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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7/190)

122화

부상당했다는 게 저건가? 깁스한 거 보면 뼈가 부러졌나?

“이것도 안 돼요?”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종이학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 내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냥 봤을 때도 좀 삐뚤빼뚤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더 별로였다.

“네가 접은 거야?”

“네, 다음에는 별 접어 드릴게요. 별은 긴 종이로 접어야 해서 일단 오늘은 학으로 접었어요.”

“…….”

별을 접어 준다는 말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불길한 건지, 찝찝한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점점 초조해지는 걸 느꼈지만, 애써 무시한 채 물었다.

“너 다쳤다며?”

“아, 네. 별거 아니에요.”

“손가락 그거, 깁스한 거 아니야?”

“살짝 골절되기만 한 거라 심한 건 아니에요.”

이거 보라는 듯, 손목을 양옆으로 흔들면서 웃는데 그게 손가락 골절과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다쳤는데? 어디 찧었어?”

“아, 어쩌다가……. 근데 선배님, 혹시 알고 계셨던 거예요?”

눈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리던 정우진이 뜻 모를 말을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알고 있었냐고? 뭘?”

“…….”

“너 다친 거? 기사 다 났어.”

“…….”

내 말에도 정우진은 말없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혹시 이 얘기가 아니었나?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어제 방송 보셨어요?”

“오남자? 봤지.”

“저 사실 물수제비 못 뜨는 척했던 거예요.”

갑작스러운 양심 고백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미 방송을 보며 눈치챘던 일이라 별로 대수롭지도 않았다.

“그래, 왠지 그랬던 거 같더라.”

“저는 엄청 잘 숨긴 줄 알았는데, 방송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게 숨긴 거였다고? 표정이 엄청나던데…….”

가볍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아니, 지금 이런 말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닌데……. 나는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근데 할 말이 뭐야? 사실 네가 물수제비 고수였다는 거?”

“저 잠 잘 못 자는 건 진짜예요.”

“어?”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생각이 많아서 그런가? 근데 촬영할 때는 너무 잘 자서 저도 엄청 놀랐어요. 선배님이 저한테 컨셉이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저 같아도 황당했을 거 같아요.”

작게 웃으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기는 한데,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이런 말이나 하자고 나를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선배님, 근데 유진이라는 게 누구예요? 저한테 유진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

그리고 태연히 묻는 질문에 순간 놀라서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나는 정우진이 시답잖은 질문을 계속 해 댄 목적이 이것일 거라고 눈치챘다.

“우진이라고 했는데……. 너 정말 자는지 궁금해서 네 이름 불렀던 거야.”

“유진이라고 하시던데요.”

“네가 잘못 들었거나, 내가 발음을 잘못한 거겠지. 근데 그건 왜 물어?”

집요함이 느껴지는 말투에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 정우진의 눈을 쳐다보는 게 힘들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살피는 척하며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간절함이 느껴지는 떨리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정말 잘못 말한 거예요?”

“…….”

워낙 눈물이 많아서 또 울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우진의 표정은 메마른 사막처럼 버석거렸다. 너무 지쳐서 마르고 갈라진 틈 사이로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의 모래들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절 부른 게 아니었어요?”

“…….”

그걸 보는 순간, 둥둥 떠다니기만 하던 어떤 조각들이 거짓말처럼 하나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건 아무리 맞춰 보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서 옆으로 미뤄 두기만 했던 것이었다.

그동안 숱한 의심을 하면서도 빙빙 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 많았는데,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아져 버렸다. 마치 불시에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작용으로 내 안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나는 늘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수많은 감정과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지만, 어떤 날의 어떤 장면만은 늘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 이름이 소월동이었거든. 낡은 판잣집도 많고 경사도 높은 달동네였는데, 길도 더럽고 대낮부터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사람들도 많아서 엄청 싫어했어. 난 가고 싶어서 간 곳도 아니었고, 거긴 아는 사람도 친구도 아무도 없었으니까.”

갑작스럽게 시작한 이야기에도 정우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집에 너무 들어가기 싫어서 밤늦게까지 밖에 있었던 날이 있었어. 이상하게 그날따라 엄마랑 아빠도 너무 보고 싶고, 그냥 별일도 없이 평범한 하루였는데 너무 견디기가 힘든 거야. 진짜 특별한 일도 없던, 너무 평범한 하루였는데…….”

“…….”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는 말이 생각나서 나도 그냥 계속 길을 따라 올라갔어. 달동네라서 오르막길이 많았거든. 그 길을 따라간다고 하늘에 도착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올라가는 길이니까 계속 간 거야. 웃기네, 진짜.”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좀 황당해서 웃었는데, 정우진은 여전히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그걸 보니, 창살을 사이에 두고 어둠 속에서 내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떠올랐다.

“아무튼 계속 올라가다가 막다른 길이라 그 집에 몰래 무단 침입을 했어. 담이 낮아서 그냥 타고 올라가다가 옥상에 도착했거든? 근데 고개를 들고 위로 손을 뻗어 봐도 하늘이 너무 멀리 있는 거야. 분명 엄청 오랫동안 올라왔는데, 닿질 않아서…….”

어떻게 하려고 했더라? 발밑이 너무 어둡고 멀어서 다시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다시 멀어지면 더는 닿을 기회조차 생길 것 같지가 않은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도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을 때, 문득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별에 마음을 빼앗겼다. 힘들고 슬프던 감정들이 물에 섞여 사라지는 한 방울의 물감처럼 전부 희석이 되고, 그 자리에는 오로지 감탄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전까지, 밤하늘이 이렇게 빛나는지 알지 못했다. 어두운 발밑 위로 저렇게 많은 별들이 있는지 알지 못했고, 세상에 저렇게 예쁜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아무튼 옥상에서 고개를 들었는데, 밤하늘이 너무 예뻐서 그게 내 보물이 됐어. 힘들거나 지칠 때마다 가서 위로 받고, 다시 내일로 갈 수 있는 힘도 얻고. 거의 내 전용 산소 호흡기 같은 거였지.”

가볍게 말장난을 하며 웃자, 정우진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툭 떨어질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가만히 보다가, 생각이라는 걸 하기도 전에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정우진의 양 뺨을 잡았다.

입술이 붕어처럼 툭 튀어나온 우스꽝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웃기지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젖은 눈을 보았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혼자서만 알고 싶어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을 한 적도 없었고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간 적도 없었다.

그 하늘의 별은 내 것이었고, 내 보물이었고, 내 발밑의 어둠을 밝혀 주는 빛이었으니까.

“네가.”

“…….”

“네가 그거 보고…….”

분명 그랬는데, 언제부터였을까?

“그거 보고 바다라고 했잖아.”

“…….”

“바보 아니냐고, 진짜. 바다랑 하늘이랑 구분도 못 하고…….”

언제부턴가 그 별은 검은 하늘이 아니라 검은 눈동자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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