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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97/190)

92화

학교 급식으로 요구르트나 우유, 젤리 같은 게 나오면 이제 유진이에게 주려고 가방에 챙기는 게 일상이 됐다. 어떤 애가 안 먹는다고 해서 그것도 같이 챙기면 그날은 유진이랑 같이 먹을 수 있었다.

“너 수학 알아? 더하기랑 나누기랑 곱셈이랑 그런 거를 수학이라고 해.”

“…….”

초코우유에 빨대를 꽂는 것도 못 해서 대신 꽂아 주자 아까부터 유진이는 빨대에서 입을 떼질 않았다.

“너도 학교 오면 이런 거 배울 거야.”

“…….”

“엄청 어려우니까 수업 시간에 졸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돼. 이거 진짜 엄청 어려워서……. 야, 듣고 있어?”

“…….”

자그마한 창문 앞에 엎드린 채 숙제를 하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맨바닥에 앉는 건 그렇다 쳐도 엎드리는 게 좀 그랬는데, 이젠 이것도 익숙해졌다. 더럽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바닥에 대충 후후 바람을 분 다음에 엎드려 유진이를 보면서 숙제를 하는 것도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숙제가 없는 날에는 여기서 그림을 그리거나 받아쓰기 틀린 걸 따라 쓰기도 했다.

“넌 학교 언제 다녀? 같이 다니면 재미있을 텐데.”

“오빠, 이거 너무 맛있어.”

“초코우유?”

“응.”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색 눈이 반짝거렸다. 그동안 가지고 온 것들 중에 제일 반응이 좋은 것 같았다.

사실 가방에는 우유가 하나 더 있었다. 초코우유는 아니고 바나나우유긴 하지만, 나중에 저녁이 되면 배고플 때 먹으려고 챙겨 놨던 건데……. 조금 고민하다가 하는 수 없이 가방에서 우유를 꺼내 빨대까지 꽂아 준 뒤 유진이에게 줬다.

“이것도 먹어.”

내가 오빠니까 어쩔 수 없지…….

“그건 초코우유 아니고 바나나우유인데……. 그것도 맛있지?”

“웅.”

빨대를 물고 있어서 그런지 발음이 조금 어눌하긴 했지만, 잘 먹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

“초코가 좋아, 바나나가 좋아?”

“이거.”

“바나나?”

나는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냐면 내 주변 애들은 다 바나나보다 초코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초코 맛을 더 좋아하는 줄 알고 처음에도 초코우유를 줬던 건데…….

“난 초코우유가 더 좋으니까 다음에 같이 먹으면 딱 좋겠다. 넌 바나나 먹고 난 초코 먹고.”

나는 유진이가 바나나우유를 빨대로 쪽쪽 빨아 먹는 걸 가만히 보다가 다시 수학 숙제를 했다. 어렵긴 했지만 계속 보다 보니까 알 것 같기도 해서 집중을 했다. 그리고 숙제를 끝마치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우유를 다 마신 건지 유진이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 마셨어?”

“응.”

“나도 숙제 다 했으니까 이제 가 봐야겠다. 내일 또 올게.”

가방에 짐을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유진이가 창살을 잡고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오빠.”

“응?”

“나 아직 다 안 마셨어.”

“다 안 마셨다고? 우유?”

아깐 다 마셨다면서?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유진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우유에 다시 입을 댔다. 빨대를 입에 물고 빨아들이자 바람이 딸려 올라오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쉭쉭.

“…….”

“…….”

슈우우욱.

“…….”

“…….”

우유가 한 방울도 남지 않은 건지 큰 소리도 나지 않고, 정말 그냥 바람 소리밖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 먹었네.”

“……아니야.”

“안 나오잖아.”

“나와.”

나는 묘한 표정으로 유진이를 보다가 다시 털썩 그 앞에 앉았다.

“그럼 빨리 마셔.”

“…….”

슉슉.

“…….”

슙…….

“…….”

“…….”

몇 번 더 빨대를 빨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그냥 그걸 입에 물고만 있었다.

“다 마셨어?”

내 물음에 유진이가 다시 빨대를 슉슉 소리 내어 빨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이는 빨대를 입에 물고 화들짝 놀라더니 힘껏 다시 힘을 줘 빨았다.

“내일 또 올게.”

“아직…….”

“이제 가 봐야 돼.”

곧 해가 질 것 같아서 이제는 정말 집에 가야만 했다. 별말도 안 한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혼자 있을 땐 시간도 엄청 느리게 가는 것 같았는데.

“내일 언제 와?”

“응? 내일? 학교 가기 전에 잠깐 올까?”

“응.”

“알았어. 그럼 아침에 올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진이가 다급하게 붙잡듯 물었다.

“아침 언제?”

“학교 가기 전에.”

“그게 언제야?”

“너 시계 볼 줄 알아?”

유진이가 고개를 흔드는 걸 보며 나는 고민하다가 다시 물었다.

“숫자 셀 줄 알아?”

“…….”

“음……. 그럼 그냥 밤에 자고 일어나서 조금 더 있다가 올게.”

어쩐지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근데 쟤는 도대체 몇 살인데, 숫자도 못 세고 시계도 못 보고……. 학교를 안 다녀서 그런가?

근데 나는 학교 가기 전에도 숫자는 셀 줄 알았는데. 엄마가 가르쳐…….

“…….”

갑자기 엄마 생각을 해서 그런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코도 찡하고 숨이 차기 시작해서 나는 유진이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뒤돌아서서 미친 듯이 뛰었다.

***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깔고 엎드린 뒤 공책에 숫자를 차례대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엄마가 알려 줄 때도 이렇게 내게 가르쳐 줬었다.

“뭐 하냐?”

“…….”

“너 아직도 숫자 다 몰라?”

“…….”

“와…….”

강수민이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숫자를 썼다. 너무 작으면 잘 안 보일 수도 있고, 따라 쓰려면 공간도 필요해서 최대한 넓게 띄워서 썼다. 딱 100까지만 쓰고 공책을 덮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 강수민이 배가 아프다고 학교에 가기 싫다며 울고 있었다. 숙모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삼촌은 일찍 나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찬물로 씻고 옷까지 입은 후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다녀오겠습니다.”

“얼른 일어나라니까! 지각해!”

“아, 배 아프다고!”

아침부터 얼마나 더운지 햇볕이 뜨거웠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유진이네 집으로 뛰어갔다. 도착하기도 전에 창문 바로 앞에서 유진이 얼굴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응.”

“너 이거 보고 있어.”

나는 다급하게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유진이에게 건네줬다.

“나중에 학교 갔다 와서 알려 줄게.”

“…….”

“숫자 세는 거. 아무튼 난 간다.”

“오빠, 언제 와?”

그 말에 나는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언제쯤 온다고 하면 숫자도 모르고 시계도 못 보는 유진이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음……. 점심 먹고 좀 더 있다가.”

“…….”

“심심하면 그거 펼쳐서……. 아, 그거 이리 줘 봐.”

내가 손을 내밀자 유진이가 다시 공책을 내게 건네줬다. 나는 공책을 펼쳐 어젯밤에 썼던 숫자들을 보여 주며 말했다.

“심심하면 이거 따라 쓰고 있어. 너 연필은 있지? 볼펜이나.”

“…….”

“없어? 그럼 내 거 하나 줄 테니까 이걸로 쓰고 있어. 여기에 빈칸 보이지? 아니면 뒤에 빈 공간 있으니까 여기에 쓰든가……. 마음대로 해.”

가방에서 연필을 꺼내 공책과 함께 건네주자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올게.”

“…….”

“알았지?”

“응.”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진이가 뒤로 넘어갈 것처럼 고개를 바짝 들고 나를 쳐다봤다. 햇빛이 이렇게나 쨍쨍한데도 유진이가 있는 방 안은 어둡고 추워 보였다.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러다가 지각할 것 같아서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갔다 올게.”

“…….”

손을 흔들자 유진이가 덩달아 어정쩡한 자세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

오늘 점심시간에는 가지고 갈 만한 게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김치 쪼가리 같은 걸 싸 갈까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관뒀다.

학교를 마치고 급한 걸음으로 유진이네 집으로 갔다. 아침에는 창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니 이번에는 보이질 않았다.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댄 채 고개를 숙였다.

“…….”

눈에 잔뜩 힘을 줘도 안쪽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냥 장롱 같은 커다란 가구의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도 없겠지?

아침에 오나, 학교를 마치고 오나 집 안에 어른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작게 소리를 내보았다.

“나 왔어.”

그리고 조금 기다리자 작고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유진이가 공책을 끌어안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뭔가를 밟고 올라서 창문 가까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공책에 낙서하고 있었어?”

“응.”

“내가 오늘 숫자 가르쳐 줄게. 지금 집에 아무도 없지?”

내 물음에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 집에서 할까? 너 못 나온다고 했으니까.”

“집에서?”

“응, 어디로 들어가? 엄마나 아빠 오기 전에 나가면 안 들킬 거야.”

“…….”

계속 창문으로만 봐서 현관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털고 있는데, 유진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아서 나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어디로 가? 이쪽?”

“…….”

“응?”

“나가면 안 되는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목소리에 나는 결국 다시 바닥에 앉았다.

“네가 나오라는 게 아니라 내가 너희 집에 들어가는 거야. 그것도 안 돼?”

“누구 오면 소리 내지 말라고 했는데.”

“소리? 갑자기 무슨 소리?”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유진이가 하는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현관문이 어디에 있어?”

“몰라.”

“모른다고? 너 밖에 나왔다가 집 어디로 들어가는데?”

“…….”

혹시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걸까? 하지만 표정을 보면 정말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의 골목과 건물을 보면서 탐정처럼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창문이 저기에 있으니까……. 집은 대충 이쯤에 있을 거고……. 여긴 건물 안쪽이니까 아닌 거 같고, 골목 쪽으로 들어가야 하나?

유진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살피다가 나는 골목길 안쪽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조심조심 밑으로 내려가니 쓰레기가 쌓여 있는 작은 공간과 녹슨 철문이 보였다.

혹시 여긴가?

“유진아.”

나는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이름을 불렀다.

“…….”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이곳이 아닌가 싶어 걸음을 돌리려는데, 문 안쪽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너야?”

내가 다시 묻자 문을 콩콩 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여기가 너희 집 맞아? 문…….”

문 열어 달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보이는 커다란 자물쇠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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