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천신만고 끝에 휴게소에 도착한 우리는 주차를 하고 내릴 준비를 했다. 트렁크 안에 있는 캐리어에서 선글라스랑 모자를 꺼내고 있는 사이, 스태프가 탄 차도 도착했다. 카메라맨에게 받은 손캠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제가 호두과자 사 드릴게요. 선배님 호두파이 좋아하시잖아요.”
호두과자랑 호두파이는 엄연히 다른 건데 그래도 사 주겠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사람도 별로 없고 문을 연 곳도 내부 식당 몇 군데뿐이라는 점이었다.
“알감자 먹고 싶었는데.”
휴게소에 오면 알감자는 당연히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쉬워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내게 물었다.
“식당에서 뭐 간단하게 드실래요?”
그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카메라가 우리를 찍고 있었지만 사람도 별로 없고 우리에게 크게 관심도 없어 보여서 먹고 가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럼 간단하게 우동이나 먹고 갈까? 저기, 혹시 식사하셨어요?”
“저희는 아직이요.”
“그럼 같이 드실래요? 차에 계시는 분들도 다 같이 먹어요.”
어차피 먹고 가기로 한 거 그냥 다 같이 먹기로 하고 내가 주문을 하러 갔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것저것 시키다 보니 생각보다 양이 많아졌다. 여기 돈가스도 맛있다고 해서 정말 마지막으로 일반 돈가스 하나와 치즈 돈가스도 하나씩 시켰다.
“선배님, 여기 좀 보세요.”
그때 정우진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말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정우진이 조금 전 내게서 가지고 갔던 손캠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
“…….”
갑자기 면전에 카메라를 들이대서 그런지 잠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는 멀뚱멀뚱 말없이 카메라를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뭐 해?”
“그냥 투샷이에요.”
그 말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카메라를 바라봤다. 말도 안 하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딱히 할 말도 없고 그만하자고 말할 타이밍도 놓쳐서 잠깐 더 그러고 있는데 카메라맨 중 한 명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렇게 밑에서 찍으시면 잘 안 나올 텐데…….”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잘생긴 사람들은 간절함이 없어…….”
갑자기 민망해져 내가 웃자 정우진이 어정쩡한 자세로 카메라를 머리 꼭대기까지 올렸다.
“정수리 찍냐?”
“우리가 고개를 들면 되잖아요.”
뭐지? 발상의 전환인가? 뭔가 그럴듯한 말이라 고개를 위로 들고 또 카메라를 잠시 쳐다봤다.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하나하나 받아 식탁 위에 펼치니 잔칫상이 따로 없었다.
“흐억.”
그때 우리 옆을 지나치던 할아버지가 그걸 보더니 소리를 내면서 놀랐다. 덩달아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할아버지가 나와 카메라를 힐끔 보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게 뭐 요즘 유행하는 먹방 비제이 그런 건가?”
어쩌다 보니 식탁 옆에 혼자 서 있어서 이걸 다 내가 먹는 줄 안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스치듯 지나가는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저 혼자 다 먹는 거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고 보니까 서주 씨 엄청 많이 드신다는 얘기가 있던데, 얼마나 드시는 거예요?”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스태프 중 한 명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아, 저는 그냥 평범하게 먹고 저희 멤버들이 엄청 많이 먹어요.”
“라면 한 번 끓이시면 몇 개 드세요?”
“라면은……. 한 두세 개?”
“아…….”
뭔가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스태프를 보며 약간 양심에 찔려서 얼른 말을 바꿨다.
“그냥 조금 많이 먹는 정도예요.”
“아…….”
“…….”
“네.”
“……사실 엄청나게 먹어요.”
결국 이실직고하니, 스태프가 웃기 시작했다.
그사이 정우진은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정우진이 돌아오자 카메라맨은 교대로 먹기로 하고 우리는 시킨 음식들을 먹었다. 처음에는 좀 많은가 싶었지만 먹다 보니 또 어찌어찌 다 먹기는 했다.
“편의점에서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도 하나 먹을까?”
음식을 다 먹고 치운 뒤 돌아가려는데 편의점이 보여 물었다. 때마침 편의점 옆에 작게 화단도 있고 햇볕도 좋게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곳으로 갔다.
“야, 여기서 네 사진도 찍으면 되겠다.”
“제 사진이요? 저 혼자요? 저는 같이 찍자고 한 말이었는데.”
“같이도 찍고 네 사진도 찍으면 되지. 너 선글라스 끼고 저기 서서 포즈 좀 취해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우리가 예전에 샀던 장난감 같은 흰색 테의 선글라스를 주섬주섬 끼고 햇볕이 내리쬐는 작은 화단 앞에 섰다. 그리고 양손을 뒤로하며 가만히 서서 날 쳐다봤다. 일단 그걸 핸드폰 카메라로 몇 번 찍다가 말했다.
“포즈 좀 취해 봐. 모델처럼.”
“같이 찍으면 안 돼요?”
“같이 찍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 너부터 찍어.”
“무슨 포즈를 취해요?”
“너 화보 찍을 때처럼.”
평소에 많이 찍어서 익숙할 텐데도 정우진은 계속 어색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너무 웃겨서 나는 계속 무리한 요구를 했다.
“선글라스 벗어서 입에 물어 봐. 허공을 보면서, 우수에 젖은 아련한 표정으로…….”
“…….”
“야, 진짜 잘 나온다. 이번에는 선글라스 끼고 이마 짚고 살짝 인상 찌푸려 봐. 치명적인 사람처럼. 하, 미치겠다……. 이런 느낌으로.”
“선글라스 끼고 인상 찌푸리면 안 보이는 거 아니에요?”
“그게 포인트지. 살짝 보일 듯 말 듯.”
내가 아무 소리나 지껄여도 정우진은 내 말대로 최선을 다해 포즈를 취했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끅끅거리면서 웃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 같이 찍어요.”
“너 하나만 더 찍게 저리 가 봐.”
“또 어떤 거요? 그냥 같이 찍으면 안 돼요?”
“알았으니까 여기 보면서 웃어 봐. 브이 하고.”
정우진은 터덜터덜 다시 화단 앞으로 가 내가 시키는 대로 웃으면서 브이를 했다. 이런 정상적인 사진 한 장쯤은 있어야지.
“양손으로 다 브이도 해 봐.”
“…….”
“머리 위로도.”
“…….”
“얼굴 꽃받침…….”
“…….”
찰칵찰칵 빠르게 사진을 찍고 이젠 됐다고 생각하자 정우진이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화단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이젠 선배님이 찍으세요.”
“나 혼자? 같이 안 찍고?”
“일단 선배님 먼저 찍고, 같이 찍는 건 그다음에요.”
“…….”
뭐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정우진이 내 말대로 군말 없이 포즈도 취하고 사진도 찍었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금 전 정우진이 사진을 찍었던 곳으로 가 앞을 바라봤다.
“선배님, 일단 섹시한 표정으로 이쪽 봐 보세요.”
“…….”
눈앞에 보이는 것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우진이 섹시 어쩌고 하면서 했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정우진 뒤쪽으로 우리를 찍고 있는 카메라 두 대, 좀 전에 같이 밥을 먹었던 스태프들 다수, 그리고 언제 왔는지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제법 많은 수의 구경꾼들…….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섹시한 표정을 지어야만 하는 처지가 된 나는 당황해서 주춤하다가 못 들은 척 되물었다.
“무슨 표정?”
“섹시한 표정이요.”
“그런 거 못 해.”
“왜 못 해요? 일단 한 번 해 보세요.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워요.”
“아니……. 못 한다고.”
내가 계속 쭈뼛거리는 게 불쌍했는지 정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카메라를 노려보세요.”
“왜?”
“아, 빨리요.”
“…….”
민망하고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이건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정우진이 시키는 대로 카메라를 노려봤다.
“그대로 브이 해 보세요.”
“…….”
저 새끼는 도대체 나한테 뭘 시키고 싶은 걸까? 노려보면서 브이를 하라니……. 나는 양손을 들어 브이를 하고 카메라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정우진은 사진을 찍으면서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웃었다.
“야, 이제 그만하자.”
“하나만 더 찍고요. 이번에는…….”
“제발.”
진짜 죽을 것 같아서 노려보는 표정 그대로 간절히 말하자 정우진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뭐라고 하려는 듯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그럼 같이 한 장만 더 찍어요.”
그래도 혼자보다는 같이 찍는 게 훨씬 낫긴 하겠지만, 이미 나는 주위 사람들을 너무 의식해 버려서 도저히 자연스럽고 편안한 표정이 나오질 않았다. 분명 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많아진 거지?
설상가상으로 좀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정우진도 어딘가 이상해졌다. 얘도 주변을 못 보다가 이제야 안 건지 잔뜩 긴장한 표정에 얼굴도 열이 올라 붉어져 있었다.
내 옆에 선 정우진이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낮게 들고 셀카 모드로 변경했다. 너무 밑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사진을 찍었는데, 둘 다 표정이 가관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찍어서 그런지 화면도 어두웠고, 표정도 잔뜩 경직되어 있어서 그냥 심령사진이 따로 없었다.
“…….”
“…….”
겨우 한 장을 찍고 이제 가려는데, 우리를 보고 있던 스태프 중 한 명이 물었다.
“찍어 드릴까요?”
싫다고 할 수도 없어서 핸드폰을 건네고 나란히 서 있는데 다른 스태프가 웃으며 말했다.
“두 분 혹시 증명사진 찍으세요?”
이젠 표정 관리하는 것도 힘들어지려고 하는 그때, 정우진이 갑자기 내 머리에 차에서 내릴 때부터 들고 있던 모자를 씌워 줬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선글라스까지 끼워 주는 게 아닌가.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긴 했지만 얼굴이 가려지니 그나마 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셋, 둘, 하나 하고 찍을게요! 셋, 둘…….”
빠르게 줄어드는 숫자에 나는 다급히 정우진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머리까지 기댄 자세로 브이를 했다.
“하나!”
사진이 찍히는 순간 정우진의 손이 내 허리에 살짝 닿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