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90)

17화

한참 자고 있는데 귓가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휴,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소식을 듣네.”

“나한테는 당신이 부모도 형제도 없는 고아라고 했잖아.”

“고아나 다름없었지.”

“그래도 참 다행이네. 평생 서로 소식도 모르고 살다가 죽기 한 달 전에 이렇게 딱 연락이 닿아서. 조상신이 도왔네, 도왔어.”

서서히 정신이 들기 시작하자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윽……. 흑, 허어엉…….”

“아이고, 깼나 보다.”

“빨리 간호사 불러, 간호사.”

눈을 뜨기가 무서울 정도로 아파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목 놓아 우는 것밖에 없었다.

***

그날은 가족끼리 외식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가까운 곳만 갔는데 아빠가 오리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좀 먼 곳으로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가 났다.

엄마랑 아빠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나는 타박상만 입고 살아남았다. 의사 선생님도, 간호사도 처음 보는 삼촌과 숙모도 천만다행이라고 했는데, 이게 정말 다행인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도 못 사겠네. 아휴, 그럼 그렇지. 팔자 좀 피나 했더니.”

“그래도 이게 어디야? 뭐, 땅 파면 이만한 돈이 나와? 집 팔고 이거저거 하면 그래도 좀 되니까 이걸로 우리도 이사나 가자. 안에 가구는 쓸 만한 거 우리가 쓰고. 냉장고 좋던데?”

“당장 쓸 현금이 있어야지. 현금 좀 꿍쳐 둔 건 없나?”

“없어, 없어. 통장에도 푼돈만 있고. 최근에 아파트 대출금은 다 갚은 것 같던데 그거 때문인가? 그래도 우리한텐 좋은 거야. 이거 대출금 남아 있었으면 뭐 건질 것도 없었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삼촌과 숙모라며 내 후견인이 되었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사람들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삼촌이고 저기 저 사람이 네 숙모다. 그리고 얘는 네 사촌 형인 수민이고. 서로 인사하고 사이좋게 지내. 강수민, 동생한테 인사해. 얘는 앞으로 우리랑 같이 살게 될 서주다, 강서주. 네 사촌 동생.”

“아빠, 이제 내 방 생기는 거야?”

“그건 나중에 말하고 일단 인사나 해, 빨리.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근데 얘는 왜 말을 안 해. 병원에서 이상 없다고 한 거 맞지? 목소리 한 번을 안 들려주네.”

내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질 않자 숙모가 내 어깨를 잡아 돌리며 말했다. 마치 하자가 있는 상품을 검사하듯 몸을 휙휙 돌리고 턱을 잡고 양옆으로 움직이다가 물었다.

“서주야, 너 들리기는 하니?”

“아휴, 그냥 냅둬. 애미 애비가 죽었는데 그럼 멀쩡해?”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됐는데 애가 뭘 안다고.”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그걸 모르겠어? 아무튼 자기가 말할 때까지 너무 재촉하지 말고 가만히 좀 내버려 둬. 자기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겠지.”

“아빠! 내 방 생기면 책상도 사 줘!”

사람들의 말소리가 허공에서 뒤죽박죽 실타래처럼 엉켜서 내 귀로 들어왔다. 분명히 듣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도 되지 않고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아서 눈을 감고 귀를 손으로 꽉 막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얜 또 왜 이래?”

“충격 받아서 그렇다니까. 재워, 그냥.”

도대체 엄마랑 아빠는 언제 나를 데리러 오는 걸까? 그 의문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

“형, 형.”

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진혁도 놀랐는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내게 물었다.

“무슨 꿈을 꾸길래 그렇게 식은땀을 흘려?”

“어? 아니……. 왜?”

“저녁 먹을 건지 물어보려고 깨웠지. 집엔 언제 왔어?”

“아…….”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7시였다.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저녁 먹어야지. 애들 다 왔어?”

“응, 다 왔지. 어디 아픈 거 아니지?”

“괜찮아. 뭐 먹어?”

일어나니까 배가 좀 고픈 것 같기도 해서 밖으로 나가자 유노을이 날 보고 주춤하더니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형, 혹시 세수할 때 클렌징 오일 안 썼어?”

“그게 뭔데?”

“아, 어쩐지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얀가 했네! 안 지워졌잖아!”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냥 가만히 있자 이진혁이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노을아, 서주 형 안 씻어서 하얀 게 아니라 악몽 꿔서 창백한 거야.”

“악몽? 무슨 악몽?”

둘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닿았다. 나는 손을 저으면서 대꾸도 하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아서 뭘 찾고 있는 김강에게 물었다.

“뭐 찾아?”

“여기에 비빔라면 넣어 놨는데 왜 안 보이지?”

“그거 거기 말고 위에 봐봐. 라면 먹게?”

“귀찮은데 그냥 라면 끓여서 대패삼겹살이나 구워 먹자.”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서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 먹은 게 별로 없었다. 아침은 간단하게 샐러드 먹고 정우진이랑 아이스크림 먹고……. 그거밖에 먹은 게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삼겹살을 먼저 구우려고 냉동실을 여는데 이진혁이 말했다.

“삼겹살 찾아? 그거 냉장실에 있어. 아까 집에 올 때 사 온 거라.”

“형, 선크림은 그냥 씻어서 안 지워지니까 클렌징 오일 꼭 써야 돼. 어?”

“알았어, 삼겹살 얼마나 구울까? 이거 하나밖에 없어? 아, 두 개네. 이거 다 구우면 되겠지?”

1kg 대패삼겹살 두 개를 꺼내면서 묻자 이진혁이 삼겹살을 빼앗아 가며 말했다.

“내가 구울 테니까 형은 노을이한테 기름 설명이나 들어.”

“…….”

음식 만들 때 몇 번 실패 좀 했더니 그 뒤로 내가 뭐만 하려고 하면 이런 식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드레싱 때문에 그러더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비빔라면 세 묶음을 꺼내는 김강과 제일 큰 프라이팬을 꺼내는 이진혁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유노을이 내 팔뚝을 잡아당겼다.

“이리 와 봐.”

“왜? 클렌징 오일인지 그거 쓰라고? 알았어, 내일부터 쓸게.”

“지금 세수 새로 해. 형 진짜 그러다가 촬영할 때 피부 뒤집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

나는 영혼을 잃은 눈으로 유노을에게 질질 끌려가 클렌징 오일의 사용법과 아이돌이라는 자각이 없음에 대해 잔소리를 한참 들어야만 했다. 꼼꼼하게 세수를 끝마치고 나오자 벌써 거의 다 한 건지 식탁 위에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형, 스킨이랑 로션!”

홀린 듯이 식탁 쪽으로 가고 있는데 유노을이 어느새 내 뒤에 따라붙으며 말했다. 밥 먹고 바른다고 해 봤자 또 잔소리할 게 뻔해서 그냥 얌전히 방으로 들어갔다.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밖으로 나오자 커다란 냄비에 쌓인 비빔라면과 대패삼겹살이 보였다.

상추를 잘라 넣고 같이 비벼서 그런지 양이 꽤 많아 보여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라면 몇 개 끓였어?”

“몰라, 강이가 끓였어.”

“열두 개?”

“……삼겹살도 2kg 다 구운 거 아니야?”

내 물음에 이진혁이 집게로 앞접시에 라면을 하나씩 덜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맛있겠다.”

유노을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걸 보며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조금 전에 선크림 바르고 클렌징 오일 안 쓴 게 아이돌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잔소리를 들었는데 한 끼에 네 명이서 비빔라면 12개, 대패삼겹살 2kg 먹는 건 아이돌다운 행동일까? 그것도 저녁인데…….

“잘 먹겠습니다!”

유노을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앞접시에 쌓인 양이 내 것보다 두 배는 많아 보였다. 덩치는 우리 중에 제일 작은데 먹는 건 김강 다음으로 잘 먹었다. 그래도 못 먹는 것보다는 잘 먹는 게 낫기는 했다.

면이랑 대패삼겹살이라 그런지 먹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금방 먹고 설거지는 내가 하고 있는데 김강이 내 옆으로 오더니 물었다.

“형, 근데 아까 악몽 꿨다며? 무슨 꿈 꿨어? 혹시 꿈에 노을이 형 나왔어?”

“야, 내가 나오는데 그게 왜 악몽이야? 꿈에 내가 나오면 로또를 사야지!”

“노을이 형이 꿈에서 또 막 얼굴에 기름 발라서 씻으라고 잔소리한 거 아니야? 아까 진짜 얼굴 좀 창백하던데.”

유노을이 식탁을 닦고 있던 행주를 김강에게 던졌다. 둘은 다시 티격태격하면서 싸우기 시작했고 나는 둘의 싸움 소리를 배경 음악처럼 들으며 설거지를 끝냈다.

이진혁은 씻으러 들어갔고, 나는 스트레칭이나 좀 해야겠다 싶어 거실로 가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정우진에게 온 문자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혹시 비빔국수 좋아하세요?]

“…….”

어쩐지 말투가 아까보다 더욱 깍듯해진 것 같다고 느낀다면 그건 내 기분 탓일까? 안 그래도 아까 그렇게 와서 마음에 걸렸는데 말투까지 이러니까 더 미안해졌다.

나는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며 전화를 했다. 신호음 한 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저녁은 먹었어?”

-저녁이요? 아니요, 아직 안 먹었어요. 선배님은요?

“난 방금 먹었어. 근데 비빔국수는 갑자기 왜?”

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님 인별 보다가 비빔국수 사진이 있기에 궁금해서 연락드렸어요.

그 말에 나는 뭐라고 하려다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깍듯했던 문자와는 달리 너무 별것도 아닌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좀 황당해서 허탈하게 웃자 정우진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무슨 비빔국수 얘기하는데 그렇게 문자를 정중하게 보내?”

-아…….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

“괜찮으니까 그냥 편하게 보내. 그리고 말투도 그렇게 너무 막…… 불편하게 안 그래도 돼. 우리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네.

어쩐지 수줍어하는 듯한 목소리에 다시 말문이 막혀서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비빔국수 좋아하지. 면은 그냥 딱히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어. 아까도 비빔라면 먹었고……. 그건 왜?”

-저희 같이하는 예능 때문에요. 음식도 만들어서 먹어야 하는데 선배님 좋아하시는 걸로 하려고 여쭤봤어요.

“…….”

선배님을 선생님이라고 바꿔도 위화감이 없어 보이는 문장이었다. 앞으로 같이 촬영도 해야 할 텐데 정우진이 날 많이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긴 했지만, 이런 게 또 편하게 하라고 해서 편해지는 게 아니니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언젠가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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