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4/190)

69화

정우진이 양손으로, 맞은 머리를 부여잡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점점 억울하다는 듯 일그러지다가 울상이 되는 걸 보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때리긴 했지만, 솔직히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또 때릴 것 같기는 했다.

“왜 때려요?”

울먹거리는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처럼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일단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

“전혀 미안하다는 표정이 아닌데요?”

“손이 미끄러졌어.”

“손이 어떻게 미끄러지면 제 머리를 때려요?”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 내면서 변명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은 납득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먼저 이상한 소리 했잖아.”

“제가 뭘요?”

“…….”

차마 어떻게 이상한 소리를 했는지 내 입으로 읊을 수가 없어서 나는 짧게 숨을 토하듯 뱉어 낸 다음 말했다.

“그럼 그냥 너도 한 대 때려.”

“제가 선배님을요?”

때리라고 머리를 숙여 주자 정우진이 당황한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나는 머리를 계속 들이대며 정우진에게 다가갔다.

“야, 때려.”

“왜 이러세요?”

“너도 때리라고.”

거의 정우진 가슴에 박치기를 할 기세로 계속 머리를 들이밀자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서던 정우진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러곤 가슴에 머리가 닿자마자 고개를 빠르게 드는데 뭔가가 뒤통수를 살짝 눌렀다.

나는 그게 정우진의 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뒤통수를 가볍게 붙잡고 손가락 끝으로 두피를 아주 살짝 문지르는 느낌이 나자 등줄기로 소름이 끼쳤다.

놀란 얼굴로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강한 힘으로 확 고개를 들자 정우진의 얼굴이 보였다.

“다, 다쳐요…….”

“…….”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정우진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귀도, 목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등에 촉촉해 보이는 눈과 눈가까지도…….

그걸 보는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괜찮으세요?”

그 소리가 제법 컸는지 정우진이 놀란 표정으로 손을 뻗어 내 팔뚝을 잡았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물었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네?”

“왜 그렇게 빨갛냐고, 얼굴이.”

내 말에 정우진이 머뭇거리다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이, 저한테 안기시니까…….”

“뭐?”

“자꾸…….”

정우진은 힘겹게 말을 이었지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조금 전처럼 머리로 정우진의 가슴에 퍽퍽 박치기를 했다.

“야! 이게 안기는 거냐? 어? 이게 박치기지, 이게 안기는 거야? 어? 어?”

“아, 아파요. 선배님, 아파요.”

“이게 안기는 거냐고! 너는 말을 도대체 왜 그딴 식으로 해!”

괜히 민망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일부러 더 오버하면서 언성을 높이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였다. 나는 황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강서주 고객님 맞으십니까?

“아, 잠시만요.”

나는 반대쪽 손으로 핸드폰을 가리고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나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

정우진은 여전히 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황급히 등을 돌려 현관문 쪽으로 가며 속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핸드폰 너머의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발을 신고 문까지 열고 나가자 조금 찬 공기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개운해져서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가며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네, 고객님. 지금 통화 괜찮으실까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 카드사에서 실적이 높은 분들에 한해서만 특별히 소개해 드리는 좋은 상품이 있어 전화 드렸어요. 고객님, 치아가 오복 중 하나라는 말씀 아시지요? 아시다시피 치아는 한 번 망가지거나 상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도 없고, 치료를 하려면 굉장히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데요. 그래서 미리 준비를…….

“네, 네. 네, 그럼요. 네.”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다가 말했다.

“보험이죠? 네, 가입할게요.”

-네, 고객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그 어색하고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것에 너무 감사한 마음에 나는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긴 내용을 듣고 약정에 동의한다는 말도 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치아 보험 하나 가입하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통화를 할 줄 몰라서 점점 초조해지고 있는데 드디어 끝이 보였다. 자택으로 계약서를 보내 주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자 한숨이 나왔다.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르는 소리를 한참 듣다 보니 평정심을 되찾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계속 이곳에 있을 수도 없어서 나는 몇 번 더 심호흡을 한 다음에 현관문 앞으로 가 벨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면서 정우진이 보였다. 아직도 홍당무처럼 붉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사이 정우진도 좀 진정을 한 건지 낯빛은 평범했다. 표정이 좀 부루퉁하긴 했지만…….

“누구랑 통화하셨어요?”

“……그냥, 사람.”

“네?”

앞에 버티고 서서 안 비켜 주기에 팔 밑으로 허리를 숙이고 움직였다. 거실 슬리퍼를 신고 안으로 들어가자 정우진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

“왜 그렇게 오래 하셨어요?”

“그런 게 있어. 근데 생각해 보니까 국수를 안 산 것 같은데 집에 국수는 있냐?”

뜬금없이 보험 하나 들고 왔다고 할 수는 없어서 말을 돌리자 정우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대답했다.

“네, 있어요.”

“그럼 빨리 뭐 좀 먹자.”

빨리 먹고 집에 가고 싶어서 분주하게 움직이자 정우진이 국수를 가지고 와 내게 건넸다.

“제가 만들어 드릴 테니까 선배님은 쉬고 계세요.”

“그냥 같이해.”

그래야 빨리 만들어서 빨리 먹고 빨리 집에 가지.

아침에 거의 지각할 아이에게 뭐라도 먹여서 학교에 보내고 싶은 아빠의 마음으로 도마를 꺼내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

“국수는 제가 삶을까요?”

“지금 삶으면 다 퍼지는 거 아니야? 그건 제일 마지막에 하고 일단 넌 고기를 구워.”

“네……. 근데 선배님, 혹시 먹고 어디 가셔야 해요?”

어쩐지 좀 서운해 보이는 목소리에 나는 멈칫하고 정우진을 쳐다봤다.

“조금 전에 전화 온 거 급한 거였어요? 갑자기 약속이라도 생겼어요?”

“…….”

그렇다고 하면 거짓말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기회가 아닐까? 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렇다고 할까, 말까 맹렬하게 고민했지만 그래도 거짓말까지 하긴 싫어서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건 아니라고 하려는데 정우진이 먼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제가……. 제가 사실 친구가 별로 없어요.”

“……?”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정우진이 두서없이 주절주절 말했다.

“어릴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해서 학교도 잘 못 가고, 그러다 보니까 친구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일할 때 말고는 다른 사람들이랑 대화를 해 본 적도 별로 없고……. 일할 때는 대본도 있고 아무래도 좀 어투도……. 선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평상시랑 다를 때가 많아서 이렇게 말하는 게 버릇이 됐나 봐요.”

“…….”

설마 내가 그딴 식으로 말하지 좀 말라고 해서 이러는 건가? 아니, 분명 내가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또 이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흘끔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누가 집에 놀러 온 적도 처음이라서……. 제가 많이 들떴나 봐요.”

“…….”

풀이 팍 죽은 목소리에 갑자기 내가 쓰레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다음에 또 같이 놀고 싶어서……. 최대한 잘해 주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혹시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해요. 나쁜 의도로 그랬던 건 아니에요. 당황한 것도 그냥…….”

“자, 잠깐만.”

내가 당혹스런 얼굴로 말을 끊자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전처럼 울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시무룩해 보이지도 않고 그냥 정말로……. 좀 민망하고 멋쩍은 표정이라 심장이 철렁거렸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

“나도 말이 좀 심했어. 그냥 좀 편해져서 말이 막 나왔나 봐. 미안.”

뒷목을 벅벅 긁으면서 사과를 하자 정우진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도 선배님이 편해졌다고 생각해서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랬던 거예요.”

“…….”

“근데 장난을 쳐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것도 좀 서툴렀던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

정우진이 농담이라거나 장난이라고 할 때마다 과하게 반응했던 걸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지나치게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었지만 그것보다 미안하다는 마음이 앞섰다.

표정으로도 정우진이 정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게 다 보여서 내가 너무 오버를 했던 건 아닌지 후회도 되고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아니…….”

“…….”

“진짜 그렇게까지……. 막 사과를 받을 정도로 내가 기분이 나빴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더듬거리자 정우진이 다시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니에요, 저도 선배님 곤란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요즘 많이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 언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

요즘 많이 불편해한다고? 그걸 정우진이 눈치채고 있었다고? 나는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티가 났냐?”

“네, 좀 많이…….”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죄송합니다…….”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꽉 물었다. 진짜 도끼병……. 어휴, 씨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