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90)

49화

회사에 도착하자 박준오는 내가 연습실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 인사를 하고 나갔다.

정우진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서 연습실 바닥에 엎어져 있으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옷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누워 있지는 못하고 그냥 대충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켰다.

[잘나가는 아이돌이랑 방송 하나 같이 잡혔다고 아주 기고만장해서ㅋㅋㅋ 찾아보니까 이거 파일럿이드만ㅋㅋ 정규 방송으로 편성 된대?]

[만약 된다고 해도 그게 너때문이겠냐?]

[씹어??? 내가 좋게 말하니까 상황파악이 안되지?]

[좋게 말할때 답장해라 후회하기 싫으면ㅋ]

잠깐 안 본 사이 문자가 또 한가득 와 있었다.

잠시 차단을 할까 고민도 했지만 이 새끼가 어디서 술 처먹다가 비명횡사하면 인간된 도리로써 장례는 치러 줘야 할 것 같아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문자를 무시하고 핸드폰으로 퍼즐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불편했다. 나중에 돈가스 먹을 때도 바닥에 앉아서 먹어야 할 텐데…….

그때 얼마 전에 김강이 연습할 때 입으려고 사 놨던 운동복이 떠올랐다. 계속 깜빡해서 숙소에 가져가지도 못하고 여기 어디에 짱박아 놨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나는 연습실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운동복을 발견했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바지를 벗고 비닐을 뜯어 시커먼 보자기처럼 커다란 바지를 꺼냈다. 그리고 다리를 끼워 넣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문이 쾅 하고 커다란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형!”

조용하다가 갑자기 크게 들리는 소리에 너무 놀라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건 코뿔소처럼 문을 열고 돌진하던 정우진도 마찬가지였다.

“…….”

“…….”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나는 다리를 마저 끼우며 물었다.

“왜? 뭔데? 무슨 일 있어?”

“…….”

바지를 다 입고 정우진에게 다가가려는데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던 정우진이 그대로 뒷걸음질 치다가 열고 들어온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

너무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을 멀뚱멀뚱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지가 우리 팀 최장신 헬창 김강의 것이라 그런지 너무 커서 걸을 때마다 줄줄 밑으로 흘렀다. 하는 수 없이 한 손으로 허리춤을 붙잡고 문 쪽으로 가서 천천히 문을 열었다.

“…….”

“…….”

문을 열자 정우진이 바로 옆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말도 못하게 빨개져 있었다. 귀랑 목도 빨갛고 반팔을 입어서 팔까지 빨개진 게 다 보였다.

혹시 옷 갈아입었던 거 때문에 그런가?

평소에 멤버들이랑은 그냥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훌렁훌렁 벗고 옷도 갈아입고, 심지어 유노을은 샤워한 후 벌거벗고 나온 적도 꽤 있어서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다가 아차 싶었다.

정우진은 선머슴 같은 우리 애들이랑 다르게 섬세하고 감수성도 풍부한, 마치 문학 소설 속 소년 같은 애였으니까…….

“아니, 옷이 불편해서 갈아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어올 줄 몰랐네.”

황급히 변명하듯 말하자 정우진이 슬쩍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홍당무처럼 변한 얼굴과 촉촉하게 젖은 검은색 눈동자를 보니 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목을 긁다가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급하게 들어와? 무슨 일 있어?”

정우진이 내 물음에 뭔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다치셨다면서요?”

“뭐? 준오가 그래?”

겨우 그거 때문에? 혹시 박준오가 호들갑을 떨면서 과장되게 말했나 싶어서 묻자 별안간 정우진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준오?”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당황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 준오한테 들은 거 아니야?”

“……맞긴 한데……. 손은 괜찮으세요? 시계 유리도 깨졌다면서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정우진이 나를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왠지 너무 박력이 넘치는 눈빛이라 주춤하다가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책장에 있던 책이 떨어져서 쓸린 거야.”

“책장에서 책이 왜 떨어져요?”

“누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아무튼 진짜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진짜 진심으로 별것도 아닌 일인데 박준오도 그렇고 정우진도 그렇고, 왜 이렇게 다들 난리 블루스를 추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정우진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정우진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참 나를 보다가 내가 다친 손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런데 하필 그 손이 내가 바지를 잡고 있는 손이었다. 주춤한 정우진이 계속 허공에서 손을 바르작거리기만 해서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보여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반대쪽 손으로 다시 바지춤을 잡고 아까 부딪쳤던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봐, 멀쩡하지?”

정우진은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는 내 손을 심각한 얼굴로 보다가 물었다.

“나중에 멍드는 거 아니에요?”

그 잠깐 사이에 부딪친 곳이 색이라도 변했나 싶어 확인했지만 이미 붉은 기도 다 사라진 뒤였다. 그래도 혹시 내가 보지 못한 뭔가가 있을까 싶어 뚫어지게 손등을 살펴봤지만 역시나 그런 건 없었다.

“멍은 무슨 멍이야, 완전 멀쩡한데. 연습할 땐 이거보다 더 심하게 다친 적도 있어. 넌 연습할 때 삐끗하거나 그런 적 없어?”

“……급하게 오느라 약을 못 사 왔어요. 지금 나가서 사 올게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건지 정우진이 뒤돌아 가려는 걸 급히 붙잡았다.

“됐으니까 빨리 들어와. 돈가스나 먹자.”

안 그래도 바지 때문에 계속 서 있는 게 불편해서 들어가자마자 그 자리에 바로 앉아 버렸다. 정우진은 내 주변에서 한동안 서성거리다가 결국 내 옆에 앉았다.

“그래도 병원이라도…….”

“너 무슨 돈가스 먹을래?”

배달 어플을 켜면서 묻자 정우진이 내게 물었다.

“선배님은 뭐 드세요?”

“왜? 또 내가 먹는 거 따라 먹게?”

“그러면 안 돼요?”

정우진이 도리어 되물었다. 근데 또 생각해 보니까 딱히 안 될 건 없어서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말했다.

“되지……. 난 그냥 돈가스 먹을 거야. 왕돈가스.”

“그럼 저도 그거 먹을게요.”

“새우튀김도 시킬까?”

“네, 선배님 드시고 싶으시면 그것도 같이 먹어요.”

왕돈가스 두 개랑 새우튀김도 시키고 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뼈에는 이상 없는 거죠?”

걱정해 주는 건 알겠는데 걱정도 좀 적당히 해야지, 이쯤 되니까 혹시 얘가 날 놀리고 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저 비를 쫄딱 맞고 달달 떨고 있는 개 같은 눈빛을 보면 또 한숨밖에 안 나왔다.

나는 반대쪽 손으로 아까 다쳤던 손을 세게 주물럭거리면서 말했다.

“이래도 하나도 안 아파.”

“만져 봐도 돼요?”

그 말에 나는 만져 보라고 정우진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바로 덥석 잡아서 조금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물럭거릴 줄 알았는데, 정우진은 검지로 내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

순간 말문이 막혀서 멀거니 정우진을 보다가 물었다.

“뭐 하냐?”

“네?”

“뭐 하는 거야?”

“진짜 괜찮은 건가 해서…….”

정우진이 말끝을 흐리면서 다시 한번 내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살 건드리는지 닿는 느낌도 거의 없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기가 물어도 이것보다는 더 느낌이 나겠다.”

혼잣말처럼 말하자 정우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뭐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표정이었는데, 어색해 보이기도 했고, 곤란해 보이기도 한 아주 요상한 표정이었다.

그때 정우진이 검지에 힘을 주더니 내 손목에 툭 튀어나온 뼈를 꾹 누르기 시작했다.

“…….”

“…….”

조금 전 톡톡 건드린 것보다 한 다섯 배 정도는 강한 힘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밀리지 않으려고 힘을 주다 보니까 의도치 않게 뭔가 대치하는 그런 모양이 되었다.

정우진은 계속 꾹 누르고 나는 버티면서 가만히 있다 보니,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어 회의감마저 들었다. 놀이터에서 어린애랑 놀아 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황급히 정신을 차린 나는 힘을 빼고 정우진의 손을 피한 뒤 말했다.

“봤지? 진짜 괜찮다니까.”

내 말에 정우진도 손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

“그래도 꼭 찜질하세요. 멍들 수도 있잖아요.”

솔직히 아까 책에 부딪친 것보다 정우진이 손가락으로 민 힘이 더 강한 것 같았지만 이런 걸 일일이 따지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찜질도 하고 파스도 붙이고 약도 바를게.”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하게 일부러 오버하면서 말했지만, 정우진은 역시나 정우진이었다.

“그럼 나중에 집에 갈 때 약은 제가 사 드릴게요.”

그 말에 나는 침묵하다가 씨익 웃었다.

“그래, 고맙다. 후시딘도 사 주고 진통제도 사 주라. 빨간약도 사 주고.”

“네, 피로 회복제도 사 드릴게요. 선배님 피곤하실지 모르니까.”

“그럼, 그럼. 그래야지.”

모든 걸 포기한 채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수줍게 웃었다. 정말 희한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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