“선크림.”
“어?”
“선크림 바르고 나가.”
답답하고 끈적거려서 싫었지만 도끼눈을 뜨고 있는 걸 보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씻고 나와서 대충 머리를 말리고 반팔 티와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슬쩍 문 쪽을 보니 유노을이 마치 나를 감시하듯 팔짱을 낀 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조금 전 김강에게 받았던 선크림을 손바닥에 쭉 짰다.
그리고 대충 비벼서 얼굴에도 바르고 목에도 바르고 팔뚝에도 슥슥 발랐다.
“됐지?”
“턱에 덜 발랐어.”
그 말에 나는 턱을 벅벅벅 문지르고 말했다.
“됐지?”
유노을은 마치 결점을 찾아내는 로봇처럼 가까이에서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겨우 허락을 받고 정우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디로 갈까?]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저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냥 나오시면 돼요.]
문자를 보며 알겠다고 하려다 멈칫했다. 내가 우리 숙소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줬었나? 아니면 매니저 형한테 물어보고 온 건가? 근데 언제부터 기다린 거지?
“마스크도 가지고 나가.”
고개를 돌리자 이진혁이 내게 마스크를 내밀었다. 그걸 받으며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어, 갔다 올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촬영하기 전부터 괜히 구설수에 오르면 안 되니까.”
“알았어.”
“잘 갔다 와!”
거실에 앉아서 미숫가루를 마시고 있던 김강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똑같이 손을 흔들어 준 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거의 뛰다시피 걸어 골목길을 내려가자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차 근처로 다가가기도 전에 문이 열리면서 정우진이 나왔다.
“…….”
“선배님!”
나는 빠른 걸음으로 가다 말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정우진은 마스크도 끼지 않은 맨얼굴로 나를 보며 양손을 높이 들어 흔들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어.”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가볍게 손을 들었다 내렸다. 그리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서 앞좌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정우진도 운전석에 타며 인사를 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근데 너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아?”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그래? 근데 너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왔으면 전화를 하지.”
내 말에 정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 눈웃음을 치면서 수줍어하는 모양새가 좀 이상해서 더 물어보기가 좀 뭐했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너도 들었지? 우리 예능…….”
말을 하다 말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정우진이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안전벨트를 해 주는 게 아닌가.
“……?”
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카 시트에 등을 바짝 붙이고 돌멩이처럼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안전벨트에서 달칵 소리가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황당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방금…….”
“혹시 평소에 차 타면 안전벨트 안 하세요?”
“뭐? 아니? 하지. 하는데?”
나도 당연히 차 타면 안전벨트를 먼저 하는 편이기는 한데 내 손으로 직접 하지 그걸 누가 대신 해 준 적은 없었다.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
“선배님, 혹시 들으셨어요? 저희 예능 프로그램 같이하기로 한 거요.”
“…….”
여전히 얼이 빠져서 나는 눈만 깜박거리면서 정면을 주시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정우진이 내 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어, 아침에 들었어. 좀 전에.”
“뭐 하는 프로인지 들었어요?”
“아니, 그거까지는……. 넌 알아?”
안전벨트를 도대체 왜 해 준 건지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지금 와서 다시 묻기도 어색했다. 그냥 되게 친절한 성격인가 보다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혹시 예능 중에 그런 거 아세요? 산속이나 한적한 시골에 가서 밥 해 먹고 낚시도 하고 그러는 거요. 밭에서 채소 따서 그걸로 음식 만들어 먹고…….”
“어, 알아. 그런 비슷한 거야?”
“네, 저도 듣기만 했는데 그런 거래요. 송철 피디님 아시죠? 몇 년 전에 방금 말한 시골에서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연출하셨던 분인데, 이번에 파일럿으로 촬영하시나 보더라고요.”
송철? 송철이. 정말 내가 아는 그 송철이 맞다면 3, 4년 전까지만 해도 예능 쪽에서는 제법 유명한 피디였다. 근데 내가 왜 캐스팅이 된 거지?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그냥 회사에서 소개시켜 준 건가?
“그분이 출연자 쥐어짜기로 유명하기는 한데 이번 프로그램은 그런 쪽이 전혀 아니래요. 괜찮으시죠?”
그 말에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철 피디는 정우진이 말했던 것처럼 출연자를 쥐어짜기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좀 전에 말했던 시골 예능에서는 게임에서 이겨야지만 밥을 주고 잠자리도 마련해 줬는데 한 번은 출연자가 게임을 전부 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출연자는 하루 종일 굶고 한겨울 영하 20도 날씨에 텐트를 치고 밖에서 자야만 했다.
그게 정말 리얼인지 아닌지 출연자와 관계자들만 알겠지만, 어쨌든 그 일 이후로 즐겁자고 보는 예능이 너무 가학적이라는 말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서 송철 피디는 사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이후로 예능 트렌드도 힐링이나 관찰 쪽으로 바뀌면서 프로그램은 점점 인기가 떨어졌고 자연스럽게 종영했다.
어떻게 보면 파일럿이긴 하지만 이게 복귀작인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날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