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아무튼 모두 다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뒤, 나와 정우진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희가 뭐 도와 드릴 건 없을까요?”
“네, 별로 할 것도 없어서 괜찮아요. 그냥 쉬고 계세요.”
내 말에 오이를 씻고 있던 정우진이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민박집 같아요.”
“그러네. 드디어 컨셉에 맞는 행동을 하네. 근데 너는 왜 이렇게 자꾸 귓속말을 하냐?”
나도 모르게 덩달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고 할 때 송철 피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요, 어차피 마이크에 다 잡히는데…….”
“…….”
“…….”
그 말에 나와 정우진은 동시에 송철 피디를 바라봤다.
아, 작게 말해도 마이크 때문에…….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아니, 정우진은 나한테 어떤 말을 했더라? 별말 안 했지?
괜히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쨌든 이제라도 알았으니 정우진도 귓속말을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정우진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어차피 다 잡히면 계속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
나는 길거리에서 나체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듯 정우진을 빤히 쳐다봤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생각하는 게 정말 범상치 않은 놈이었다.
“오이는 제가 썰까요?”
그래도 한 번만 하고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정우진이 또 귓속말을 했다. 어이가 없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좀……, 너는 1절만 할 수 없겠니?”
“장난이 아니라 진심인데요?”
“귓속말하지 말고 그럴 거면 텔레파시를 보내.”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세상 무해하게 웃으며 뻔뻔하게 말하는 정우진을 보고 혀를 차고 있는데, 송철 피디 옆에서 우리를 보고 있던 강산 작가가 말했다.
“두 분 알고 지내신 지 오래되셨어요?”
“친하게 지낸 건 얼마 안 됐어요. 그 전에는 그냥 같은 소속사 후배?”
말을 하다 보니까 정말 정우진이랑 친해진 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인데, 정우진하고는 정말 급속도로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촬영하기 전에도 그 핑계로 만난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제가 그래도 우진 씨랑 일을 제법 같이했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거 같아요.”
왠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몰랐는데 얘가 낯을 엄청 가리더라고요. 저도 약간 그런 편이거든요. 처음에는 낯가리다가 친해지면 좀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오……. 우진 씨가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강산 작가를 보니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정우진은 첫인상이랑 실제 성격이 워낙 차이가 나서…….
“가만히 있으면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딱 봤을 때 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라서 다가가기 힘든 느낌이긴 한데, 친해지면 완전 초딩이에요. 장난도 엄청 치고 까불거리고…….”
“초딩이요? 원래 우진 씨 별명이 얼음 왕자 이런 거 아니었어요? 갭이 너무 크게 나는데.”
“아, 초딩은 너무 심한가? 근데 장난치는 거 보면 완전…….”
그러다가 문득 정우진이 극히 말이 없다는 걸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불나불하더니 지금은 장금이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양념장을 만들고 있었다.
“왜 갑자기 아무 말도 안 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으니, 또 굉장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평소 대부분 이러고 있을 테니 강산 작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있었어요.”
“말을 했다고?”
“네.”
“……무슨 말?”
아무 말도 안 들렸는데? 내가 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정우진이 어쩐지 원망 어린 눈으로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텔레파시 보냈어요.”
“…….”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진지한 표정이라 뭐라고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강산 작가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셨죠?”
강산 작가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냥 계속 웃기만 했다.
“지금도 계속 텔레파시 보내고 있어요.”
그때 정우진이 다시 초능력을 쓰는 듯했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까. 한참 말을 고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잘 받았다.”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열심히 양념장 만들겠다고.”
“아닌데요?”
“고기를 맛있게 구워 보겠다고.”
“아니에요.”
어쩐지 뚱해 보이는 얼굴이라 의아해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던 강산 작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대화지?”
송철 피디도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대화를 저런 식으로 많이 하시더라고요.”
“아, 통하는 게 있어서 친해지셨나 보다.”
“그런가 봐요. 보고 있으면 신기해요.”
“정말 신기하네요.”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다시 요리에 전념했다.
양념장을 다 만든 정우진이 고기를 굽고, 내가 국수를 만들었다. 삶은 면을 차가운 물에 씻고 정우진이 만들어 둔 양념장과 야채를 넣어 비비고 오이와 고기까지 올리니 그럴듯한 비빔국수가 완성되었다.
“와, 비주얼 예술이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송철 피디와 강산 작가를 포함한 스태프들의 인원이 많아서 집 안에서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보니 뭔가 잔칫집 같기도 했다.
이제 나도 먹으려고 자리를 잡는데, 정우진이 내 몫의 국수를 상에 놔주었다. 그런데 국수의 모양이 어딘지 좀 이상했다.
“뭐야, 이거?”
“선배님 국수는 제가 특별히 신경을 써 봤어요.”
“…….”
비빔국수 가운데에는 구운 고기가 소복하게 올라가 있었고, 그 주위로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오이 세 개가 완벽한 삼각형 모양으로 대못처럼 박혀 있었다.
국수의 상태를 보며 주춤하다가 시선을 돌리자 정우진이 기대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상을 바라는 듯한 표정이라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어……. 예술 작품 같네.”
“정말요?”
너무 지나치게 독창적이고 예술적이라 범인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나는 국수 그릇을 조심스럽게 들어 카메라에 보여 주며 말했다.
“우진이가 고기와 오이로 만든 국수 마법진입니다.”
“선배님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그래, 고맙다. 잘 먹을게.”
젓가락으로 망가뜨리기 미안했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그냥 한꺼번에 다 비벼 버렸다. 옆에서 정우진도 젓가락을 드는 걸 보며 말했다.
“많이 먹어.”
“네, 선배님도 맛있게 드세요.”
정우진이 집에서 해 줬을 때보다 훨씬 더 맛있는 느낌이었다. 밖에서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정우진의 요리 실력이 더 향상된 것일까? 새콤하고 적당히 매콤달콤한 게 한국인이라면 호불호가 있을 수 없는 맛이었다.
“와, 진짜 맛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어제 정우진이 된장찌개를 했을 때와 비슷한 장면이었다. 내 옆에 앉은 스태프 중 한 명이 그릇을 들고 진공청소기처럼 국수를 빨아들이듯 먹고 있는 걸 보니 내가 다 뿌듯해졌다.
이거 우진이가 촬영 오기 전에 집에서 엄청 연습한 거라고 말해 주려는데, 문득 어디선가 불안해 보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늘이 왜 이렇게 흐리지?”
“설마 비 오나?”
“비 소식 없었는데?”
그 말에 고개를 드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껴 있는 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아서 당황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비 온다!”
“빨리 장비부터 넣어!”
아니, 이렇게 갑자기 비가 온다고? 소나기인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던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자 더 이상 태평하게 자리에 앉아 국수를 먹을 수가 없었다.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와 정우진은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배님, 여기에 올리세요.”
정우진이 어디선가 커다란 상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 위에 먹다 남은 국수와 남은 재료들을 빼곡하게 올렸다. 그래도 자기가 먹던 그릇은 다들 각자 챙겨서 음식들은 비교적 빠르게 치울 수 있었다.
“아니, 국수 먹다 말고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야…….”
나는 스태프들과 함께 카메라 장비를 옮겼다. 그래도 비가 거세지기 전에 알아차려서 많이 젖기 전에 비닐로 덮고 집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것들은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다.
비를 피해 모두가 우왕좌왕하며 처마 밑으로 뛰어들기도 했고, 집 안으로 들어와 잠시 동안 멍하게 가을비를 바라봤다.
“와, 비 많이 온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정우진이 어디선가 수건을 가지고 와 내 머리 위를 덮어 닦아 주었다. 그 잠깐 사이에도 제법 많이 젖었다. 조금 으슬으슬해서 그냥 정우진이 닦아 주는 대로 가만히 있는데, 후룩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자기 그릇을 챙겨 안으로 들어왔던 스태프들이 그 자리에 서서 국수를 먹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보니 갑자기 웃겨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낄낄대고 있는데, 스태프들도 웃긴지 전염되듯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아, 근데 국수 진짜 맛있네.”
“진짜 맛있어. 오이도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이렇게 먹으니까 맛있다.”
“고기도 식었는데 너무 부드럽고 맛있는데요?”
“근데 비 맞은 국수 먹어도 되나?”
“어때요, 뭐. 죽기야 하겠어?”
한마디씩 하며 후룩후룩 국수를 먹는 스태프들을 따라 나도 내 국수를 찾았다. 한 젓가락 먹어 보니 조금 붇기는 했지만 정말 맛있었다. 정우진이 계속 수건으로 문지르느라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국수를 먹는 것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너도 좀 먹어.”
내 말에 정우진도 그 자리에 서서 그릇을 들고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잘린 오이를 한 입에 넣고 먹는 정우진을 보다가 등 뒤로 가 수건으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머리를 닦아 주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머리통에서 계속 아삭아삭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