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40/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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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돈 없다고 난리 블루스를 치더니, 이런 게 다 어디서 난 거지? 혹시 로또라도 맞은 걸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사치를 하든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든 알 바 아니지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서 더 불안했다.

“…….”

어디에 취직해서 무슨 일을 해도 이렇게 단기간에 저만큼의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혹시 주식 같은 게 대박이 난 건가? 근데 주식을 해도 기본 자금이 있어야 수익을 내는 거 아닌가?

도대체 어디서 돈이 생겨 저렇게 벼락부자가 된 졸부처럼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연락을 해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초조해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날 불렀다.

“형, 안녕하세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박준오였다.

“어, 준오야. 오랜만이네.”

“네,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내지. 너는?”

“저도 잘 지내죠.”

새로운 매니저가 온 뒤로 박준오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렇게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어디 가?”

어딘가 급히 가는 것 같아서 묻자 박준오가 들고 있던 지갑을 살짝 보여 주며 말했다.

“저 잠시 커피 사러……. 아, 우진이 형은 괜찮으세요?”

그러고 보니까 정우진이 손가락 다쳤을 때 같이 있던 게 박준오였나? 정우진이 말을 해 주지 않아서 만난 김에 물었다.

“이제 많이 괜찮아졌다고 하더라. 근데 걔 손가락은 왜 다친 거야? 문에 끼이기라도 했어?”

“아…….”

내 물음에 박준오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역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계속 내 질문을 회피하던 정우진 때문에 오히려 의심이 더욱 커졌다. 실수로 다친 거라면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될 텐데, 너무 티가 나게 말을 돌려 버리니까.

“안 그래도 이거 형한테는 말씀을 드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나한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나한테? 정말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가?

나는 덩달아 심각해진 표정으로 박준오의 뒷말을 기다렸다.

“네, 일단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하긴 했는데……. 그, 제가 다음 날 스케줄 때문에 말씀드릴 게 있어서 우진이 형 방에 같이 있었거든요. 호텔 방에요.”

박준오는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다가 한 박자 쉬고 주변을 살핀 뒤 내게 조금 더 붙으며 소리를 죽였다.

“그때 형이 오남자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한테 한국 가야겠으니까 빨리 비행기 표 알아보라고 하시면서……. 그, 손가락을……. 새끼손가락을 그냥 잡고 뚝 부러뜨리시는 거예요…….”

“……뭐?”

“다쳤으니까 다 취소하라고……. 제, 제가 그거 보고 진짜……. 너무 놀라 가지고…….”

상상도 못 했던 말이라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떠오르기라도 했는지 창백해진 박준오를 보니 아무래도 잘못 들은 건 아닌 듯싶었다.

“손가락을 부러뜨렸다고? 자기가 자기 손가락을?”

“네…….”

“…….”

“우진이 형은 그 뒤로 저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하시기는 했는데……. 저도 눈치라는 게 있으니까 일단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거든요. 다른 분들이 어쩌다 다친 거냐고 많이들 물어보셨는데, 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근데 형한테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박준오는 마치 자기가 비밀 결사대라도 된 듯 결백을 주장하는 얼굴로 길게 말했다. 그 와중에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서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는 말을 해?”

“네?”

“나한테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 이유가 뭐냐고.”

“네?”

“……?”

정말 몰라서 물어본 건데 박준오는 나보다 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기만 했다. 순식간에 이상해진 분위기에 박준오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그……. 네? 어, 제, 제가……. 아무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그건 잘했는데……. 나한테는 왜 말했냐고…….”

한국 가고 싶다고 자기 손가락을 스스로 부러뜨린 아이돌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지 않아 천만다행이기는 했지만, 의아했던 마음이 점점 찝찝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내 표정이 미묘해지자 박준오가 별안간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두 분 워낙 친하시고……. 아무튼 우진이 형 괜찮다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

박준오가 눈에 띄게 말을 돌려 버리더니 황급히 몇 발자국 떨어지며 말했다.

“저 이제 가 봐야 해서……. 수고하세요, 형!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

나는 인사도 하지 않았는데,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박준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혹시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설마 쟤가 정우진이랑 내 사이를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아니, 애초에 정우진이 귀국한 날이면 그때 우린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 전에도 그런 티가 많이 났던 걸까? 하긴, 정우진의 행동들이 가끔 이상하기는 했었지만……. 아니, 그래도 그렇지 박준오가 저렇게까지 확신을 하고 있다고?

“…….”

정우진이랑 만나고 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하는 게 민망해서 아직 멤버들한테도 말을 안 했는데……. 혹시 멤버들도 이미 다 눈치를 채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단 녹음실로 향했다.

오늘은 미니 앨범 수록 곡에 들어갈 이진혁의 자작곡을 다 같이 들어 보기로 한 날이었는데, 나는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조금 늦은 상황이었다.

“어, 형.”

녹음실 안으로 들어가자 세 명이 작은 핸드폰 화면을 보느라 머리를 맞대며 대화하고 있는 게 보였다.

들어오자마자 좀 더워서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밥은 먹었어?”

“응, 아까 먹었지. 우리도 거의 방금 왔어. 형은?”

“나도 오다가 그냥 대충 먹었어. 근데, 그…….”

그래도 같은 그룹 멤버인데…….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미리 말을 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원래는 이렇게 급하게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니, 아예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는데, 오늘 박준오를 보니까 불안해서 차라리 미리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하지만 막상 말을 하려니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걸 꼭 말을 해야 하나? 하는 의문도 사실 아직 없어지진 않았고……. 근데 이러다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한테 들으면 애들이 좀 서운해하지 않을까?

아닌가? 남의 연애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괜히 내 사생활을 너무 부담스럽게 떠드는 건 아닐까?

순간 파도처럼 덮쳐 오는 수많은 생각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나를 보고 있던 애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무슨 일 있어?”

“뭔데?”

재촉하듯 묻는 얼굴에는 걱정이 비쳤다. 셋 다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결국 결심을 하고 말했다.

“나 만나는 사람 생겼거든.”

“만나는 사람? 애인?”

“사귄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니 갑작스러운 내 고백에 놀란 듯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하려는데, 눈만 깜빡거리던 김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우진이 형?”

“난 또 뭐라고…….”

“아……. 형, 며칠 전에 가이드 준 거 들어 봤지? 이게 컨셉이 뭐냐면, 약간 겨울이 오면 춥고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온다는 그런 건데……. 일단 다시 들어 보자.”

“…….”

나는 큰마음을 먹고 말한 건데, 막상 내 고백을 들은 애들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이진혁은 별 대꾸도 없이 자작곡 설명을 하더니 노래를 재생해 버렸다.

“…….”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률을 가만히 듣다가 말없이 재생을 정지한 뒤 내가 한숨을 쉬자, 이진혁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별로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메시지가 좀 진부하긴 하지? 근데 이게 그걸 얘기하는 거거든. 우리는 사계절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늘 쳇바퀴 같은 삶을 살지만, 사실 그런 진부하고 평범한 일상들이 정말 소중한 거잖아.”

이진혁이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그런 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일을 하러 왔으니 집중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얘들아.”

내가 한숨을 내쉬며 부르자 셋 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희는 놀라지도 않냐? 내가…….”

내가 남자랑 만난다는데?

차마 뒷말은 하지 못하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이진혁이 오히려 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형은 우리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진짜?”

뒤이어 김강이 말했다.

“아니, 새벽에 찾아와서 그렇게 울고불고 사랑싸움하다가 집에서 재우기까지 했는데, 모르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닌가? 내가 모쏠이지, 바보야?”

그땐 사귀고 있던 사이도 아니었는데…….

바보 취급을 당했다고 느낀 건지 김강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내가 주춤하는 사이 이진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 잡담은 나중에 하고 일단 우리 이것부터 들어 보자. 나중에 피디님 오시면 파트 때문에 간단하게 가녹음 한 번 해 볼 거 같은데, 컨디션 괜찮지?”

“어? 어…….”

“우리는 아까 우리끼리 몇 번 해 보긴 했거든? 일단 형도…….”

“…….”

이진혁이 평소엔 조용하지만 녹음실에만 들어오면 말도 많아지고 성격이 정반대로 바뀌는 편이었다. 내가 누구랑 사귀든 별로 관심도 없는 거 같고, 일단 지금은 이진혁의 말대로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니까 집중하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선배님 지금 회사에 계세요? 제가 간식거리 좀 사서 갈까요?]

“…….”

문자를 보자마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만약 이 상황에서 정우진이 먹을 걸 사서 녹음실에 놀러 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절대 오지마 절대]

[왜요?ㅠㅠ 그럼 그냥 몰래 보고 가기만 할게요..]

[진짜 장난 아니야 오면 죽는다]

[힝]

[나 녹음해야 돼서 이제 핸드폰 못봐 몰래 오지도 말고 조용히 오지도 말고 그냥 얌전히 집에 있어 끝나고 갈게 진짜 제발 오지마]

나는 혹시라도 정우진이 몰래 온답시고 모자랑 마스크를 하고 밖에서 기웃거릴까 봐 강하게 말한 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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