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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나와서 정우진에게 갔다. 예전에 받았던 출입 카드를 꺼내려고 지갑을 열자 정우진이 써서 집 안 여기저기에 붙여 놨던 포스트잇이 보였다.
“…….”
나는 이걸 왜 챙겼던 걸까? 그냥 황당해서 나중에 한 번 더 보려고 모조리 챙겨서 지갑에 쑤셔 넣었던 건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버리기가 싫어서 그랬던 것 같았다.
잠깐 그 자리에 서서 정우진이 쓴 포스트잇을 하나씩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가겠다고 미리 말한 것도 아니라서 어쩌면 정우진이 집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래도 일단 나는 승강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벨을 눌렀다. 출입 카드가 있었지만 남의 집에 말도 없이 들어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기다렸다.
“…….”
하지만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질 않아서 핸드폰을 꺼내려는데, 곧 우당탕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선배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정우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불렀다. 뺨이 상기되어 있는 걸 보니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어떻게 연락도 없이 오셨어요? 아니, 말도 없이 찾아와서 싫다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일단 들어오세요. 밖에 많이 춥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또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우진을 보고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그랬다. 어떨 때는 밥을 먹다가, 어떨 때는 그냥 대화를 하다가, 또 어떨 때는 쳐다만 보고 있어도…….
불편하고 울렁거리고 불쾌한 데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명치가 꽉 조일 때도 있어서 체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는 정우진의 손에 잡혀 집 안으로 들어가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의 손이 굉장히 따뜻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면 내 손이 차가운 걸까? 정신이 없어서 겉옷도 입지 않고, 짜장면을 시키고 있던 애들에게 설명도 없이 무작정 나와 버렸다.
“옷을 왜 그렇게 얇게 입고 오셨어요? 혹시 누가 데려다줬어요?”
내가 차를 타고 와서 겉옷을 입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정우진이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손으로 연신 내 양손을 붙잡고 주물럭거렸다. 자신의 온기를 내게 전달해 주려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만지는 게 너무 변태 같아서 나는 정우진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말했다.
“아니, 택시 타고 왔어.”
“네? 택시요? 왜요? 문자 보낸 거 못 보셨어요? 말씀해 주셨으면 데리러 갔을 텐데.”
내가 푹신한 소파에 앉자 정우진도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여기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소파가 엄청 푹신했다. 그래서 앉으면 몸이 소파에게 안기는 느낌이었다. 이사 가기 전의 숙소에도 있었는데 그건 오래되고 낡은 가죽 소파라 겨울에는 차갑고 여름에는 뜨거웠다.
내가 소파를 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자 정우진이 웃었다.
“이사 선물로 제가 소파 하나 사 드릴까요?”
“집에 소파 있어.”
“바꾸면 되죠.”
“멀쩡한 걸 왜? 그것도 보니까 새것 같던데.”
겉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다급하게 찾아온 이유가 분명 있었는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물어볼 게 많았는데 아직 내가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꺼내지 싫은 어릴 때의 이야기를 해야만 해서일까?
“많이 피곤하시죠? 이사하는 거 엄청 힘들잖아요.”
“포장 이사였는데, 뭐.”
“포장 이사라도 이사하는 거 자체가 되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많이 피곤해 보여?”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에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요.”
“…….”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안 좋은 일이에요?”
“…….”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정우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런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잠시 집 안을 둘러봤다. 처음에 왔을 땐 사람 사는 냄새도 나지 않고 그냥 모델 하우스 같았는데, 지금은 그래도 여기저기에 이런저런 것들이 나와 있고, 조금 어질러진 곳도 있었다.
가스레인지 옆에는 소금과 후추 통도 보였고, 냉장고 앞에는 메모지 같은 것도 붙어 있었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없었고, 소파 위에는 굵은 흰색 털실로 짠 듯한 담요 같은 것도 보였다. 구석에 박혀서 잔뜩 구겨져 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 정우진이 어쩐지 민망한 것 같은 표정으로 그걸 슬그머니 자기 쪽으로 가져와 네모반듯하게 접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파 위에 담요가 널브러져 있는 게 뭐 어떻다고. 저렇게 정우진은 이상한 곳에서 부끄러움이 많았다.
“…….”
“…….”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다시 처음부터 거실을 쭉 둘러봤다. 몇 번 반복하니 더 이상 잡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슬슬 정우진의 표정에도 의아함이 깃들고 있어서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랑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네?”
내 질문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질문이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착실하게 대답은 했다.
“저도 소속사 들어오기 전에는 몰랐어요.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은 안 나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그냥……. 저번에 네가 대표님이 너희 아버지 후배라고 한 게 생각이 나서. 그래서 낙하산이라고…….”
예전에 언젠가 정우진이 버스를 타고 집에 가다가 내 영상을 봤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옆에 앉은 사람이 핸드폰으로 보고 있었다고 했었나? 학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으니, 내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일 거다.
그때 나를 한눈에 알아본 거라면, 적어도 3, 4년은 된 일이었다. 하지만 정우진이 내게 아는 척을 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도 않았다. 나 때문에 회사에 들어와서 아이돌이 된 거라고 들었는데, 이것도 뭔가 말이 되질 않았고.
“선배님.”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건지 표정도 심각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게 가장 컸다. 얼굴 표정이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할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도저히 좋게 돌려 말할 방법이 생각나질 않아서 그냥 직접적으로 물었다.
“너 혹시 강수민 기억나?”
내 질문에 정우진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눈 깜빡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최근에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찾아가 봤더니 급하게 이사 갔다고 하더라고. 거기 경비 아저씨가 우리 어릴 때부터 계셨던 분이라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말도 없이 갑자기 가 버렸대. 그 새끼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긴 한데, 전화번호도 바꿨는지 연락도 안 되고, 날 피하는 거 같기도 해서 좀 그래.”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말하면서 정우진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정우진의 얼굴은 처음 강수민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말고는 변하질 않았다. 평소라면 이것저것 물어본다든가 그랬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물었다.
“너 걔한테 돈 줬어?”
“…….”
“갑자기 외제 차 타고 다니고 명품 같은 것도 막 사고 다니는 거 같던데. 이사 간 거 보니까 집도 사 줬나?”
“…….”
정우진은 여전히 별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입을 다물고 계속 정우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기다렸는데, 정우진이 오히려 내게 질문을 했다.
“강수민 만났어요?”
“…….”
진짜 정우진이 강수민에게 돈을 줬나 보다. 분명 어느 정도 예상을 한 일이었음에도 나는 갑자기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넋이 나간 얼굴로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황당하네.”
“언제 만났는데요?”
나는 어쩌면 정우진이 내게 거짓말을 할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내게 아무 말도 없이 한 일인 걸 보면 내게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한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우진은 숨기지도 않고, 변명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게 질문을 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표정이라서 더욱 황당했다.
“안 만났어. 아까 말했던 것처럼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날 피해 다니는 게 이상해서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그냥 알게 된 거야.”
“그걸 어떻게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알게 된 건데요?”
“너 걔가 진 빚까지 다 갚아 준 거야? 어떤 사람이 문자로 계좌번호랑 이것저것 다 보내라고 하던데, 그 사람 말하는 게 양아치 같아서 그냥 갑자기 네가 생각났어.”
“…….”
내 말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눈빛에 의아함이 깃들어 있는 게 양아치 같은 거랑 자기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사실 어째서 그때 갑자기 정우진을 의심하게 된 건지 확실한 경위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여러 가지 것들이 합쳐져서 그렇게 결론이 났다.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정우진이 어릴 때 내게 말도 없이 강수민을 따라다녔던 적이 있어서였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시 화났어요?”
“…….”
그 물음에 머리가 띵해졌다. 내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인상을 쓰자 정우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제가 멋대로 굴어서 그래요? 아무 말도 안 해서? 저한테…….”
나는 변명하듯 말하는 정우진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렸을 때도 내게 말도 없이 강수민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심부름을 하고, 흙을 주워 먹으라고 하면 흙을 주워 먹고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동네북처럼 매도당하길 자처했었다.
분명히 언젠가 어딘가에서 내가 강수민에게 처맞으면서 등신 새끼처럼 빌빌거리는 걸 보고, 어렸던 정우진은 나름대로 내 도움이 되어 주려고 그랬던 것일 수도 있었다. 나 대신 자기가 처맞으면 나는 더 이상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다.
정우진이 언제부터 그랬던 건지도 몰랐다. 그냥 언제부턴가 찾아가면 가끔 없을 때가 있었다.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괜히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준 건 아닐까, 그런 이상한 생각도 한 적이 많았다. 딱풀 같은 걸 가지고 와서 뜯어 버렸던 창문을 다시 붙일까?
아무 죄도 없는 전봇대를 발로 차면서, 돌멩이를 집어 던지면서, 바닥에 발길질을 하면서 돌아가다가 우연찮게 봐 버렸다. 놀이터 한가운데에서 모래밭을 달리다가 넘어지는 어린애를…….
‘쟤는 왜 자꾸 넘어지는 거야?’
‘바보니까 그러지.’
‘아니, 몇 살인데 아직도 제대로 뛰지도 못하지?’
‘바보니까 그렇대도. 잘 걷지도 못하잖아. 야, 빨리 일어나서 다시 뛰어 봐.’
언제부턴가 그랬을 정우진의 모습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굉장히 복잡한 심정이었다.
화가 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고, 나도 내 감정을 정확히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던 것을 남들이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정우진마저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건, 정우진이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저러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랬던 걸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왜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까? 내가 사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아서 그랬던 걸까?
온갖 멋진 척과 허세라는 허세는 다 부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인 척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언제부턴가 들켜 버렸던 것이다. 내가 사실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똑똑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지켜 줄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들켜 버렸던 것이다.
마치 급소를 찔려 버린 것만 같아서 나는 그 충격을 감추기 위해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시에 그렇게 복잡한 감정을 다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그냥 짜증과 화로 표현이 되었고, 아무런 잘못도 없었던 어린애는 내가 여과도 없이 쏟아 내던 것들을 맨몸으로 다 맞아 버렸다.
어렸을 땐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점점 커 가면서 나도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들을 숨기기 위해 내가 화풀이를 했구나. 그 애는 자기가 잘못한 것인 줄 알고 있겠구나. 걔는 고작 밤하늘을 보면서도 웃던 아이였는데.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든지 다 믿던 애였는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던 것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해 버렸구나.
그걸 깨닫고도 나는 내 마음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생각만 해도 너무 괴로워서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말을 아꼈다. 정우진도 내게 자세히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런 사달이 난 것일까?
도대체 정우진이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나는 왜 그렇게 화를 주체하질 못했던 걸까?
어릴 때 강수민이 나를 대하던 것을 보고 정우진은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생활을 자처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정우진도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알게 되어서, 강수민을 내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일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선배님.”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해로 가라앉고 있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정우진이 내 어깨를 붙잡은 채 울고 있었다. 내가 화를 낼까 봐 겁을 내고 있었다. 그 별빛처럼 빛나는 눈에 거울처럼 내 얼굴이 비쳤다.
계속 외면하던 것과 마주한 탓일까? 나는 시종일관 나를 괴롭혔던 불편함의 정체를 불현듯이 깨달아 버렸다.
그러니까 이것은 화가 난 게 아니라 부채감이었다. 자괴감이었다. 좋아하는 아이에게 가장 밑바닥을 들켜 버린 아이의 수치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