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6/190)

91화

시장 구경을 다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리를 찍고 있던 카메라맨들과 스태프들도 다 어디론가 가고, 집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바로 거실 한복판에 쓰러졌다.

“촬영할 땐 몰랐는데 카메라 꺼지니까 갑자기 피곤하네.”

집 내부의 고정 카메라는 여전히 우리를 찍고 있었지만, 어쨌든 집 안엔 우리밖에 없어서 그런지 긴장감이 확 풀렸다.

“잠깐 눈이라도 붙이세요.”

급격하게 몰려오는 수마에 무거운 눈을 천천히 껌뻑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쌩쌩해 보이는 얼굴에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진짜 체력이 엄청 좋구나.”

“체력이요?”

“김밥 싸느라 잠도 못 잤다고 하지 않았냐? 운전도 오래 했는데 안 피곤해?”

“전 괜찮아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아 보여서 다시 웃어 버렸다.

“그래도 좀 쉬어. 내가 봤을 때 너 지금 약간 각성 상태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계속 움직이고 있는데 안 피곤하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비몽사몽의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면서 눈을 감자 정우진이 말했다.

“여기서 주무시려고요? 침대에서 안 주무시고요?”

“어어…….”

이미 반쯤 잠이 들어 버린 나는 정우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대충 대답했다. 계속 옆에서 뭐라고 종알거리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시장에서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꿈도 아니고 어릴 때 장면이 그렇게 생생하게 눈앞에 나타난 경우는 없었는데……. 그런 시골 같은 곳이 오랜만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정우진이 오빠 같은 소리를 해서 그러나?

근데 오빠라는 소리를 안 들어 본 것도 아니고 자주 들었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정우진이랑 유진이가 닮은 것도 아니고…….

“…….”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눈을 떴다. 뿌연 시야로 천장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내 옆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

좀 닮았나?

갈색빛이 조금도 돌지 않는 완전히 새카만 머리카락에 얼굴도 하얗고 눈도 검은색이고……. 사실 이렇게만 말하면 흔한 특징이긴 했지만, 의외로 저렇게 머리카락이 완전히 검은 사람은 드물었다. 너무 검어서 언뜻 보면 어두운 푸른색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였다.

혹시 염색했나?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자는 줄 알았던 정우진이 휙 하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너 혹시 머리 염색한 거야?”

“염색이요? 아니요, 이거 제 머리카락이에요.”

“되게 까매서 염색한 줄 알았는데.”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내 쪽으로 자기 머리를 살짝 들이밀더니 물었다.

“만져 보실래요?”

“갑자기?”

“안 믿는 거 같아서요.”

“아니야, 믿어. 안 믿긴 왜 안 믿어. 그리고 내가 뭐 만진다고 그런 걸 알겠냐?”

뜬금없는 말에 황당해서 웃으며 말하자 정우진이 자기도 덩달아 웃더니 다시 물었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세요? 주무시는 것 같더니…….”

“아까 시장에서……. 그냥 갑자기 걷고 있는데 보였어.”

“제 머리카락이요?”

“어, 그냥 갑자기. 그래서 궁금했어.”

그 말을 하며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바라봤다.

머리카락만큼이나 새카만 눈이 마침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구름이 많은 건지, 햇빛이 자꾸 들어왔다가 안 들어왔다가 하면서 정우진의 얼굴 반쪽을 비추다가 안 비추다가 했다.

“…….”

“…….”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예전 일이 떠올랐던 건지…….

“너 눈이 되게…….”

“까매요?”

“어? 어…….”

순간 별 같다고 하려다가 정신을 차리니 잠이 싹 달아났다.

“빨리 좀 쉬어. 너 지금 눈이 완전 졸린 눈이야.”

“제가요? 별로 안 졸린데…….”

“아니야, 엄청 졸린 눈이야. 빨리 눈 감고 좀 자.”

딱 봐도 졸린 눈은 아니었지만 내가 계속 우기자 정우진이 결국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덩달아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아까는 그렇게 잠이 오더니 좀 전의 대화 때문인지 졸리지가 않았다.

“…….”

그냥 까맣고 하얗고 눈도 반짝거려서 잠깐 생각이 난 것 같은데……. 걔는 뭐 하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가끔 찾으러 가 봤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이름도 흔한 데다 성씨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다는 김씨라 찾을 방도가 없었다. 혈연관계라거나 그런 것도 아니니 어디에 가서 대신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뭐, 워낙 어릴 때 일이라 잘 기억도 안 나고, 동네 친구였던 것뿐이라 기를 쓰고 찾을 이유는 딱히 없어서 나도 그냥 그러고 말았지만……. 종종 그냥 생각이 나고는 했었다.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서 더 미련 같은 게 남아 있는 건지도 몰랐다.

“…….”

아니면 그때 화내지 말걸, 하는 생각이 들어서…….

“…….”

문득 떠오르니 울적해져서 나는 몸을 뒤척거리다가 정우진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돌아누웠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자 편안해지고 다시 잠도 오기 시작했다.

***

방충망에는 끈적거리는 뿌연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녹슨 창살 안도 어두워서 아무리 고개를 들이밀어 봐도 당최 보이질 않았다.

혹시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이 있을까 봐 소리를 내어 부르지도 못하고 쪼그려 앉아 계속 기웃거리고 있는데, 문득 어둠 속에서 뭐가 나타났다.

“혼자 있어?”

내 물음에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안심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근데 넌 학교 안 가? 맨날 집에만 있네.”

“…….”

“아직 어려서 그런가? 유치원도 안 가?”

“…….”

“밥 먹었어? 너 배 안 고파?”

“…….”

계속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질 않았다.

유진이는 며칠 전에 봤을 때부터 계속 같은 옷만 입고 있었다. 머리도 여전히 산발이라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고…….

“불 좀 켜면 안 돼?”

“…….”

“안 어두워? 왜 계속 불을 꺼 놓고 있어? 낮이라 그래? 우리 숙모도 낮에 불 켜지 말라고 엄청 뭐라고 하는데……. 너도 그래?”

“…….”

이쯤 되면 한마디 해도 될 텐데, 유진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계속 나만 말해서 그런지 재미가 없어져서 멀뚱멀뚱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또 올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고개를 돌리자 유진이가 작은 창문으로 조금 더 다가와 서 있는 게 보였다.

“나 불렀어?”

“…….”

“어우, 답답해. 아무튼 난 간다.”

“오빠.”

다시 한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차피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못 들은 척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몇 번이나 동네를 돌고,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기도 하고, 벽을 발로 차기도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걔가 말만 좀 더 잘 할 수 있었으면 혼자 놀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니면 내일은 말 안 하고 놀 수 있는 게 뭔지 찾아볼까? 술래잡기나 숨바꼭질 같은 건 꼭 말을 안 해도 되니까…….

“다녀왔습니다.”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집으로 가 빠르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손을 씻고 세수도 하고 양치질도 한 다음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아, 이거 먹기 싫다고!”

“이게 어디서 반찬 투정이야!”

형이랑 숙모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일 유진이랑 무엇을 할지 한참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

아침에 조금 일찍 나와서 학교에 가기 전에 유진이네 집으로 갔다. 이른 아침이긴 했지만 날이 더워서 그런지 창문은 열려 있었다. 아침에 오나, 낮에 오나 늘 집 안이 어두워서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웃거리다가 그냥 학교나 가려고 했는데, 불쑥 하얀 얼굴이 튀어나왔다.

“뭐야, 있었어?”

“…….”

“나중에 학교 마치고 올 테니까 술래잡기 같은 거 하자. 알았지?”

“…….”

“나와서 기다려.”

유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쟤는 말이 별로 없는 애였다. 그래도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나는 조금 들뜬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수업을 들으면서 졸다가 점심시간에는 밥을 잔뜩 먹었다. 요구르트도 하나 나왔는데, 내가 먹을까 하다가 갑자기 유진이가 생각나 이건 따로 가방에 챙겼다. 학교를 마치고 유진이네 집으로 가자 창문 안에 사람이 보였다.

“왜 안 나와 있어?”

“오빠.”

서 있으면 얼굴도 안 보이고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서 바닥에 주저앉아 허리도 숙이고 고개도 숙였다.

“응?”

“나 못 나가.”

“왜?”

“못 나가.”

왜지? 엄마가 나가지 말라고 했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유진이를 보다가 그 너머에 어두운 방 안을 바라봤다.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

내 물음에 유진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몰래 나오면 안 돼? 조금만 놀다가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잖아.”

“못 나가.”

“집 앞에서 놀다가 엄마랑 아빠 올 시간 되면 들어가면 되지.”

계속 회유를 해 보려 했지만 유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고개만 흔들었다. 진짜 엄마랑 아빠 말 잘 듣네…….

“음, 그럼 언제 나올 수 있는데?”

“나 못 나가.”

“오늘 말고 다음에. 아무튼 너 요구르트 먹을래?”

나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안쪽을 뒤적거리면서 물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멋대로 요구르트를 꺼내 주려다가 멈칫했다.

“이거 좀 열어 봐.”

쇠창살 사이로는 손이 들어갔지만 방충망 때문에 손을 넣을 수가 없었다. 내 말에 유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낑낑거리며 방충망을 열었다. 조금씩 열릴 때마다 귀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가 계속 났다.

“너 먹어.”

“…….”

“나는 학교에서 먹고 왔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받지 않을까 봐 거짓말을 해 버렸다. 안으로 손을 넣어 빨리 받으라는 듯 팔을 흔들자 유진이가 요구르트를 받았다.

“…….”

“…….”

어서 먹으라는 듯 가만히 쳐다봤지만, 유진이는 그걸 양손으로 들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나중에 먹으려고 저러는 건가? 아니면 지금 먹기 싫은가? 요구르트 싫어하나?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받아먹지 말라고 했나? 근데 우린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닌데…….

그러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혹시나 싶어 물었다.

“너 혹시 그거 못 뜯어?”

“…….”

“에휴, 완전 아기네……. 줘 봐, 오빠가 해 줄게.”

내가 다시 손을 내밀자 유진이가 내게 요구르트를 주었다. 나는 요구르트의 껍질을 조심조심 뜯어 다시 창살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제 먹을 수 있지?”

“응.”

유진이가 요구르트에 입을 대는 걸 보니 뿌듯해져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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