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102/190)

97화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먼저 나와 있던 정우진이 내게 하얀 목화를 건네주며 말했다.

“선배님은 이거 들고 찍으세요.”

“내가 갈대 아니야?”

“서로 바꿔서 들고 찍는 게 더 좋아요.”

그렇게 찍으라고 했나? 아무튼 주니까 받아서 몇 번 흔들다가 촬영을 할 창문 앞으로 갔다. 때마침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예쁘게 들어오고 있었다. 해가 움직이기 전에 한 컷이라도 더 찍기 위해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금 너무 따뜻한 분위기거든요? 두 분이서 그냥 편안하게 앉아서 카메라 보고 웃어 주세요. 자연스럽게.”

“네.”

“알겠습니다.”

이런 사진 촬영은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 긴장이 돼서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두 분이서 서로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서서 찍어 볼까요?”

“포즈는 편하신 대로 취해 주세요. 아무렇게나 움직이셔도 됩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마음대로 움직이시면 저희가 알아서 좋은 컷만 골라서 쓸게요.”

“지금 표정 너무 좋아요.”

그래도 계속 찍다 보니 조금씩 긴장이 풀려서 처음보다는 자연스러운 얼굴로 찍을 수 있게 됐다. 정신없이 촬영을 하고 찍은 걸 확인하자 잘 나온 사진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조금 더 찍어 볼까요?”

강산 작가의 말에 대답을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정우진이 먼저 의견을 냈다.

“선배님, 앉아서 이렇게……. 살짝 누워 있는 듯한 자세로 찍는 건 어때요?”

“어떻게?”

“이렇게 하고 웃으면서…….”

나는 정우진이 하자는 대로 몸을 맡겼다. 내가 소파 팔걸이 쪽으로 비스듬하게 누운 듯한 자세고, 정우진이 그런 나를 한쪽 팔로 받치고 있는 자세였다. 안정적으로 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정우진의 어깨로 팔을 두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면 너무 자세가 좀…….

“오, 괜찮은데요? 일단 몇 컷 찍어 보고 확인해 볼게요.”

사진 찍는 사람이 좋다고 하니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활짝 웃어 보라고 하고, 둘이서 눈을 마주쳐 달라고 하기도 해서 전부 하라는 대로 했다.

“잠시만요.”

그리고 강산 작가가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나와 정우진은 조금 전 사진을 찍는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정우진이 들고 있던 갈대를 살살 움직이기 시작했다.

“……?”

고개를 슬쩍 숙여 보자 갈대 끄트머리가 옷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야, 간지러워.”

“…….”

“간지럽다고.”

“…….”

“……?”

계속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는 정우진을 의아한 표정으로 보다가 들고 있던 목화로 얼굴 쪽을 팍팍 때렸다.

“하지 말라고.”

“아파요.”

“조금만 더 찍을게요.”

그 말에 다시 집중을 하려는데, 정우진이 자꾸만 장난을 쳤다. 이 와중에도 계속 셔터가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참고 참다가 결국 나는 카메라 쪽을 보며 웃는 얼굴로 복화술을 했다.

“지금 일하는 중이잖아. 그만하라고.”

“저도 일하는 중이에요.”

처음에 만났을 때는 말도 잘 못하더니 이젠 틈만 나면 장난질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대충 받아 주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참으려고 해도 갈대에 털 같은 게 달려서 살에 닿을 때마다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야!”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벌떡 일어서자 정우진이 화들짝 놀라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들고 있던 목화로 정우진의 정수리를 탁탁 때렸다.

“그만 좀, 그만 좀, 그만 좀 하라고!”

“아야, 아야, 아야.”

별로 아프지도 않을 텐데, 정우진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내가 때릴 때마다 과장된 몸짓으로 아픈 척을 했다.

“이거 두 분 다 표정 엄청 좋은데요? 와서 보실래요?”

그때 강산 작가가 우리를 불렀다. 나는 정우진을 때리느라 모가지가 꺾여 떨어진 목화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며 그에게 다가갔다.

화면에는 강산 작가의 말대로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과, 나를 보며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정우진의 얼굴이 잘 나온 컷이 보였다. 말했던 것처럼 표정은 내가 봐도 정말 좋았지만, 뭔가 자세도 그렇고 희한하게 요상한 분위기가 나고 있었다.

“와, 서주 씨 배에 복근이…….”

같이 화면을 보던 강산 작가의 말에 괜히 민망해져서 뒷목을 긁적거렸다. 정우진이 장난을 치느라 옷이 살짝 들려 배가 보이고 있었다. 난 아래쪽을 보질 않아서 옷이 저렇게까지 위로 들려 있는 줄은 몰랐다.

“근데 노출 사진 괜찮으세요?”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송철 피디가 장난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 말에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진심을 다해 말했다.

“원하시면 가능합니다.”

“정말요?”

놀라서 묻는 송철 피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강산 작가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제가 누드는 전문이 아닌데…….”

“이참에 도전해 보시는 것도…….”

“아니, 전 누드라고까지는 말 안 했는데요…….”

그냥 복근이 살짝 보이거나 상체 탈의 정도는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설마 그걸 누드라고 받아들일 줄이야. 당연히 장난이겠지만 그냥 이 상황이 웃겨서 벙싯대고 있는데, 문득 정우진이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정우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너 왜 그래?”

“선배님, 그런 사진도 찍어 보셨어요?”

“뭐?”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강산 작가와 송철 피디가 화면을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 정도는 진짜 괜찮지 않나요? 갈대에 살짝 가려져서 그렇게 너무 노골적이지도 않고…….”

“그건 그런데, 좀 다른 쪽으로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요?”

“좀 그런가?”

“음, 근데 표정은 진짜 좋아요. 전체적인 분위기도 너무 좋고. 빛도 예술이야.”

옆에서 두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든 정우진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노출 사진도 찍어 봤어요?”

“찍어 봤겠냐? 갑자기 뭔 소릴 하는 거야.”

“아니, 아까 가능하다고…….”

“너는 그렇게 장난을 많이 치면서 진담이랑 농담도 구분을……. 아니, 애초에 네가 자꾸 옷 들추고 간지럽혀서 저렇게 찍힌 거잖아.”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옷이 저렇게 많이 들려 있는 줄 몰랐어요. 그리고 갈대 끝에 자꾸 옷이 걸려서 무거워지는데 어떡해요.”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빼면 되지.”

“뭐가 걸리면 자꾸 들고 싶어지잖아요.”

저놈은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상한 억지를 부리는 정우진을 미친놈 보듯 하고 있는데, 어느새 스태프들까지 와서 전부 화면을 보면서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노렸다는 말 무조건 나올 거 같은데?”

“근데 노린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뭔가 두 분 촬영하실 때 분위기 생각하면 또 되게 잘 어울리지 않아요? 계속 이런 사진 속 같은 분위기였고…….”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장난처럼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진지한 것 같아서 나는 당황한 얼굴로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이걸 진짜 포스터로 쓴다고? 좀 심한 거 아닌가? 오두막집 남자들이 아니라 무슨 오두막집 게이들 같은데…….

뭔가 말은 안 했지만 사전 미팅을 할 때부터 그런 낌새가 느껴지긴 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같은데……. 아닌가? 이 정도는 괜찮은가?

계속 보다 보니까 이 정도는 진짜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일단 이건 나중에 다시 보고, 준비해 주세요.”

강산 작가의 말에 나와 정우진은 다시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몇 컷을 더 찍고 옷도 갈아입고 자리를 옮긴 뒤에도 한참 더 촬영을 했다. 즉흥적으로 이런저런 소품들을 쓰기도 하고 밭에서도 사진을 찍다 보니 별로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금세 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런 희한한 분위기의 컷은 그 뒤로 나오지 않았고, 처음 강산 작가의 의도대로 자연스럽고 목가적이며 편안한 분위기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촬영이 끝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다들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희는 아마 돌아가는 중에 해결하지 싶어요.”

강산 작가 일행들은 이제 이곳에서 더 할 일도 없으니 금방 장비를 챙겨서 떠날 것 같았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다른 일정 없으시면 같이 점심 드시고 가실래요? 우리 어제 산 고기 있으니까 그걸로 비빔국수 해서 같이 먹어도 되지 않나?”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을 거 같아요. 국수도 많고 고기도 어제 제법 많이 사서…….”

“아, 혹시 그거예요? 오이무침?”

웃으며 묻는 강산 작가의 말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정우진이 내 눈치를 보더니 강산 작가를 질책하듯 말했다.

“오이무침이라니요? 누가 봐도 비빔국수잖아요.”

“아, 난 그거 오이무침에 한 표 던졌었는데.”

“안녕히 가세요.”

정우진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자 강산 작가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괜히 말을 얹기도 민망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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