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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93/190)

88화

평상에 앉아 잠시 쉬면서 숭늉까지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다 마신 우리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수지가 있다고 했던 게 떠올라 거기나 한 번 가 보려고 했는데, 근처에 모탕을 파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차를 타고 시내에 나가 보기로 했다. 가까운 거리라고 해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냥 이대로 잠깐 다녀오려고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송철 피디가 말했다.

“거기에 작게 시장도 있다고 하던데 들렀다 오실래요? 오늘 또 마침 장날이래요.”

“아, 정말요?”

양치질을 하느라 어눌한 발음으로 묻자 송철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저희 컨셉이 자급자족이잖아요. 그래서 그냥 드리기는 좀 그렇고, 퀴즈 같은 거 내서 맞히시면 돈 드릴 테니까 그렇게라도 하실래요?”

나는 입에 잔뜩 거품을 물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준비 다 되시면 밖으로 나오세요.”

그렇게 송철 피디는 밖으로 나가고, 욕실에는 나와 정우진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거품을 뱉어 내고 세면대에 물을 틀어 입을 헹구고 정우진을 바라봤다.

“너 퀴즈 같은 거 잘 맞혀?”

양치질을 하고 있던 정우진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좀 전에 차 안에서 끝말잇기를 할 때 실력을 보면 보통이 아닌 건 확실했다. 사실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해서 퀴즈에는 약했지만,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정우진이 있으니 뭐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너만 믿을게.”

내가 정우진을 보며 말하자 입을 물로 헹구고 있던 정우진이 사레가 들렸는지 켁켁 기침을 했다. 나는 정우진을 등을 팍팍 두드려 주며 말했다.

“퀴즈라고 했으니까 상식 퀴즈 같은 거나……. 나라 수도 맞히기, 이런 거 내지 않을까? 난 진짜 하나도 모르니까 네가 다 맞혀야 돼.”

“근데 왜 한다고 하셨어요?”

“네가 잘할 거 같아서. 너 끝말잇기도 잘했잖아. 대신 퀴즈 말고 힘쓰는 거 나오면 내가 다 할게. 만약 팔씨름 같은 거 하면 진짜 자신 있는데.”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수건으로 입가를 닦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님, 저 학교 다닐 때 전교 1등 했어요.”

“뭐? 진짜?”

“네, 저만 믿으세요.”

그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나는 놀란 얼굴로 정우진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살면서 전교 1등 하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역시 끝말잇기를 잘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시장에 가서 삼겹살도 사고 닭도 사 와서 백숙 해 먹자.”

“좋아요.”

“가마솥 있으니까 사골 뼈 같은 거 사서 밤새 푹 고아도 맛있겠다. 아침에 뜨거운 국물에 파 송송 썰어 넣어서 소금이랑 후추 넣고 밥 말아서 김치랑 같이 먹으면 맛있는데.”

“그럼 그것도 사요.”

전교 1등에 대한 무한한 믿음으로 내 상상 속에서는 이미 퀴즈 같은 건 가볍게 맞히고 시장에서 먹고 싶은 걸 잔뜩 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마당으로 나와 송철 피디의 말을 듣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두 분이 번갈아 가면서 한 문제씩 맞혀 주시면 돼요. 그러니까 한 사람당 세 문제, 총 여섯 문제를 맞히시면 되겠습니다.”

“네? 같이 푸는 게 아니라 따로요?”

“네, 따로 맞혀 주셔야 돼요.”

“…….”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정우진이 나를 보다가 웃으며 가볍게 팔을 들었다.

“파이팅.”

“……파이팅.”

힘없이 덩달아 구호를 외친 뒤 나는 자신 없는 얼굴로 송철 피디를 바라봤다.

“준비 되셨어요? 답은 3초 안에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네? 3초는 너무 짧지 않아요? 그치?”

내가 묻자 가만히 있던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너무 짧아요. 한 10초 정도 주세요.”

솔직히 퀴즈 문제 답을 맞히는데 10초는 내가 생각해도 좀 오버다 싶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지만 일단 우기고 봤다.

“맞아요, 적어도 10초는 주셔야죠.”

“아니, 10초는 너무 길지 않아요?”

“10초가 뭐가 길죠? 그냥 눈 한 번 깜빡였다가 뜨면 10초 지나는데.”

“그 정도면 그냥 주무신 거 아닌가요?”

송철 피디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계속 뻔뻔하게 정색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이번에는 정우진이 나섰다.

“그럼 타협해서 8초 정도로 주세요.”

“좋다, 8초.”

내가 박수를 치며 호응하자 송철 피디가 한숨을 내쉬며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5초 드릴게요. 그 이상은 절대 안 돼요.”

5초까지 늘어난 것만 해도 이미 목적은 달성했기 때문에 나와 정우진은 서로 한번 시선을 마주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

“5초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뭔가 말려들었다는 생각이 든 건지 송철 피디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자, 그럼 서주 씨부터 시작할게요. 5초 안에 대답 안 하시면 탈락입니다.”

“문제 다 읽고 난 다음부터 5초인 거죠?”

“네, 맞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한 표정으로 송철 피디를 가만히 바라봤다. 순식간에 정적이 흐르면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숨을 삼키며 집중하고 있자 종이 카드를 가만히 보고 있던 송철 피디가 입을 열었다.

“낙타의 혹은 대부분 이것으로 차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네? 낙타요? 사막 낙타?”

“5, 4, 3…….”

“아니, 잠깐만……. 물?”

빠르게 줄어드는 카운트다운에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떠오르는 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 자신이 없는 작은 목소리에 송철 피디가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난 것 같은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땡!”

“…….”

“…….”

“정답은 지방이었습니다.”

나는 멀뚱멀뚱 송철 피디를 보다가 멋쩍은 표정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아니, 낙타 혹에 물 있는 거 아니었냐…….

뒷목을 긁적거리자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진짜 본 게임인 거죠?”

“네?”

“처음은 원래 연습 게임 아니에요?”

순진무구한 얼굴로 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질 못했다. 역시 전교 1등이라더니, 저 새끼 배우는 것도 빨랐다.

“그치, 첫판은 연습 게임이지.”

“맞아요, 그게 원래 국룰이랬어요.”

“맞아, 그게 국룰이지.”

정우진과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송철 피디를 바라보며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작전이 통한 건지, 아니면 이렇게 빨리 끝나면 재미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결국 송철 피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제 진짜 본 게임인 거예요. 나중에 딴말하기, 금지.”

“그럼요.”

“당연하죠.”

어렵사리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어 낸 우리는 다시 문제를 풀 준비를 했다. 하지만 조금 전 틀려서 그런지 영 자신이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정우진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먼저 해.”

“네.”

“그럼 시작할게요. 우진 씨, 먼저?”

우리의 말을 들은 건지 송철 피디가 물었다. 정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편안한 얼굴로 가만히 질문을 기다렸다. 긴장한 기색도 없어 보여서 역시 저게 전교 1등의 위력인 것인가, 감탄하고 있는데 송철 피디가 문제를 냈다.

“한 입 크기로 만든 중국의 만두로 3,000년 전부터 중국 남부 광둥 지방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한…….”

“딤섬.”

“정답!”

“…….”

정우진은 송철 피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정답을 말해 버렸다. 그걸 보니 갑자기 더 긴장이 되기 시작해서 숨을 삼키는데, 쉴 틈도 없이 송철 피디가 나를 보며 질문을 쏟아 냈다.

“그럼 다음 문제 가겠습니다. 돼지의 목심과 등심의 연결 부위에 있는, 사람 손바닥만 한 오각형 모양의…….”

“가브리살!”

“정답!”

천만다행으로 내가 아는 게 나와서 나도 질문이 끝나기 전에 정답을 외쳤다. 이게 뭐라고,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옆에 있는 정우진을 안을 뻔했다. 멈칫한 내가 양손을 올리자 정우진이 내 손바닥에 제 양손을 부딪쳤다.

그래도 엄청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 아직 네 문제나 더 남아서 다시 집중을 하자 송철 피디가 말했다.

“이번에는 수도 맞히기, 갑니다. 우진 씨부터.”

“네.”

“덴마크의 수도는?”

“코펜하겐.”

“정답!”

아, 수도는 자신이 없는데……. 이번에도 정우진이 빠르게 정답을 맞혀서 송철 피디가 곧장 나를 보며 물었다.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

“정답!”

“와!”

내가 기뻐하자 이번에는 정우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곳에 손바닥을 내려치며 말했다.

“하노이 쌀국수 완전 맛있거든.”

“가 보셨어요?”

“아니, 동네에 하노이 쌀국수라고 맛있게 하는 데가 있어. 다음에 같이 가자. 내가 사 줄게.”

“좋아요.”

흥분해서 그렇게 말하자 정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진짜 고지가 멀지 않았다. 둘 다 딱 한 문제씩만 더 맞히면 된다.

“그럼 마지막으로는 난센스 퀴즈 가겠습니다. 우진 씨부터.”

난센스? 약간 애매하긴 했지만 사실 무슨 퀴즈를 내도 나는 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싶었다.

“형을 매우 좋아하는 동생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

“5, 4…….”

질문을 들은 정우진이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형을 매우 좋아하는 동생? 이게 뭐지? 나도 답을 모르겠어서 문제를 곱씹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고 있는데, 문득 정우진이 나를 바라봤다.

“3, 2…….”

카운트다운은 계속 줄어들고 있는데 급한 기색도 없이 가만히 나를 보던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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