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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선배님, 속은 괜찮으세요?”
술을 마셨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정신 승리를 해 보려 해도, 정신 나간 행동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치가 떨려서 견딜 수 없었다. 심지어 문자로 기록까지 남아 버려서 없던 일인 척하는 것도 무리였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정말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닥에 엎어져 넋이 나가 있는 나를 보며 정우진이 물었다.
“아침 뭐 드실래요?”
“…….”
아침이고 나발이고 지금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혹시 아침을 굶으면 세상과 하직할 수 있을까? 그러면 더 이상 이런 번뇌와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근데 나 혹시 술이 덜 깼나?
어쩐지 아직도 좀 어지러운 거 같아서 가볍게 고개를 흔들자 머릿속에서 뇌도 같이 흔들리는 느낌이 났다. 욱신거리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고 아픔이 가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곁으로 다가와 이마에 손을 댔다.
“머리 아프세요?”
“…….”
“진통제 있기는 한데, 술 마시고 약 먹으면 안 되지 않아요?”
“…….”
시원한 손이 이마에 닿자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지고 있었다. 트럭에 치인 것처럼 아프던 몸에도 힘이 조금씩 빠지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이마에서 뺨으로 내려와 목덜미까지 문지르자 순식간에 정신이 희미해졌다.
“진짜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라면…….”
“네?”
강서주가 아니라 갑서주다…….
나중에 일어나면 갑멘에 가서 해장이나 해야겠다.
***
“하…….”
뒤척거리다가 목이 너무 말라서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데 또 눈은 왜 이렇게 안 떠지는 건지, 온몸이 얻어터진 것처럼 쑤시고 아파서 한참 끙끙거리면서 이불에 몸을 비비적거리다가 겨우 눈을 떴다.
“…….”
밤인가? 왜 이렇게 어둡지?
앞이 잘 보이질 않아서 도로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나서 크게 숨을 마셨다가 뱉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아니, 잠이 들었다기보다는 약간 이상한 상태였다.
잠은 들었는데, 정신은 깨어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마치 유체 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공중에 붕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하나 더 먹어.’
‘이제 배불러요.’
‘맛있다며? 빨리 먹어. 하나만 더 먹어. 딱 하나만.’
‘지금 세 개째예요…….’
‘네 개만 먹자. 너 이거 좋아하잖아.’
도대체 저긴 어딜까? 어떤 정신 나간 술주정뱅이가 밤거리 어딘가에서 정우진을 의자에 앉혀 놓고 바나나우유를 강제로 먹이고 있었다. 나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겨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우진에게 억지로 우유를 먹이고 있는 내 아구창을 날려 버리려고 하는 그때, 장면이 바뀌었다. 마치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세상이 흔들렸다.
‘나는 소파에서 잘게.’
‘침대 있는데 왜 소파에서 주무세요? 안 건드릴 테니까 그냥 같이 자요.’
‘뭘 건드려? 난 푹신한 게 좋아.’
‘푹신한 거요? 그럼 저도 소파에서 잘래요.’
‘안 돼.’
‘또 왜요?’
‘너무 푹신한 곳에서 자면 몸에 안 좋대. 허리에…….’
‘그럼 선배님은 왜 소파에서 자요?’
‘나는 괜찮아. 어른이니까…….’
몇 번 더 실랑이를 했지만 결국 둘 다 소파에서 자기로 한 뒤, 새벽 늦게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나는 얌전히 잠들지 않고 30분마다 한 번씩 깨서 온 집 안을 돌아다니며 술주정을 부렸다.
‘선배님, 어디 가세요?’
‘너 이불 덮어야 돼.’
‘이불 덮고 있어요.’
‘더 덮어.’
옷장을 열어 옷과 수건을 잔뜩 꺼내 정우진에게 덮어 준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 정우진은 한 번도 내게 짜증을 내지 않았지만, 점점 초점이 사라지는 눈과 수척해지는 얼굴을 보면 얼마나 힘든지 간접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내 술주정을 구경하던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혹시 이것도 환영인가 싶어 잠깐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정말 잠에서 깬 것 같았다.
주변이 너무 어둡고 조용해서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키니 다행히 두통도 없고 속도 많이 불편하지 않았다. 목이 좀 말라서 밖으로 나가자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정우진이 뭔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선배님. 일어나셨어요?”
인기척을 느낀 건지 정우진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전부 다 기억나는 건 아니었지만, 간밤에 내가 했던 짓거리들이 떠오르니 맨정신으로 정우진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 어…….”
시선을 피하며 대충 말하자 정우진이 나를 의자에 앉혔다.
“토마토 갈아 드릴까요? 인터넷에 찾아봤는데 숙취엔 토마토가 좋대요.”
“으응.”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우진은 금방 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낸 토마토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껍질을 벗긴 뒤 믹서에 간 주스를 내게 건넸다. 꿀까지 넣어 달달하고 시원한 주스를 마시니 조금 남아 있던 숙취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주스 한 컵을 원샷 때릴 동안 맞은편에 앉은 정우진은 양손을 턱으로 괴고 싱글벙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간밤에 저지른 죄가 있어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너는 속 괜찮아?”
“전 괜찮아요.”
“음……. 내가 라면 사 줄까? 갑멘에 가서 해장이나 할래?”
술주정을 부린 게 너무 미안해서 맛있는 거라도 사 주려고 했는데/,/ 갑멘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정우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아……. 라면이요? 김갑수 씨가 하신다던…….”
“갑수가 아니라 갑진이.”
“네, 아무튼……. 그거 말고 그냥 제가 만들어 드리면 안 돼요? 속 안 좋을 때 그렇게 기름기 많은 거 먹으면 안 좋대요.”
정우진이 만들면 또 치울 거리가 생기고 너무 귀찮은 거 아닌가 싶었지만,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집에서 만들어 먹기로 했다. 나도 도와주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일단 씻으라고 해서 군말 없이 하라는 대로 했다.
별로 오래 씻은 것도 아닌데 그 잠깐 사이에 식탁 위에는 순두부와 계란이 들어간 맑은 국물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깐 몰랐는데 다시 보니 엉망이었던 집도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는 걸 보니, 내가 자는 사이에 정우진이 다 치운 것 같았다. 술주정을 부린 것도 모자라서 집도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밥까지 얻어먹고…….
진상도 이런 개진상이 없었다.
“나 앞으로 술을 좀 끊어야겠다…….”
“저하고 있을 때만 마시고, 다른 사람이랑은 마시지 마세요.”
“아니야, 그냥 끊어야겠어. 내가 앞으로 술 마신다고 하면 내 뺨을 때려.”
“입술을 때리면 안 될까요?”
“어, 안 돼. 아무튼 잘 먹을게. 고마워.”
저 새끼도 아직 술이 덜 깬 건가? 가볍게 대꾸하고 맑은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먹자 차갑던 속이 편안해졌다. 금방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말없이 그런 나를 구경하던 정우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힐끗 옆을 보자 뭘 보고 있는 거 같은데 편하게 앉아서 보지, 왜 내 옆에서 저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우진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를 보고 울었던 게 떠올라 물었다.
“너 근데 아침에 왜 울었어?”
“아침에요?”
“나 보자마자 울었잖아. 너도 술 덜 깼었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나를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아, 그거……. 선배님이 한 말이 떠올라서…….”
“내가 한 말?”
“기억 안 나세요?”
“……어?”
다짜고짜 묻는 말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내가 또 무슨 짓을 한 건가? 대충 떠오르긴 했지만 전부 다 기억이 나는 건 아니어서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바나나우유를 계속 먹으라 했다고 저렇게 울었을 리는 없을 텐데……. 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묻자 정우진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갑자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정우진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잘 분간이 되질 않는 이상한 얼굴이었다.
“기억 못 하실 것 같아서 제가 찍어 놨어요.”
“잠깐!”
정우진이 동영상을 재생하려는 순간,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그, 그냥 안 볼게.”
저걸 보면 나는 또 죽고 싶어질 게 분명했다. 그 문자도…….
“아…….”
필사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문자가 생각나자 눈앞이 하얘졌다. 나는 고무장갑을 낀 손 그대로 다시 옆으로 스르륵 쓰러졌다. 정우진이 황급히 나를 받았지만 바닥에 누워 버린 나는 하얗게 가루가 되어 흩날리며 눈을 감았다.
“나 이제 가야 되는데 애들 얼굴은 어떻게 보지?”
“그냥 저희 집에서 계속 사세요. 제가 평생 안 보게 해 드릴게요.”
“진짜 죽고 싶다…….”
“저랑 같이 죽어요.”
“죽으면 안 되지…….”
“그럼 같이 살아요.”
“하…….”
심란해 죽겠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눈물을 머금고 중얼거렸다.
“도대체 그딴 문자는 왜 보낸 거냐고…….”
“늦으면 걱정해서 연락해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근데 저 혼자 자면 안 된다고 선배님이…….”
“…….”
설명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정우진이 그때 있었던 일들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뻗어 정우진의 입을 막았다. 축축하게 젖은 고무장갑으로 얼굴의 반이 가려졌는데도 정우진이 웃고 있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걸 보니 역시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숨을 참는데, 정우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렇게 힘드시면 그냥 죽었다 치고 여기에서 계속 사는 건 어떠세요? 뒤처리는 제가 알아서 다 할게요.”
“…….”
극단적인 정우진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빠르게 안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일단 난 가 볼게.”
“왜 갑자기 정신을 차리세요?”
“네 덕분이지.”
그래, 씨발. 술 마시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내가 범죄를 저질렀어? 취해서 사귀는 사람한테 애기라고 했다고, 그게 뭐 그렇게…….
“아악!”
자기 합리화를 하다가 엄습하는 소름에 싱크대에 머리를 쿵 박는데, 정우진이 그 사이로 빠르게 자기 손을 넣었다.
“좀 더 숨어 있을래요?”
손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고 있는데 정우진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재수 없게 웃는 얼굴을 봐도 정신이 들지 않아서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한 시간만 더…….”
내 말에 정우진이 내 머리통을 끌어안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
‘오남자2 촬영 현장?’ 가온x원 야밤의 취중 어부바 현장 포착 |
(세가온을 업고 있는 원의 사진) [뉴스 월드=김달기 기자] ‘오두막집 남자들’(이하 ‘오남자’)로 호흡을 맞췄던 그룹 배틀 브라더스(B.B) 세가온, 어나더 원이 야심한 시각 가로수 길에서 포착됐다.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 16개와 초콜릿, 아이스크림, 오징어 땅콩 등 술안주 8만 원어치를 구매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김 모 씨는 술에 취한 둘이 과자 선반 앞에 쪼그려 앉아 서로 네가 좋아하는 걸 고르라며 한참 말다툼을 했다고 전했다. 편의점을 나선 원은 세가온을 업은 채 긴 거리를 이동하다가 아파트 단지 안 쉼터에서 바나나우유 5개와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고 홀연히 사라졌다. 한편, 많은 사랑을 받은 ‘오남자’의 후속작을 원하는 팬들에게 송철 피디는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지만 구체적으로 계획된 바가 없다”고 입장을 알렸다. 사진 출처 : 개인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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