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34/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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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쳤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숟가락으로 나베를 먹는 정우진의 손은 더 이상 떨리고 있지 않았다. 이제 더는 개수작을 부리지 않기로 했는지, 젓가락으로 멀쩡하게 냄비 안의 배추까지 집어 먹고 있었다.

“맛있냐?”

“맛있네요.”

황당한 얼굴로 그걸 보며 묻자 정우진이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선배님은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눈치는 네가 없는 게 아닐까?”

“팔 진짜 아픈데…….”

“그러니까 이런 걸 왜 하냐고. 시켜 먹든가 하면 될 걸.”

혀를 차며 말하자 정우진이 발끈했다.

“선배님이랑 더 맛있는 거 먹으려고 그런 거죠.”

“요즘에는 시켜 먹는 것도 다 맛있어.”

“그래도 같이 해 먹으면 더 좋잖아요.”

좋긴 뭐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런 걸로 티격태격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돌렸다.

“근데 너 김씨 아니었냐?”

“김씨요? 아, 그건 엄마 성이고, 호적에 등록된 건 원래 정씨였대요. 그래서 아버지랑 같이 살면서 원래 이름으로 부르게 된 거예요.”

“아버지? 너 원래 할아버지랑 같이 살고 있었잖아. 언제?”

그렇지 않아도 그 집에서 어떻게 나온 건지 계속 궁금했는데, 잘 됐다 싶어 물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입을 열었다.

“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가? 그쯤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떻게 연락이 닿았나 봐요. 아버지는 제가 거기에 있는 줄도 모르셨대요.”

“…….”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일 것 같아서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던 거다. 거기에서 정우진이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쩌다가…….”

“술 마시고 오다가 길에서 잠들어 저체온증으로 가셨다는데…….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

뭔가 애도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에 그 사람은 어린 정우진을 방치하는 걸로도 모자라 학대하기까지 했으니……. 마음 같아서는 자업자득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대놓고 말할 정도로 성격 파탄자는 아니라 그냥 속으로 삭였다.

“그래서 그 뒤로 계속 아버지랑 같이 살다가 일 때문에 나오고……. 아버지가 건설 회사를 운영하시는데, 예전에 같이 일했던 후배가 지금 강만덕 대표님이래요. 그래서 저 사실 낙하산이에요.”

웃으며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도 신기해서 눈을 크게 떴다가 멈칫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후배? 대표님 조폭 아니었나? 조폭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대표님이 너희 아버지 후배셨다고?”

“네, 신기하죠?”

확실히 정말 신기하고 세상이 좁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금하다고 해도 대놓고 혹시 너희 아버지 왕년에 조폭이셨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정우진이 말했다.

“혹시 알려지면 좀 안 좋게 볼까 봐 아는 사람은 대표님이랑 실장님이랑 다른 몇몇 분들밖에 없어요. 이젠 선배님이랑.”

“…….”

그 말에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쳐다봤다.

낙하산이라고 해도 저 얼굴에 저 피지컬이면, 사실 춤도 못 추고 노래를 못 부른다고 해도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캐스팅이 되고도 남을 것 같기는 했다.

그보다는 왠지 알면 안 될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아서 찝찝했다. 그냥 계속 몰랐어도 될 것 같은데, 예고도 없이 엄청난 사실을 알게 돼서 얼떨떨하다고 해야 할까?

“나도 비밀로 할게.”

“선배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

정우진은 웃으며 말했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쩐지 예전에 대표님이랑 대화할 때도 위화감이 좀 있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 집으로 가서 같이 살다가 나중에 선배님 찾으려고 수소문을 했는데……. 제가 아는 게 정말 없는 거예요. 몇 살인지, 이름이 뭔지……. 그때 선배님이 오빠라고 부르라 해서, 저는 그게 이름인 줄 알았거든요.”

“오빠가 이름인 줄 알았다고?”

“그럼 제가 왜 오빠라고 불렀겠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면 그렇게 안 불렀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근데 왜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던 거예요? 그때 저 엄청 꼬질꼬질하지 않았어요? 딱히 여잔지, 남잔지 구분이 될 만큼 컸던 것도 아닌 거 같은데…….”

“…….”

그땐 그냥 예쁘면 다 여자인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아주 어릴 때 착각했던 거라 그냥 그랬다고 말하면 될 텐데, 사실대로 말하려니 민망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깐 눈알을 굴리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기억 안 나는데…….”

“아버지 만났을 때, 오빠를 찾아 달라고 했다가 얼마나 이상한 애 취급당했는지 아세요? 아버지랑 같이 있던 사람이 저한테 사내새끼가 왜 오빠라고 그러냐고 엄청 뭐라 그랬단 말이에요.”

아니, 그렇다고 또 무슨 애한테 그렇게 뭐라고 하지? 어린애가 좀 모를 수도 있는 거지…….

“아무튼 근처에 초등학교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이미 폐교했고 전학생 기록도 대충 날짜 맞춰서 찾아봤는데 그걸로도 찾기가 힘들고……. 그 동네 집들은 거의 불법 건축물이라 등록이 된 것도 아니고, 그래서 결국 못 찾았어요.”

하긴……. 그 동네에서는 그냥 대충 천막만 치고 사는 사람도 있었고, 합판으로 벽을 만들어 불법 증축한 곳에서 세를 내고 지내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사실 찾으려면 아마 찾을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그땐 그냥 그러다가 말았던 거 같아요.”

“왜?”

“…….”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내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냥…….”

“…….”

“생각해 보니까 그냥 동네 아는 사람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게 좀 이상한 거 같기도 하고……. 시간도 너무 많이 지났고…….”

“…….”

작은 소리로 말하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으니까…….

어떻게 찾을지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찾는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다. 괜히 잘 살고 있는 애를 만나서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아닐지, 잊고 잘 살고 있는 애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건 아닐지…….

물론 그렇다 해도 만날 수 있다면 한 번쯤은 멀리서라도 보고 싶었다. 잘 살고 있든 못 살고 있든, 그냥 한 번쯤은.

“분명 나만 이러고 있을 게 뻔한 거 같아서…….”

“…….”

다른 곳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정우진을 보자, 나는 우리가 그동안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쩐지 큰일이 난 것 같다는 두려움이 더욱 컸다. 이제 정우진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작고 연약했던 어린아이가 아닌데…….

“선배님도 제 생각 하셨어요?”

“…….”

정우진이 물끄러미 나를 보며 물었다.

생각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해가 기울어질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왔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보고 싶었던 적 있어요?”

“…….”

“혹시 찾으려고 해 본 적 있어요?”

“…….”

그러면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에 시선을 피하다가 계속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재촉하는 정우진에게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냥…….”

“그냥?”

“……그냥, 가끔…….”

“가끔? 얼마나 가끔이요?”

끈질기게 묻는 걸 보니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너 근데 아까 열나지 않았어? 지금은 괜찮아? 해열제는?”

너무 티가 나게 말을 돌리긴 했지만, 그만큼 나도 절실했다. 이대로 계속 정우진이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다 보면 정말 큰일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말을 돌리자마자 정우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짜증이 난 건지, 울상을 짓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정우진이 갑자기 팔을 뻗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내 손바닥을 제 이마에 꾹 눌렀다가 뺨, 목덜미까지 차례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옷 안으로 손이 들어가자 어깨 쪽의 옷자락이 옆으로 스르륵 떨어졌다.

“열 계속 나요?”

“…….”

일부러 이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까부터……. 아니, 어쩌면 내가 깨닫지 못했던 오래 전부터 그래 왔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오늘처럼 이렇게 티가 나게 굴었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잠들기 전에 약을 먹을 때도 그랬고, 지금 내 손을 잡고 제 얼굴이며 목덜미에 비비고 있는 것도 그렇고……. 작정을 한 게 분명했다.

“열 이제 안 나죠?”

“…….”

“네?”

“…….”

손을 뿌리치든 그렇다, 아니다 대답이든 뭐라도 해야 하는데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머릿속이 그야말로 백지가 됐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건물 꼭대기 위에 서서 물에 잠긴 도시를 바라보면 이런 심정일까? 백사장에서 놀다가 문득 시선을 돌린 수평선 너머로 쓰나미가 나를 향해 밀려오고 있는 걸 발견한다면 이런 심정일까? 자고 있는데 우리 집 밑에서 화산이 폭발해 동네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눈앞에서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크게 좆 됐다는 걸 알긴 알겠는데, 너무 막막해서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고나 할까…….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고, 할 말도 없어서 손이나 뿌리치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줬다. 도무지 떨쳐 낼 수가 없어서 인상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정우진은 무해한 어린아이처럼 말갛게 뜬 눈으로 입을 열었다.

“열 내렸죠?”

자연재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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