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아니, 어떻게 찌개도 간이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있지? 야채도 잔뜩 넣어서 식감도 너무 좋았다. 입에 있는 걸 삼키지도 않고 다시 쌈을 싸고 있는데, 정우진이 조금 걱정이 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크지 않아요? 선배님, 입도 작으시잖아요.”
입이 작다는 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우진은 자기가 조준을 잘 못 해서 젤리를 넣지 못한 거면서 내 입이 작다는 걸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
“야, 원래 쌈이라는 건 먹고 싶은 거 다 때려 넣고 그냥 입에 쑤셔 넣다 보면 다 들어가게 돼 있는 거야.”
“그게 입에 다 들어간다고요?”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정우진에게 나는 완성된 쌈을 손에 들고 물었다.
“내기할까? 다 들어가면 나한테 뭐 해 줄래?”
“제 사랑을 드릴게요.”
“…….”
정우진이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상처 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아니, 선배님. 표정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으실 수가 있으세요?”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왔나 봐. 많이 티 났어?”
“엄청요.”
그 말에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커다랗게 싼 쌈을 반쯤 베어 먹었다. 내가 다섯 살 때도 쌈을 베어 먹어 본 적이 없었는데 정우진 때문에…….
“아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정우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걸 못 들은 척하고 남은 반쪽 쌈도 입에 넣었다.
사실 양파랑 호박을 잔뜩 넣다 보니 쌈이 좀 커져서 한 번에 입에 넣기 힘들어 보였는데, 정우진 덕분에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때 정우진이 자기도 쌈을 싸면서 말했다.
“제가 하나 싸서 한 입에 다 먹으면 선배님은 뭐 주실 거예요?”
그 물음에 실소가 터졌다.
“아무것도 안 줄 건데?”
“사랑을 주신다고요?”
“아니, 안 준다고.”
“그럼 도전해 볼게요.”
내 말이 안 들리는 건지 정우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쥐똥만 하게 싼 쌈을 한 입에 쏙 넣었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물었다.
“우진아, 혹시 내 말이 안 들려?”
“한 입에 넣었어요.”
“그래, 안 들리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밥을 한 숟가락 퍼서 입 안 가득 넣었다.
“이제 선배님의 사랑을 주세요.”
“냄비에 누룽지 있던데 뜨거운 물 부어 놓을까? 그럼 숭늉 되지 않아? 남은 밥 다른 곳에 덜어 놓고 물 부어서 나중에 따뜻하게 마시자.”
“선배님, 제 말 안 들리세요?”
“아, 물 끓여야겠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냄비에 물을 받아 아궁이 위에 올려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뭐야, 대답도 안 해 주고.”
“밥 진짜 맛있다.”
“혼자 말하니까 너무 외로워요.”
“이거 돈 받고 팔면 떼부자 될 거 같은데.”
“너무해.”
“이거 좀 드셔 보실래요?”
정우진이 옆에서 자꾸 꿍얼거리는데 계속 혼잣말하는 것도 버거워서 스태프가 있는 쪽을 보며 도와 달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송철 피디가 머뭇거리다가 웃었다.
“뭐,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야, 가서 그릇 좀 가지고 와 봐.”
계속 삐쳐서 말도 안 들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래도 정우진은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가지고 왔다. 내가 새 그릇에 밥을 푸는 동안 정우진이 가지고 온 그릇에 된장찌개를 잔뜩 펐다.
밥과 된장찌개, 그리고 호박잎도 몇 장 건네주자 송철 피디와 스태프들이 한 숟가락 씩 먹어 보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와, 진짜 맛있다.”
“이거 돈 받고 파는 거 같은데요?”
“한 자리에서 된장찌개만 40년 동안 끓인 할머니가 해 주신 맛이야.”
“밥 비며 먹으니까 진짜 맛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자 가슴이 뿌듯해졌다. 송철 피디는 쌈을 싸 먹더니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감동에 젖은 얼굴로 박수를 쳤다. 나는 짝짝짝 소리를 들으면서 양손으로 공손히 정우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맛있게 드셨으면 정우진 할머님께 사랑을 담아 박수 한 번 부탁드릴게요.”
“사랑해요.”
“제 사랑을 전부 드릴게요.”
“할머니, 사랑해요. 오래오래 장사해 주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박수갈채와 함께 정우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절 가지세요.”
“야, 잠깐만. 절 가지세요, 누구야?”
그 와중에 사심을 채우는 말도 들려서 송철 피디가 황당한 표정으로 범인을 색출했다. 나는 원 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이제 만족하니?”
내 물음에 정우진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뒤로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밥을 다 먹고, 끓인 물도 누룽지가 눌어붙어 있는 냄비에 붓고 뚜껑을 덮었다. 상을 치우면서 생각해 보니 본의는 아니었지만 정우진이 대부분의 요리를 다 해 버려서 설거지는 내가 하기로 했다.
마당 구석에 있는 수돗가에 빈 접시를 가지고 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상과 평상까지 싹싹 닦은 정우진이 내 쪽으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우리 이제 뭐 해요?”
“글쎄……. 아, 휴게소에서 사진 찍은 거 인별에 올리자. 너 그거 사진 진짜 웃기게 나왔어.”
“그럼 제 사진은 선배님이 올리고 선배님 사진은 제가 올릴까요?”
“그래도 되지. 설거지만 다 하고 평상에 앉아 숭늉 마시면서 올리자. 그리고 앉아서 좀 쉬고…….”
이야기하면서 하다 보니 설거지도 금방 끝냈다. 물기를 탈탈 턴 그릇은 평상 한쪽 정리 선반에 올려 두고 밑에는 수건을 깔아 놨다. 그사이 냄비 안에서 뿌옇게 숭늉이 된 물을 국자로 퍼서 머그잔에 담고 평상에 앉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좋다.”
새파란 하늘을 보면서 숭늉 한 모금을 마시니 속도 따뜻해지면서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 좋아요.”
눈을 감고 고개를 들고 있는데, 옆에서 정우진이 하는 말이 들렸다. 그 말에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너 잠도 잘 못 자고 운전도 했는데 잠깐 눈이라도 붙여.”
“졸리지는 않아요.”
“안 피곤해?”
“네, 하나도 안 피곤하고 너무 재미있어요.”
그 말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정우진을 바라봤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 그런지, 잠깐 눈을 감고 있었다고 눈이 부셔서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재미있어? 다행이네.”
“네?”
“다행이라고. 너 엄청 기대했잖아. 여행도 거의 가 본 적 없다고 하지 않았나?”
긴가민가해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은요?”
“나도 뭐……. 가 봤자 그냥 근처? 그리고 오래 있지도 않았어. 1박 2일로 가거나, 당일치기로 가거나…….”
계획을 하고 가지 않고 거의 대부분 충동적으로 떠난 적이 많아서 관광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정말 쉬기 위해서 떠난 여행이거나, 아니면 애들이랑 가서 먹기 위한 여행이 대부분이었다.
“선배님, 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은 어디로 가셨어요?”
“수학여행?”
그 물음에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말끝을 흐렸다.
“안 갔는데…….”
“왜요?”
놀란 얼굴로 묻는 정우진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돈이 없어서 안 간 건데, 이런 말을 지금 했다가는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였다. 왜 돈이 없었냐고 물어보면 할 말도 딱히 없고……. 그렇다고 구구절절 내 과거사를 이야기할 수도 없고.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그냥. 너는 어디로 갔는데?”
“수학여행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도 내가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대답했다.
“저도 안 갔어요.”
“왜?”
“그냥요.”
“…….”
“…….”
갑자기 대화가 단절된 우리는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냥 웃어 버렸다.
“아니, 내 주변에는 수학여행 안 간 사람 거의 없던데, 둘 다 안 갔네.”
“통했네요.”
“통하긴 뭘 통해. 핸드폰이나 가지고 와 봐. 사진 올리게.”
내 말에 정우진이 핸드폰을 가지고 와 내 바로 옆에 앉았다. 나는 숭늉을 한 모금 마신 다음 휴게소에서 찍은 정우진의 사진을 하나씩 보면서 말했다.
“이거 엄청 잘 나왔지 않냐? 이거 올릴까?”
“선배님 마음에 드는 걸로 올리세요. 근데 저 궁금한 거 있는데……. 왜 이런 이상한 포즈를 자꾸 시키신 거예요?”
정우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웃기려고 그런 건데, 그렇게 말했다가는 또 너무하다느니 그런 소리를 할 것 같아서 잠깐 머리를 굴렸다.
“그냥 잘 어울려서…….”
“이게요?”
“…….”
핸드폰 화면에는 정우진이 흑염룡이 봉인된 손을 위로 올린 채 만 원짜리 선글라스를 하고 멋진 척하고 있는 사진이 비쳤다.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포즈를 정색하고 하는 게 웃, 있는 거지.”
“방금 웃기다고 하려고 했죠?”
“아니? 멋있다고 했는데? 이거 올리자. 이거랑 웃는 표정으로 찍은 거랑.”
엄선해서 사진을 고르고 있자 불만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도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휴게소에서 찍은 사진은 올려도 되죠? 아까 기사 나갔다고 했으니까…….”
“네, 휴게소에서 찍은 사진은 괜찮아요.”
혹시 몰라 송철 피디에게 한 번 더 허락을 받은 뒤 인별에 엄선한 사진 두 장을 올렸다. 하나는 멋진 척하는 사진이었고, 또 하나는 귀여운 척을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서로 상반되는 사진 두 장과 웃는 이모티콘도 쓰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우진도 마침 업데이트가 끝났는지 나를 쳐다봤다.
“뭐 올렸어?”
“이거요.”
내미는 핸드폰 액정에는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면서 브이를 하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하긴, 나 혼자 찍은 건 이거 하나뿐이니까……. 사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우진이 한 장을 더 보여 줬다.
“그리고 이거요.”
다른 사진은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내 옆모습이 찍혀 있었는데 순간 포착을 당한 건지, 양손이 동시에 앞으로 나가 있고 보폭도 굉장히 넓어서 자세가 희한했다.
“이건 언제 찍었어?”
“휴게소 나와서 사진 찍으러 갈 때요.”
“나 도대체 왜 이렇게 걷고 있냐?”
“저도 뒤에서 보다가 웃겨서 찍었어요.”
확대를 해 보니 더 웃겨서 낄낄거리며 웃자 정우진도 옆에서 실실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