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줄을 줄여서 주겠다며 시계는 다시 정우진이 가져갔다. 한숨을 내쉬고 있다가 이대로 갈 수가 없어서 바지를 갈아입으려는데 정우진이 휙 소리 나게 몸을 돌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저는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쾅 닫혔다. 부서진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큰 소리가 나서 놀라고 있는데 다시 슬그머니 문이 열렸다.
“세게 닫은 게 아니라 바람 때문에 세게 닫힌 거예요…….”
소심하고 작은 목소리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갈게.”
“네.”
이번에는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살살 닫혀서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큰 바지를 벗고 내가 입고 온 바지로 갈아입었다. 어차피 바로 숙소로 갈 예정이라 거울도 보지 않고 그냥 대충 입고 운동복은 한 손에 들고 연습실을 나섰다.
“아, 깜짝이야.”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바로 옆에 정우진이 서 있었다.
나가서 기다린다고 해서 나는 차에서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움찔거리자 정우진이 배시시 웃었다.
“빨리 나오셨네요.”
“그냥 바지만 갈아입는 건데 오래 걸릴 게 뭐가 있어.”
“제가 숙소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항상 정우진이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랑 놀다가 헤어졌는데 친구가 날 집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자차를 가지고 다니는 친구라도 날 집까지 데려다준 적이 없었는데…….
“나 그냥 버스 타고 가도 되는데. 아니면 걸어가도 되고.”
“여기서 걸어가기도 해요? 엄청 오래 걸리지 않아요?”
“한 30분 정도밖에 안 걸려.”
그렇게 말하는 동안 이미 주차장에 도착해 버렸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혼자 간다고 하기도 좀 멋쩍어 어쩔 수 없이 차에 타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그럼 같이 걸어서 갈까요?”
“뭐?”
“소화도 시킬 겸, 저는 걸어가도 괜찮을 거 같아요.”
뭔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이상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그냥 앞좌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그러자 정우진도 운전석에 타며 다시 말했다.
“걸어가기도 하신다면서요?”
“차가 있는데 왜 걸어가? 난 차가 없으니까 걸어갔던 거지.”
“그럼 제 차 드릴까요? 면허 있으세요?”
“아니요? 면허 없는데요?”
혹시 또 정우진이 안전벨트를 해 주겠답시고 내 쪽으로 다가올까 봐 얼른 안전벨트를 하며 말했다. 그러자 정우진이 잠시 나를 보다가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세요?”
“제 마음인데요?”
“…….”
정우진이 계속 이상한 소리를 해서 나도 그냥 이상하게 대답해 본 건데 이게 꽤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내 차 부담스러우면 렌터카 빌려 줄까?”
앞으로 이 방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정우진이 내게 반말을 했다.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부터 시작해서 뺨까지 소름이 쫙 올라왔다.
나는 놀란 얼굴로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물었다.
“뭐야, 너 왜 갑자기 반말해?”
“내 마음인데?”
“…….”
혹시 아까 내가 존댓말해서 그걸 따라 하는 건가?
이 방법이 꽤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전혀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말 놔라. 이참에 이름도 막 부르고. 매번 선배님이라고 그렇게 깍듯하게 말하지 말고.”
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말하자 정우진이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해요.”
싫다, 좋다도 아니고 왜 곤란하다고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워서 이유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그냥 계속 존댓말 써.”
“알았어.”
“……청개구리세요?”
“응.”
뭐가 그렇게 웃긴지 정우진이 실실 웃기 시작했다. 저 새끼 진짜 술 마신 거 아니야? 결국 나도 전염이 된 건지 정우진을 따라 피식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 근데 그 바지 누구 거예요?”
한참 웃던 정우진이 운전을 하느라 앞을 보며 물었다.
“강이 거.”
내 말에 정우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 박자 늦게 다시 물었다.
“그걸 왜 선배님이 들고 계신 거예요?”
“아, 이거 강이가 입으려고 샀다가 연습실에 두고 간 거야. 계속 가지고 가야지, 하면서 깜빡했던 게 생각나서 오자마자 갈아입은 거고……. 오늘 바지가 좀 불편해서.”
이번에도 정우진은 또다시 한참을 침묵하다가 물었다.
“선배님이 입었던 걸 다시 주는 거예요?”
“…….”
뭔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리다가 갑자기 든 생각에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나 씻고 나왔어.”
“아니, 그게 아니라……. 옷 새로 사 주는 게 낫지 않아요?”
새로 사 주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나는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보며 황당해서 물었다.
“내가 무슨 쓰레기니?”
내 말에 정우진이 울상을 짓더니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
“제가 사 드릴게요…….”
“뭐?”
“새 옷……. 지금 바로 백화점 갈까요?”
저놈은 도대체 아까부터 뭘 그렇게 자꾸 사 주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건가? 아니면 원래 돈을 저만큼 벌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건가?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하고 그냥 숙소로 가 주세요.”
“왜? 백화점 가자.”
“싫다고요.”
“가자. 응? 백화점 가자.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아. 응?”
“…….”
아니, 이 새끼가 왜 갑자기 애교를 부리고 지랄이지? 질색하면서 어깨를 움츠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연습실에 오래 있었던 거라 입기 전에 세탁해야 되니까 그만해.”
보통 이쯤 하면 알아듣지 않나? 내가 정우진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걸까? 신호가 걸리자마자 정우진이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럼 제가 세탁해 드려도 될까요?”
“…….”
그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 바지에 꽂혀서 이러는 건지도 모르겠고, 왜 이런 이상한 걸로 고집을 부리는지도 모르겠다.
“알았어요…….”
내 눈빛에 담긴 무수한 뜻을 읽은 건지 정우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이 좀 불쌍해 보이기는 했지만 더 이상 바지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나도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거리가 별로 멀지도 않아서 숙소에 금방 도착했다.
“바로 들어가실 거예요?”
“어, 그래야지.”
나는 바지를 챙기고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보자.”
“선배님!”
다급한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에요, 내일 봬요. 안녕히 주무세요. 문자 드릴게요.”
무슨 문자를 보내겠다는 거지? 속으로 약간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가.”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 문을 닫고 몇 걸음 옮기다가 뭔가 이상해서 그 자리에 멈췄다.
“…….”
차가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또 저번처럼 가다 섰다, 가다 섰다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뒤돌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유리창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한참 보다가 나는 얼른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날 따라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설마 인사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걸까?
답답해서 빨리 가라고 차 뒷바퀴를 발로 툭툭 차려다가 만약 이거 잘못되면 신장을 팔아도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다시 손짓하면서 입 모양으로 가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정우진이 아쉽다는 눈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나도 다시 몸을 돌리며 가려고 하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차가 찔끔찔끔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
찔끔, 찔끔.
“…….”
찔끔, 찔끔.
황당한 눈으로 시커먼 차를 보다가 생각해 보니까 내가 왜 이걸 보고 서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져서 그냥 등을 돌렸다. 하지만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자꾸 신경이 쓰여서 결국 몇 번이나 더 돌아봤다.
그리고 천천히 조금씩 움직이던 차가 드디어 완전히 사라지자 안심하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