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온정에 도착하자 입구에 기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와 있었다. 멀리서부터 사진을 찍고 있는 게 보여 갑자기 긴장이 됐다. 그런 내 상태를 알아차린 건지 정우진이 내게 말했다.
“그냥 바로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저부터 내릴까요?”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안전벨트를 풀면서 일어나 나를 지나쳤다. 그리고 말도 없이 문을 여는 순간 천둥 번개가 치는 것처럼 플래시가 터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가 뜨자 어느새 정우진이 차에서 내린 뒤였다.
나도 뒤따라 차에서 내려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게 보였다. 바로 들어가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왜 서 있는 거지? 혹시 인터뷰라도 하는 걸까?
의아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다 말고 굳어 있는데 정우진이 별안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선배님, 빨리 오세요.”
“어, 그래.”
그 모양새가 좀 이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정우진의 손을 맞잡으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대로 팔을 잡아 내리면서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의 도움을 받아 음식점 가장 안쪽에 있는 룸으로 들어가니 벌써 송철 피디와 스태프 몇 명이 와 있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차 안 막히던가요?”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정우진과 나를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안내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이것도 짧게 내보낼 거라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긴 한데, 정말 조금만 쓸 거니까 그냥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돼요. 먹는 장면도 대부분 다 편집될 거니까 식사도 편하게 하시고요.”
송철 피디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장면을 조금만 쓴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가 방송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너무 오랜만의 촬영이라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오기 전까지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그동안 내가 했던 프로그램은 다 스튜디오에서 했고, 대본도 있었는데 이건 정말 그냥 완전 리얼이었다.
“오늘 스케줄 때문에 늦어서 죄송해요. 선배님도 기다시게 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그때 정우진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스태프들이 있는 곳을 번갈아 보며 사과를 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피디와 스태프들이 펄쩍 뛰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슈퍼스타이신데 바쁜 게 당연하죠. 오히려 이렇게 바쁘신 분이 저희 프로그램에 나와 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한 피디가 갑자기 절을 했고, 스태프들도 따라 절을 하기 시작했다. 나만 가만히 있기도 뭐하고 그래서 나도 덩달아 얼굴에 물음표를 잔뜩 띄우고 절을 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정우진은 내가 절을 하는 걸 보자 화들짝 놀라 나를 붙잡았다.
“선배님까지 왜 이러세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모두가 웃었다. 나만 계속 분위기를 못 따라가고 있는 건지, 도대체 이 사람들이 절을 하다 말고 왜 갑자기 웃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송이라는 게 때로는 그냥 남들이 하면 따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하하하 웃었다.
“예능에서 못 봬서 잘 몰랐는데 재미있는 면이 있으시네요.”
그때 송철 피디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제가요?”
“아니, 원 씨는 절을 왜 하시는 거예요?”
“그냥 다들 하시니까…….”
내 말에 아직도 내 팔뚝을 잡고 있던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절은 제가 해야 하는데.”
정우진이 말끝을 흐리자 옆에 있던 스태프 중 한 명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세가온 씨 평소에 텔레비전에서 보던 거랑 엄청 다른 것 같아요.”
“맞아요.”
“진짜 되게 다른 거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스태프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확실히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정우진의 이미지는 지금과 많이 다른 면이 있었다.
“저 텔레비전에서 보는 거랑 많이 달라요?”
나를 보며 묻는 질문에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내 짧은 대답에 갑자기 또 주변에서 웃기 시작했다. 순간 너무 솔직했나 싶어서 얼른 수습에 나섰다.
“아, 근데 직접 만나서 얘기도 해 보고 그러니까 진짜 착하고 예의도 바르고 엄청 섬세하고 감수성도 풍부하고…….”
당황해서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데 정우진이 감동받은 듯 왠지 그윽해 보이는 눈으로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부담스러운 반응에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데, 정우진이 질세라 줄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선배님도 너무 착하고 예의 바르고 예쁘고 멋있고 귀엽고 다정하고 섬세하세요. 그리고 선배님은 밥도 잘 드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시고 영화도 잘 보시고 잠도 잘 주무시고…….”
이 새끼가 지금 날 놀리고 있는 건가? 그런 착각을 하고 있을 무렵, 우리가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멀뚱멀뚱 보고 있던 송철 피디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두 분 지금 도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선배님은 또 술도 사 주신다고 하셨고…….”
“야, 그만해.”
분위기 파악을 못 한 건지 옆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계속 구구절절 씨불이고 있는 정우진의 허벅지를 철썩 소리가 나게 때렸다. 그러자 다시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두 분 많이 친하신 거 같은데 같은 소속사 선후배 사이시죠?”
“네, 맞아요.”
내가 대답하자 송철 피디가 이번에는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두 분 데뷔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셨어요? 원래 친하셨던 거예요?”
송철 피디와 같이 나도 정우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던 정우진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고 있었다. 그 차이가 너무나 확연해서 나도 그렇고 주변에 있던 스태프와 송철 피디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초 정도 적막이 흘렀다.
그때 송철 피디가 힐끔 나를 바라봤다. 그 간절한 눈빛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대신 대답했다.
“아니요, 데뷔하기 전에는 몰랐어요.”
“아, 그럼 데뷔하고 나서 알게 되신 거구나. 연습생 시절일 때도 친분은 없었던 거예요?”
“네네, 딱히 없었어요.”
이건 편집이 되려나? 갑자기 분위기 좋다가 정우진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촬영을 조질 것 같아 나는 결국 고민하다가 정우진의 허벅지를 다시 철썩 때렸다.
“야, 좀 웃어. 너는 무표정으로 있으면 너무 차가워 보이니까 가만히 있을 거면 눈이라도 좀 동그랗게 뜨든가.”
내 말에 정우진이 나를 가만히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그러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땡그랗게…….
“하하하하!”
“아, 뭐야!”
“푸하하하!”
갑작스러운 정우진의 얼굴 개그에 다행히 분위기는 풀린 듯했지만 나는 여전히 찜찜한 기분이었다. 사실 딱히 정우진의 표정이 웃긴 것도 아니었고, 여전히 무표정하기도 했고…….
그래도 어쨌든 촬영은 해야 하니까 나도 따라 웃자 정우진이 그제야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즐거워서 웃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무표정한 얼굴로 있는 것보다는 백배쯤 나았다.
“이래서 세가온 씨 별명이 얼음왕자였구나.”
“블리자드도 있지 않아요?”
“블리자드는 뭐예요? 눈보라 같은 건가?”
왁자지껄한 와중에도 정우진은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해 내가 말했다.
“근데 그거 진짜 오해예요. 저도 처음에는 별명도 그렇고, 약간 이미지가 좀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되게 소심하고……. 그러니까 소심하다는 게 나쁜 뜻이 아니라……. 아, 나쁜 뜻이 맞나?”
“왜요,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주절주절 떠들다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송철 피디가 흥미진진해 보이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힐끗 정우진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얼마 전에……. 제가 잠이 들어서 문자를 읽고 답장을 못 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랬더니 우진이는 제가 화난 줄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자기가 뭐 잘못했는지 알았다고…….”
“아, 정말요? 되게 의외다.”
“네, 우진이가 진짜 방송 이미지랑 많이 달라요. 소심하기도 한데 정말 잘 챙겨 주고……. 낯을 많이 가려서 지금도 이렇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이게 다 쑥스러워서 그런 거예요.”
내 말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정우진에게 닿았다. 정우진은 뭐라고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나를 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걸 다 말하면 어떡해요…….”
“하하하하!”
“아니, 정말 이미지랑 많이 다르시네!”
정우진의 작은 목소리에 다들 웃었고, 나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우진의 표정도 풀린 것 같고, 다시 말도 하니까…….
속으로 혼자 전전긍긍한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정우진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무표정하게 있는 것보다 차라리 저런 게 훨씬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