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50/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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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라고 한 얘긴데 웃질 않아서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서 강수민은 어떻게 됐다고?”

내 물음에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힘없이 대답했다.

“준비 끝날 때까지는 계속 한국에 있을 예정이고, 그 뒤로는 이민 갈 거예요.”

“아예 이민을 가는 거라고?”

“네, 당장은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서 여기저기 답사라도 다녀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대요.”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 소리일까? 갑자기 또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에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강수민이 네 돈으로 해외여행 다니면서 세계 일주라도 한다는 소리야?”

“세계 일주까지는 아니고, 몇 군데만 가 보겠대요.”

“…….”

입을 다물지 않으면 욕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돈은 많지만 돈 쓸 데가 없다고 해도 이게 맞는 거야? 이건 아니지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런 인간쓰레기한테 정우진이 도대체 왜 그런 수고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넌 그걸 듣고 그러라고 했어?”

“저랑 직접 얘기한 건 아닌데, 어지간하면 그냥 하는 말 다 들어 주라고 했어요.”

“그래, 그랬구나.”

속이 답답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뱃속에서는 천불이 일었고, 머릿속에서는 지진이 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걸 어떻게 정우진에게 최대한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말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네 마음은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우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네가 강수민을 치워 버리고 싶은 그 마음은 잘 알겠는데, 아무리 편한 방법이라고 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

“돈 주는 거요?”

“돈을 줘도 내가 줘야지, 네가 왜 주냐? 강수민이 학폭 피해자라고 데리고 온 사람도 나랑 문제가 있었던 놈인데. 차라리 회사에서 해결해 주는 거라면 모를까, 네가 이러는 게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데,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우진이 다급히 말했다.

“회사 지분은 저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예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어요.”

“…….”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무슨 말이지? 나는 멍청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엠디?”

“네.”

“…….”

지분을 뭐 얼마나 가지고 있다는 거지? 그냥 주식 몇 주 가지고 있는 걸로 저런 소리를 하는 거 같지는 않아 더욱 황당했다. 내 혼란스러운 표정을 읽은 건지 정우진이 덧붙였다.

“제가 회사를 운영하는 건 아니고, 경영 팀이 따로 있어요. 대표님도…….”

말을 하다 말고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뭔가 단어를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고민하던 정우진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바지 사장?”

“…….”

“그런 거고……. 아무튼 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원래 소속 아티스트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회사 차원에서 해결을 해 주는 게 맞아요.”

“…….”

듣다 보니까 또 그런 거 같기도 한데, 강만덕 대표가 바지 사장이었다는 말이 너무 충격이라서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도대체 오늘 왜 이렇게 놀랄 일이 많은 걸까?

근데 만약 정우진이 실질적인 회사의 대표 같은 거였다면, 혹시 어나더가 계속 활동하지 못했던 이유도 관련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에 일단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이건 해결이 아니라……. 누가 봐도 강수민만 좋은 거잖아.”

사실 내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강수민이 내 인생에서 합법적으로 사라져 준다면 환영할 일이었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무슨 사고를 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나는 강수민이, 힘들게 번 정우진의 돈으로 세계 일주나 하면서 편한 인생을 사는 걸 결단코 원치 않았다. 차라리 강수민이 로또라도 맞아서 그걸로 떵떵거리면서 사는 게 나았다.

도대체 왜 정우진이 준 돈으로 강수민이 호강을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인상을 찌푸리자,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이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물었다.

“그럼 제가 알아서 처리할까요?”

오늘 아침은 뭘 먹을까요? 그런 걸 묻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정작 내용은 평범하지가 않았다. 목소리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표정도 조금 미묘한 것이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계속 반대를 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설마 그 흉터 보여 준 거 때문에? 생각해 보니까 그걸 보여 준 뒤로 정우진이 이상하게 조용해진 것 같기도 했다.

“처리는 무슨 처리?”

나는 정우진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의식을 하고 보니까 정말 티가 많이 났다.

“돈을 줘서 조용히 해결하는 것도 싫다고 하시니까, 그럼 남은 방법은 그런 거밖에 없잖아요. 저는 그래도 선배님 친척이라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했던 건데, 선배님이 안 그래도 된다고 하시면 저도 이렇게 번거롭게 할 이유가 없어요.”

도대체 이 새끼는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나는 손을 뻗어 정우진의 어깨를 붙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진아,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정체가 뭔데, 네가 막 사람을 처리하니 마니 그딴 소리를 해? 너 혹시 뭐 조폭 후계자 같은 거야? 아버지가 조폭이라 네가 막 조직을 잇고 그래야 돼?”

머릿속으로 영화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대충 눈치로 정우진의 아버지가 조폭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우진은 아이돌 생활을 하니 그런 쪽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정말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보더니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니, 네가 말하는 게 이상하잖아. 도대체 처리를 어떻게 한다는 거야?”

“인도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막 그렇게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무슨 나쁜 놈도 아니고…….”

인도적이지 않은 방법을 쓰는 시점이라면 이미 나쁜 놈인 거 아닌가? 인도적이지 않은 방법을 쓰는 착한 놈이 어디에 있는데?

“그래서 처리를 뭐 어떻게 한다는 건데? 새우 잡이 배 같은 거 태우겠다는 소리야?”

아니면 정말 말 그대로……. 진짜 죽이겠다는 건 아니겠지?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정우진이 그동안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안 봐도 얼추 예상이 갔다. 갑자기 너무 착잡해져서 표정이 굳자, 정우진이 나를 달래듯이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치며 말했다.

“새우 잡이 배에 태우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잘 타이르겠다는 얘기였어요. 어디든 외국으로 나가서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고, 현지 일자리도 구할 수 있게 알선도 해 주고, 빌려 줬던 돈도 받고요.”

말만 들으면 그냥 워킹 홀리데이 같은 합법적인 일인 것 같았지만, 어쩐지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의심스러운 내 눈빛에 정우진이 덧붙였다.

“물론 계약서도 쓰고요.”

“…….”

그 계약서에 법적인 효력은 있는 걸까? 내가 정우진을 너무 못 믿는 걸까? 하지만 정우진은 워낙 말을 너무 잘해서 사기꾼 같은 면이 있었다. 나도 듣다가 홀린 것처럼 수긍했던 적이 많았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면 이상했던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강수민이 싫다고 하면? 이미 네가 공짜로 돈 다 줘서 알겠다고 한 건데, 이제 와 일해서 갚으라고 하면 걔가 그러겠다고 할까? 걘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제대로 된 일도 안 해 본 놈이야. 정식으로 취직한 건 고사하고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길어 봤자 고작 2, 3일 정도 한 게 다라고.”

그런데 강수민이 갑자기 우리나라도 아니고,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일을 한다고? 내가 봤을 땐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강수민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몰상식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져야 할 염치라는 게 없어서 이런 걸로 정우진까지 괜히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었다.

나는 어차피 평생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강수민이 무슨 짓을 하든 별로 큰 타격도 없을 테지만, 정우진은 아니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잃을 게 많은 법이니, 같은 스캔들이 터져도 정우진이 훨씬 불리했다.

정우진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강수민은 정말 잃을 게 없으니, 무서울 것도 없는 인간의 표본이었다. 자기가 열 받으면 다 큰 성인 남자인 주제에 길거리 한복판에서도 엎어져 생떼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고, 딱 한 번밖에 입지 않은 옷을 교환해 주지 않았다고 매장에 가서 매니저 뺨따귀를 후려쳤던 미친놈이 바로 강수민이었다.

게다가 고등학생일 땐 자기를 무시했다고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를 구타한 적도 있는, 그야말로 인간쓰레기의 표본, 인간 말종의 살아 있는 역사였다. 말을 하려면 3박 4일 밤을 새도 모자랐다.

이런 불결한 오물 같은 새끼가 정우진을 더럽히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할까?

차라리 정우진은 엮이지 않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직접 나선 건 아니라고 하니, 그게 천만다행이었다.

“일단 돈 준 건 다 기록에 남아 있으니까 싫다고 하면 받아 낼 수는 있어요. 근데 지금까지 쓴 돈만 해도 꽤 되는데 그걸 갚을 수 있을지……. 그냥 일자리 소개시켜 준다고 할 때 얌전히 따라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조폭 아들이든 뭐든 간에 강수민 같은 놈한테 돈이나 뜯겨서 속이 상했는데, 이렇게 들으니까 또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해 둔 것 같아서 쥐꼬리만큼은 안심이 되기는 했다.

“그래도 배 째라고 드러누우면 골치 아플 텐데.”

“제가 알아서 잘 설득해 볼게요.”

“…….”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뭔가 내키지가 않았다. 저 새끼는 나한테 사기꾼처럼 굴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꼼꼼하게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사촌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 많은 돈을 그렇게 주다니……. 빌려 주는 거라고 해도 금액이 적지 않았다. 신용도 없는 놈한테 뭘 믿고 그 큰돈을 빌려 준단 말인가? 사채꾼들도 최소한의 신용은 확인하는 법인데…….

“근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다시 말하려는데, 정우진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님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그래요. 저도 어렸을 때 당한 게 많으니까 이 정도는 그냥 눈감아 주세요.”

어렸을 때 당한 게 많다는 말에 뜨끔했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아니, 따지고 보면 나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을 터였다. 정우진이 당한 걸 생각하면 사실 강수민은 새우 잡이 배에 팔려 가도 할 말이 없었다.

어릴 때 괴롭힌 거랑 다 커서 그러는 게 같으냐고 누가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당사자가 힘들었다는데 남이 나서서 고통의 경중을 따지는 것도 웃겼다.

“만약 그래도 안 따라간다고 하면 어쩔 거야?”

“이자까지 쳐서 돈 다 받아 내야죠.”

“이자는 몇 프로로?”

“20프로요. 그게 법정 최고 금리래요.”

“그래도 법은 지키네.”

그러면 된 거 아닐까? 내가 어느 정도 납득하는 것처럼 보이자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님한테 피해 안 가게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

“처리라는 말은 쓰지 말자. 뭔가 좀 너무……. 불법적인 일을 할 것처럼 들리니까. 그냥 잘 타일러서 이민을 보내는 걸로 하자. 그리고 너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걔 앞에는 나서지 말고. 혹시 네가 그러는 거 알면 분명 인터넷에 글 쓰고도 남을 놈이야.”

“네, 계속 조심할게요.”

어느 정도 사건이 일단락되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길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얌전히 따라가도 거기에 정착하게 해 준 돈도 다 받고. 너는 진짜 왜 그렇게 돈 쓸 줄을 모르냐? 돈이 많아도 그런 새끼한테 주기나 하고.”

“이럴 때 쓰려고 돈 번 거예요.”

“네 주변에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처리할 때?”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이 걱정 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려고요. 먹고 싶은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고,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게. 놀고 싶으면 놀고, 여행 가고 싶으면 여행 갈 수 있게. 혹시 사고 쳐도 해결해 줄 수 있게.”

“…….”

예상치 못한 말에 주춤하다가 마지막 말이 이상해서 물었다.

“사고는 무슨 사고?”

“실수로 남의 집 방범창 같은 거 뜯을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

“뭐 훔칠 수도 있고.”

“아, 이제 안 그런다고!”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웃었다. 어렸을 때 내가 정우진네 집에 방범창을 뜯은 적이 있는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보다. 학교 점심시간에 가지고 갈 것이 마땅히 없을 땐 동네 구멍가게에 들어가 젤리 같은 걸 훔친 적도 몇 번 있는데…….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다가 멈칫했다.

“너 내가 훔친 건 어떻게 알았어? 너한테 말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봤어요.”

“언제?”

“그냥 어쩌다가……. 그래서 제가 예쁜 돌멩이 같은 거 주워서 슈퍼 앞에 대신 뒀어요. 집에서 숟가락 같은 것도 가져가서 드리고.”

예쁜 돌멩이는 왜? 설마 그걸 돈 대신이라고 두고 온 건가? 행위 자체로만 보면 어린애들이 할 법한 귀여운 행동이었지만, 정우진이 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갑자기 낯이 뜨거워져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내 뒤치다꺼리는 네가 다 하고 있었구나.”

사실 내가 정우진을 돌본 게 아니라, 정우진이 나를 돌봤던 건 아닐까? 나 대신 강수민에게 맞았다는 것만 알았는데, 이건 난생처음 듣는 얘기였다.

“술 없냐?”

나도 이제는 정우진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무리일 것 같아서 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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