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90)

14화

나는 정우진이 차에서 내려 똑바로 서는 걸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크 하나 쓴다고 저 얼굴이 가려질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꼭 얼굴이 아니라도 다리도 너무 길고 키도 꽤 커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목을 집중시켰다.

“빨리 사서 가자.”

사람들이 알아보기 전에 얼른 사서 가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정우진이 내 뒤를 쫓아왔다.

딸랑.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맑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할머니 한 분이 안쪽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인사를 했다.

“아이고, 오랜만에 오셨네.”

“네, 오랜만이죠. 호두파이 사러 왔어요. 별일 없으셨죠?”

내가 반가워서 말하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열대의 문을 열고 호두파이를 꺼냈다.

“늘 똑같지요, 뭐. 몇 개 드릴까요?”

“음, 두 개?”

정우진을 보면서 말하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서비스는 어떤 걸 드릴까,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시니까 이거 잡숴 보실래요? 단호박 찐 거랑 밤만 좀 들어갔고, 설탕은 정말 조금밖에 안 넣어서 고소한 크럼블인데.”

“서비스 안 주셔도 괜찮아요. 그럼 그것도 같이 계산할게요.”

“아니에요, 이건 단골 고객님한테만 드리는 거니까 한 번 드셔 보시고 맛있으면 다음에 사 드셔요. 단호박도 있고, 흑임자도 있는데 어떤 걸로 드릴까?”

“그럼 단호박 주시고 흑임자도 같이 주세요. 흑임자는 호두파이랑 같이 계산할게요.”

“아휴, 서비스 주려고 했는데. 고마워요.”

할머니가 짙은 초록색 종이봉투에 호두파이 두 개와 크럼블 두 개를 넣었다. 그때 다시 딸랑 하는 소리가 나면서 손님이 들어왔다.

“여기 빵이랑 파이 다 전부 맛있다니까?”

“케이크도 있나?”

“케이크는 없고 빵 종류랑 파이만 있어.”

“어서 오세요.”

대화를 하며 들어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한 할머니가 내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14,300원인데 14,000원만 주세요.”

“아, 선배님. 계산 제가…….”

“혹시 비비 세가온 님 아니세요?”

“헐, 대박.”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봤다. 방금 전에 들어온 손님들이 어느새 정우진 주변으로 다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나는 조금 급한 동작으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과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와, 저 살면서 연예인 처음 봐요! 혹시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같이 찍어 주시면 안 돼요?”

“핸드폰, 핸드폰.”

“저 사람 혹시 연예인이에요?”

할머니가 천 원짜리 지폐를 내게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할무니.”

“응?”

“저도 연예인이에요…….”

“진짜? 가수? 연기자?”

“가수요. 아이돌이에요.”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으면서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아유, 어쩐지 인물이 훤칠한 게 너무 잘생겼더라. 내가 테레비를 잘 안 봐서 몰랐네. 유명한 사람이었구나.”

“별로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서비스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다음에 또 오세요. 또 오면 서비스도 많이 줄게요.”

계산을 끝내자 사진을 다 찍은 것 같은 정우진이 내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제가 사려고 했는데…….”

“괜찮아. 사진 다 찍었어? 나가자, 이제. 안녕히 계세요.”

내가 할머니를 보며 인사하자 정우진도 인사를 했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조금 전 들어온 손님이 우리를 따라 밖으로 같이 나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찰칵 하는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뒤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에 타면서 슬쩍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설마 또 이상한 소문나는 거 아니겠지…….

신경이 그쪽으로만 다 쏠려 차에 타서 힐끗힐끗 사람들이 있는 곳을 보고 있는데 눈앞으로 팔이 쑥 나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또 내 안전벨트를 해 주고 있었다.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로 당한 일인데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라 또 그대로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이럴 때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을 쓰는 거겠지? 나는 황당한 얼굴로 자기 안전벨트를 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원래 그렇게 옆에 사람이 타면 네가 안전벨트를 직접 해 줘?”

나를 바라보는 정우진의 표정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순진무구했다. 버릇처럼 하는 행동인 것 같지만 솔직히 좀 불편해서 다음에는 내가 한다고 말하려 하는데 정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요.”

“어?”

“옆에 누굴 태워 본 적이 없어서.”

“아…….”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앞을 바라봤다.

“…….”

“…….”

……뭐지? 뭔가 기분이 이상한 와중에 침묵이 흘렀다. 도저히 이 정적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다시 정우진을 보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럼 내가 처음이네?”

“네.”

“하하, 영광이네.”

차가 움직여서 다시 앞을 봤다.

다시 정적이 흘러서 나는 허벅지 위에 둔 애꿎은 종이봉투만 구겼다 폈다 만지작거렸다.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계속 듣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제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뭐 얼마 한다고. 괜찮아.”

“그래도 이번에는 제가 사 드리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뭘 죄송까지 해. 호두파이 지금 먹을래?”

종이봉투를 열어서 파이를 꺼내며 물었다. 크럼블도 그렇고 호두파이도 그렇고 먹으면서 부스러기가 많이 떨어질 것 같아 혹시 물티슈가 있나 찾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뭐 찾으세요?”

“물티슈 있어?”

“아, 제가 마실 거랑 같이 사 올게요. 저기 편의점 있어요. 선배님, 커피 드실 거죠? 잠시만요.”

급하게 말하면서 안전벨트를 푸는 정우진을 보다가 나는 놀라서 물었다.

“네가 간다고? 아니, 내가 갔다 올 테니까…….”

“금방 갔다 올게요.”

나도 내리려고 했는데 무릎 위에 파이랑 크럼블이 있어서 정우진보다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꺼내 놓은 걸 다시 봉투 안에 넣고 있는데 어느새 정우진이 시동도 끄지 않고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야! 마스크!”

내 말에 정우진이 턱으로 내려놨던 마스크를 날 보면서 올렸다. 눈매가 휘어지는 걸 보니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간절히 말했다.

“빨리 와. 멀리 가지 말고.”

“네.”

차 문이 닫히고 정우진이 횡단보도가 없는 좁은 길목을 건너는 게 보였다. 편의점 바로 옆에는 작은 테이크아웃 카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주문을 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조금 더 기다리자 정우진이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 뒤로 네다섯 명의 사람이 함께 나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정우진의 뒤를 쫓았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한 손에는 봉지를, 한 손에는 커피를 든 정우진이 다시 길목을 건너 이쪽으로 오려고 할 때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나는 얼른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운전석 쪽으로 뻗어 차 문을 열어 줬다.

“어떡해, 진짜 세가온이야.”

“오빠! 사랑해요!”

“진짜 팬이에요. 사진 한 번만 찍어 주세요.”

“사인 하나만 해 주시면 안 돼요?”

“가온아, 이쪽 한 번만 봐 줘!”

정우진이 차를 타면서 내게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워낙 겹치는 말이 많아서 거의 듣지도 못했다. 다행히도 사람들이 차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거나 문을 잡지는 않아서 금방 문을 닫자 소란스럽던 소리도 멈췄다.

“아이스아메리카노 샷 세 번 추가한 거 맞죠?”

“어, 맞아.”

“물티슈랑 그냥 티슈랑 혹시 몰라서 물도 사 왔어요. 그리고 폴라포 포도 맛이랑 선배님 꼬깔콘 좋아하셔서 그거랑…….”

차가 출발하자 사람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려 순식간에 모여든 사람들이 점점 작아지는 걸 보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유명한 연예인의 삶이라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거구나.

신기함과 대단함이 뒤섞인 눈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봉지 안을 살피니 과자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쥐포와 생수, 물티슈 등 잡다한 것들이 보였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다른 것도 필요하실까 봐…….”

안주용 땅콩까지 있어서 너무 웃겼다. 내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듯 웃자 정우진이 물었다.

“왜요?”

“혹시 술은 안 사 왔냐?”

“술이요? 지금 다시 갔다 올까요?”

“아니, 사 오라는 게 아니라. 이건 왜 샀어?”

내가 땅콩을 들고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님 그거 안 좋아하세요? 그럼 제가 다 먹을게요.”

“아니야, 좋아해.”

“…….”

봉지 안쪽을 다 확인한 나는 일단 아이스크림 먼저 꺼냈다. 벌써 조금 녹았는지 겉이 축축했다. 정우진이 사 온 티슈로 손잡이 부분을 감싸고 껍질을 뜯자 보라색 아이스크림이 보였다.

“네 건 안 사 왔어?”

“아, 네.”

“커피도 하나밖에 안 사 왔네. 넌 아이스크림이랑 커피 안 좋아해?”

먹지도 않는 걸 나 때문에 사 온 게 미안해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좋아해요.”

“근데 왜 하나밖에 안 샀어?”

“다음에는 제 것도 사 올게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이스크림을 위로 빼서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작은 얼음 알갱이가 씹히면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아이스크림 맛있네.”

“또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사 올게요.”

“…….”

나는 앞을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씹다가 생각에 빠졌다. 왜냐면 정우진의 화법이 계속 이상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행동도 그렇고 말투도 좀……. 뭐라고 해야 할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너무 극진한 존댓말이라서 그런가? 보통 뭘 사 올 때 자기 건 안 사고 내 것만 사 오는 것도 그렇고, 안전벨트도 그렇고, 뭔가 그런 게 좀……. 내가 꼭 엄격하고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었다. 아직도 많이 어렵나?

그러고 보니까 인별에 댓글 달 때는 잘도 형이라고 하더니 만나니까 또 선배님이라고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직 내가 어렵기는 한 모양이었다.

“선배님, 과자도 드세요.”

“어, 너도 호두파이 먹어. 내가 포장 벗겨 줄까? 아니면 어디 근처에 차 세울 곳 없나?”

“외곽으로 빠질까요? 제가 가끔 가는 드라이브 코스 있는데 일단 그쪽으로 갈게요.”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근데 우리 왜 만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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