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90)

46화

새벽에 잠이 들어 그런지 평소보다 좀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더듬더듬 팔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한쪽 눈만 뜨고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눈을 크게 떴다.

문자 31통, 부재중 전화 4통.

문자와 전화 전부 중에 하나 빼고는 다 정우진에게 온 것이었다. 잠들기 전에 무음으로 해 놔서 이렇게 문자며 전화가 많이 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나는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부터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올해 MD엔터에 입사한 신입 매니저 박준오라고 합니다. 통화가 되지 않아 문자로 남깁니다. 오늘 방송국에 송철 피디님 뵈러 가신다고 들었는데 확인차 전화 드렸구요. 11시까지 숙소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매니저 형이 그만두고 새로 온 사람인가? 깍듯한 문자를 보다가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먹고 씻고 준비를 하면 얼추 시간은 맞을 것 같았다.

좀 뒹굴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 정우진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얘 내 방에 CCTV라도 달아 놓은 거 아니야? 매번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힌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이 잔뜩 잠겨 있어서 작게 헛기침을 하고 있는데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네, 선배님. 지금 일어나셨어요?

작게 떨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침대에 누워 버렸다.

“어, 방금.”

-아, 그러셨구나. 저는 계속 답장도 안 보내 주시고 전화도 안 받으셔서 제가 어제 실수라도 한 줄 알았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넌 도대체 왜 이렇게 소심하냐?”

저번에도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때 정우진은 정색을 하면서 극구 부인하더니 이번에는 정색하면서도 동조했다.

-좀 그런 편이니까 앞으로는 주의해 주세요.

“문자 답장도 잘 하고 전화도 꼬박꼬박 잘 받으라고?”

-네, 아니면 계속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잔단 말이에요.

“알았어, 인마.”

퉁명스러운 말에 맞장구를 쳐 주다가 물었다.

“근데 전화는 왜 했어?”

-아, 기사 난 거 보셨어요?

“기사? 무슨 기사?”

-저희 방송하는 거 벌써 기사 났더라고요. 프로그램명이 오두막집 남자들이래요.

오두막집 남자들? 오두막에서 막 뭘 하는 건가? 정확하게 뭐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목도 그렇고 왠지 내 예상대로라면 산속 오두막집에서 자급자족하는, 그런 예능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매니저한테 연락 받으셨어요? 오늘 피디님 뵈러 가시죠?

“아, 어. 문자 와 있더라.”

-피디님이 말씀해 주실 텐데, 저희 사전 미팅은 내일 한대요. 이미 기사 나가서 어쩌면 그때 기자들도 많이 올 수 있어요.

무슨 사전 미팅을 하는데 기자가 오는 거지? 난생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주변이 좀 시끄러운 것 같아 물었다.

“근데 너 지금 밖이야?”

-아, 네. 오늘 화보 촬영 있어서 지금 밖이에요.

“아, 그래? 그럼 이제 끊자. 일해야지.”

-선배님, 저 이제 곧 끝날 거 같은데 점심 같이 드실래요?

그 말에 나는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곧 끝나는 거라면 이른 아침부터 촬영했다는 건데 얘는 피곤하지도 않나? 스케줄도 있는데 그럼 어제저녁에 그렇게 늦게까지 영화를 본 거야?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혹시 피디님이랑 식사하시는 거면 저녁도 괜찮아요. 일정 끝나면 연락해 주세요. 아니다, 제가 틈틈이 문자 보낼게요.

점심이든 저녁이든 사실 밥 먹자는 걸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어서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그러든가, 뭐……. 혹시 촬영 늦게 끝나거나 그러면 다음에 먹어도 되니까 말해. 무리하지 말고.”

-네!

정우진이 들뜬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하는 걸 들으니 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 봐.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

내 말에 또 힘차게 대답할 줄 알았는데 정우진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한참 있다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네…….

도대체 왜 두 번의 대답에 이렇게 차이가 생긴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민망해져서 나는 헛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너무 비싼 건 안 되니까 적당한 걸로…….”

장난처럼 말하자 정우진이 그제야 웃었다.

-저번에는 비싼 걸로 사 주신다면서요.

“왠지 네가 생각하는 비싼 금액이랑 내가 생각하는 비싼 금액이 다를 거 같은데 어떡하지? 일단 카드 한도 좀 확인해 볼게…….”

한숨을 푹 쉬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다시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농담이에요. 그럼 숙소 앞에 김밥 천국 갈까요? 저는 김밥 한 줄만 먹어도 배불러요. 기본 김밥 먹을게요.

웃음기 섞인 말에 당연히 장난인 줄 알았는데, 왠지 말을 하면 할수록 진짜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아서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나도 농담이었어.”

-저 진짜 괜찮아요. 뭘 먹든 메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아니, 나 그 정도는 아니야……. 아무튼 그냥 웃자고 한 소리니까 진짜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봐.”

애 앞에서는 장난도 제대로 못 친다더니, 지금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럼 돈가스는 어때요? 저번에 선배님이 연습실에서 돈가스 시켜 먹었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거 먹어 보고 싶어요.

“…….”

정우진의 말에 나는 너무 당황해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다음에 또 사 줄 테니까 정말 오늘은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 내가 괜한 말을 해 가지고…….”

-네? 아니에요, 저 진짜 돈가스 먹고 싶어서 그래요. 저 배달 돈가스는 한 번도 안 먹어 봤단 말이에요.

그 말에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뭐? 돈가스를 안 먹어 봤다고?”

-돈가스는 먹어 봤는데 배달시켜서 먹어 본 적은 없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또 갑자기 엄청나게 맛있는 돈가스를 먹여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배달은 좀 아닌 것 같아서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럼 배달시키지 말고 음식점 가서 먹자. 너 어떤 스타일 좋아해?”

-……네? 갑자기요? 저는…… 연상이요. 그리고 다정하고…….

“뭐? 아니, 너 경양식 좋아하냐고, 일본식 좋아하냐고.”

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서 말을 끊고 다시 묻자 정우진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저는 아무거나 다 좋아해요.

“둘 중에 뭐 먹어 봤는데?”

-일본식이요. 경양식이 소스 뿌려져서 나오는 거 맞죠?

“어, 너 그거 안 먹어 봤어? 그럼 이번에 경양식 먹어 볼래? 너 탕수육 먹을 때 부먹으로 먹어 봤지? 그거처럼 살짝 눅눅한데 소스가 튀김옷에 싹 스며들어서 경양식도 맛있어.”

말하다 보니까 갑자기 배가 고파져 침을 삼키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선배님은 뭘 더 좋아하세요?

“난 둘 다 좋아하는데……. 굳이 꼭 하나만 골라야 하면 경양식?”

-그럼 그걸로 먹어요. 그리고 저도 선배님이 연습하는 연습실에서 먹어 보고 싶은데 그냥 배달시켜서 먹으면 안 돼요?

연습실에서 먹든 집에서 먹든, 배달시켜 먹는 건 어차피 다 똑같은데 왜 굳이 거기서 배달을 시키자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계속 안 된다고 하기에는 좀 뭔가 이상해서 하는 수 없이 말했다.

“알았어, 그럼……. 대신 다음에는 일본식 돈가스 사 먹으러 가자.”

-좋아요. 그럼 선배님이 돈가스 사 주시면 제가 영화 보여 드릴게요. 그리고 선배님이 커피 사 주시고 저녁에는 제가 술 살게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말을 듣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이제 씻고 나가 봐야 해서 끊어야 돼.”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제가 문자 보낼게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시구요.

무슨 일이 생길 게 뭐가 있겠냐 싶었지만 이걸 물어보면 또 정우진이 구구절절 말할 것 같아서 그냥 대충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목을 꺾으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거실로 나오자 유노을이 물었다.

“오늘 피디 만나러 가? 새로 온 매니저라고 나한테 전화 왔던데? 형 전화 안 받는다고.”

“아, 맞다. 매니저 형 그만둔 거 들었어?”

“어, 아까 들었는데. 뭐, 집안일 때문이라고 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인사 한마디도 없이 그렇게 가 버리냐.”

평소에 매니저 형 욕을 제일 많이 했던 유노을도 좀 섭섭하긴 한 건지 투덜거렸다.

“전화해 보니까 번호도 없는 번호래.”

“……뭐 엄청 큰일 난 건 아니겠지?”

내가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묻자 유노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모르지, 뭐……. 아무튼 오늘 피디 만나러 가는데 동네 마실 나가는 것처럼 입지 말고 좀 차려입고 나가.”

그 말에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유노을이 조금 전 정우진처럼 혼자 북 치고 장구를 치더니 결론을 내려 버렸다.

“아, 또 형 깔끔하고 단정하게 입는다고 하얀색 티셔츠랑 청바지 입으려고 그랬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골라 줄 테니까 그걸로 입고 나가. 그리고 오늘 아침에 비가 와서 좀 쌀쌀하니까 뭐 걸치고 나가야 돼.”

“…….”

“일단 씻고 나오고, 밥부터 먹자. 빨리 씻어.”

뭐라고 대꾸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을 해 봤자 별로 통할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씻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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