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5/190)

110화

라이브가 끝나고 오두막집 남자들 방송을 할 때까지 시간이 남길래, 뭘 할까 하다가 정우진이 너튜브로 어나더 데뷔 영상을 트는 바람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와, 진짜 미쳤다.”

거의 5년 전이라 유물이나 다름없는 영상 속의 내 모습은,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민망한 것이었다.

“왜요? 저는 이거 거의 매일 보는데. 텔레비전으로 엄청 크게 봐요. 핸드폰은 작으니까.”

그 말에 나는 다시 용기를 내 화면을 봤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무대를 누비고 있는 앳된 얼굴에는 긴장한 게 그대로 다 티가 나고 있었는데, 또 웃기는 해야 하니까 표정이 너무 이상했다. 연습생 생활도 그리 길지 않았던 터라 실력도 지금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열정이 넘쳐 보이기는 했다.

“…….”

너무 오래된 영상이라 처음에는 좀 거부감이 컸는데 계속 보다 보니까 어쩐지 마음이 뭉클했다. 나도 마찬가지고 애들도 그렇고, 저때는 정말 의욕도 넘치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랬는데…….

“너네 것도 틀어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이번에는 비비 데뷔곡을 틀었다.

역시나 이것도 예전 영상이라 그런지 애들이 지금과는 달리 어려 보이기는 했다. 제일 친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중에서도 정우진이 유독 눈에 띄었다.

“너도 저때 엄청 어렸다. 2년 전이니까 스물한 살 땐가?”

“네, 데뷔할 때랑 비교해서 지금은 키도 더 컸어요.”

“얼마나?”

“한 4, 5센티미터?”

그때까지도 키가 크나? 저 나이면 성장기도 다 지났을 텐데, 2년 동안 그만큼이나 큰 게 신기했다. 나는 딱 고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크고, 그 뒤로는 지금까지 그대로였다.

“너네도 컨셉, 대표님이 하라고 해서 한 거지?”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기 위해서 사람이 된 도깨비예요.”

“진짜 엄청 구체적이네. 우리도 그랬긴 한데…….”

대표님이 그런 컨셉을 짜는 것에 진심이었기 때문에 데뷔하기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었다.

“우리는 청량하고 맑은 컨셉이었는데, 학교에 짝사랑하는 여자애가 있거든? 근데 우리가 한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 거야. 나는 반에서 좀 겉도는 츤데레 스타일이고, 진혁이는 전교에서 1등하는 모범생 스타일이고, 유노을은 약간 문제아 같은 날라리, 강이는 엄청 과묵한 스타일이고…….”

얼마나 들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다 기억이 났다. 말을 하다 보니까 웃겨서 내가 피식거리자 정우진이 물었다.

“나이도 다 다르지 않았어요? 선배님은 그 여학생이랑 동갑이고, 모범생은 3학년 선배고, 날라리랑 과묵은 후배고. 근데 그 여학생은 공부해야 해서 연애에는 관심도 없잖아요.”

술술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알죠.”

소름이 끼칠 만큼 정확해서 양 팔뚝을 빠르게 문지르자 정우진이 물었다.

“근데 결국 누구랑 된 거예요?”

“몰라? 내 생각에는 왠지 모범생이랑 잘 됐을 거 같기도 하고……. 그 여자애가 공부를 잘했으니까 전교 1등 선배가 제일 잘 될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어쨌든 츤데레만 아니면 돼요.”

왜냐는 의문이 들기도 전에 정우진의 입에서 츤데레라는 단어가 나오자 등줄기에서부터 소름이 끼쳤다. 내가 질색하며 부르르 몸을 떨자 정우진이 웃었다.

“아니, 그 컨셉 때문에 진짜……. 대표님이 자꾸 너는 츤데레니까 뚱하게 있으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신인인데 그러면 너무 예의 없이 보이지 않겠냐고 물어보니까 그래도 계속 뚱하게만 있으라 그러고…….”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정우진이 옆에서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웃었다. 핸드폰으로 너튜브를 보느라 소파에 거의 반쯤 누워 어깨가 닿을 정도로 붙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내 몸에도 진동이 느껴졌다.

“너도 그럼 그 컨셉 때문에 그랬던 거야? 너 보니까 카메라도 거의 쳐다보지 않고 다른 데만 보고 있고 그러던데. 너 검 도깨비지? 그래서 검처럼 날카로운 그런 컨셉이었던 거야?”

이번에 오두막집 남자들 방송이 나왔을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 정우진이 활동했던 컨셉과 본체의 성격이 달라서 놀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나야 지금 정우진이 더 익숙해서 오히려 이제는 활동할 때의 느낌이 좀 낯설긴 하지만.

“근데 너는 그런 컨셉이랑 잘 맞는 거 같아. 약간 좀 판타지스러운 거랑 잘 어울려.”

“정말요? 선배님도 츤데레랑 잘 어울려요.”

또 츤데레라는 말이 나오자 민망해서 부르르 몸이 떨렸다. 내가 질색하자 정우진이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이제 슬슬 방송할 때 된 거 같은데.”

시간을 확인하며 말하자 정우진이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들어갈까요?”

그러긴 해야 하는데 지금 이 자세가 너무 편해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텔레비전은 왜 고장 난 거야?”

“네? 그냥 갑자기…….”

모르겠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는 정우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딱 좋아서 그냥 여기서 보고 싶은데.”

“여기서요?”

“소파도 푹신푹신하고…….”

“침대도 푹신푹신한데…….”

또다시 말꼬리를 흐리는 정우진을 보며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에 있는 소파는 오래된 가죽 소파인데, 그것도 좋긴 했지만 나는 살면서 이렇게 푹신푹신한 소파는 본 적이 없었다. 보통 소파보다 크기도 커서 눕기도 편하고, 얼마나 푹신한지 가만히 있으면 폭 안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 소파, 마음에 드세요? 제가 사 드릴까요?”

“아니? 그리고 이거 너무 커서 어차피 숙소엔 놓지도 못할걸.”

안방으로 들어가며 그런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불이 꺼져 있고, 밤이긴 했지만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다. 암막 커튼 때문인가? 조금 고민하다가 커튼을 걷으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님, 그럼 제가 카드 드릴 테니까 소파에 앉고 싶으실 때마다 저희 집에 오세요.”

창문을 가리고 있는 무거운 커튼을 걷고 있는데, 정우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사라진 건지, 정우진이 자리에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안방에서 나가려는데, 정우진이 뭔가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이거 카드 키인데,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계세요. 비밀번호는 821234예요.”

“……?”

일단 주니까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기는 했는데 이걸 왜 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네가 열어 주면 되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제가 없을 땐 이걸로 열고 들어오세요.”

그 말에 더욱 의아해졌다.

“주인도 없는 집엘 어떻게 들어와?”

“소파에 앉고 싶으면 오세요.”

“됐어, 무슨…….”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카드 키를 돌려주려고 하자 정우진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니면 사우나 하고 싶을 때 오세요. 그것도 아니면 그냥 배고플 때……. 냉장고에 먹을 거 항상 많이 넣어 둘게요.”

“그래도 빈집에 어떻게 들어와? 그리고 소파 편하다고 한 건 맞지만, 그거 때문에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는……. 차라리 그냥 집에 가서 침대에 눕는 게 낫지.”

“그럼 제 침대에 누우세요.”

“뭐?”

사우나나 냉장고 소리를 할 때도 어리둥절했는데, 침대 얘기까지 나오니 더욱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나와는 달리 정우진의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피곤하면 제 침대에서 쉬면 되잖아요.”

“우리 집에도 침대 있는데?”

“푹신한 게 좋으시다면서요.”

“내 침대도 푹신해.”

“제 침대보다 더 푹신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좀 전에 손으로 눌러 봤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건 아니었다. 게다가 숙소에 있는 침대 매트리스는 너무 오래 써서 스프링도 좀 맛이 갔기 때문에 이 침대와는 비교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근데 그런 걸 다 떠나서, 나는 지금 우리가 갑자기 왜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네 침대 좋은 거 알겠으니까 일단 오남자부터 좀 틀어 봐.”

“일단 누워 보세요.”

침대를 팔고 싶어서 환장한 가구점 점원처럼 보여서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실 슬리퍼를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자 정우진이 말했다.

“앉지 말고 누워 보세요.”

“됐어, 어차피 텔레비전…….”

“빨리요. 베개도 베고 누우세요. 이불도 덮으시고요. 베개 높이는 어때요?”

단호한 말투에 나는 뭔가에 쫓기듯 이불 안으로 들어가 정우진이 하라는 대로 베개를 베고 똑바로 누웠다.

“괜찮긴 한데…….”

“베개 높이 맞아요?”

“살짝 높긴 해.”

“그럼 제가 좀 더 낮은 걸로 준비해 둘게요. 아니면 다음에 같이 베개 사러 가요. 이불 촉감은 어때요? 바스락바스락하는 느낌 좋아하세요? 아니면 부드러운 거?”

이불 촉감 같은 건 살면서 신경을 써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정우진이 말하는 걸 들으며 슥슥 만져 보니 내 이불과 촉감이 좀 다르긴 한 것 같았다.

“괜찮아요?”

“괜찮긴 한데……. 너 혹시 나한테 이불 팔고 싶어서 그래?”

의심스런 눈으로 묻자 별안간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선배님한테 이불을 왜 팔아요?”

“그럼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건데?”

“선배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런 거죠.”

“그러니까 왜?”

내 말에 정우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몇 번 더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을 움직이던 정우진이 이내 내 눈을 살짝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래야 자주 놀러 오고 싶어지니까…….”

“…….”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도대체 그게 이불이랑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쭈뼛거리면서 다가와 이불을 들춰 내 옆으로 오며 말했다.

“소파도 그렇고 먹을 거도 그렇고, 그래서 그런 거예요.”

“……?”

“그러니까 저희 집에 오고 싶으면 그냥 오세요. 저한테 말 안 하고 갑자기 들이닥쳐도 괜찮아요. 그냥 뭐 먹고 싶을 때나, 쉬고 싶을 때나, 잠이 올 때나……. 아무 때나 그냥 막 오세요. 동네 마트 가듯이…….”

정우진이 횡설수설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옆에 누우려는 정우진을 피해 살짝 옆으로 비키며 손끝으로 팔뚝을 벅벅벅 긁었다.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갑자기 너무 간지러워졌기 때문이다.

옷 위로 긁어서 그런 건지, 생각보다 벅벅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물었다.

“혹시 안 씻으셨어요?”

“아니…….”

“씻고 싶을 때 저희 집에 오셔도 되고요.”

“…….”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하는 말에 결국 목을 타고 뺨까지 소름이 돋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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