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와 B의 사이-155화 (160/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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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곡의 컨셉과 이미지가 정해지고, 뮤직비디오, 재킷 촬영 등의 일정도 얼추 잡혔다.

오늘은 녹음을 하는 날이라 아침부터 나도 그렇고, 애들도 별말이 없었다. 정식 녹음은 오랜만이기도 했고, 특히 이진혁은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격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담이 되는 상황에 많이 약한 편이었다.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로 무조건 성공해야만 하는 현실에서 프로듀싱까지 맡게 됐으니, 아마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커피 시켜 둘까?”

녹음실로 가는 차 안에서 묻자 유노을과 김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캐러멜마키아토랑 아이스아메.”

“나는 아이스아메랑 카페라테랑 카페모카.”

“아, 녹차라테 있으면 그것도. 베이글도 먹을까?”

어플로 자주 시키는 카페에서 애들이 말한 메뉴를 하나씩 체크하고 있는데, 이진혁이 말했다.

“나는 그냥 물.”

이진혁이 주머니에서 보리차 티백을 뭉텅이로 꺼내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실 아이스아메리카노 1리터와 베이글, 소금빵까지 주문하고 있는데 김강이 말했다.

“형, 오늘 형이 마음에 들 때까지 날 굴려도 돼.”

“진짜?”

“……어!”

호기롭게 말한 것치고는 대답이 늦었다. 계속 굳어 있던 이진혁의 표정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그걸 보더니 유노을도 덧붙였다.

“나도 굴려.”

나만 가만히 있자니 얌체처럼 보일 것 같아 얼른 말했다.

“나는 그냥 지금부터 구를게.”

“내가 무슨 쇠똥구리야? 뭘 자꾸 굴리래?”

그 말은 우리가 똥이라는 건가? 중요한 날에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가야 할 녹음실인데, 이런 더러운 얘기를 할 순 없기에 그냥 말을 돌렸다.

“아무튼 오늘도 힘내 보자.”

“파이팅.”

“데굴데굴.”

“끝나고 맛있는 거 먹자.”

각자 한마디씩 하자 타이밍 좋게 회사에 도착했다.

***

가녹음을 미리 해 보기는 했지만 역시 정식 녹음의 길은 험난했다. 특히 이번 컴백 곡은 안무도 따로 없을 정도로 보컬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금 약간 신 나는 거 같은데, 더 쓸쓸한 느낌으로 불러 줄 수 있어?”

“좋긴 한데, 한 번만 더 해 볼까?”

“지금 박자 안 맞거든?”

“그 부분 발음을 너무 또박또박하지 말고, 살짝 날려서 부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지금 좀 너무 정직한 느낌이야.”

이진혁의 과다한 열정으로 예정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녹음했다. 거의 녹초가 됐지만 그만하자고 하는 사람도,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녹음이 끝났지만, 한가하게 있을 시간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노래가 들릴 정도로 보컬 연습은 매일 해야 하고, 노래를 부를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얼굴 각도는 어떻게 할지까지 다 정해 둔 터라 하루에 12시간씩 연습실에 있어도 시간이 부족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과정들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힘들면 힘들수록 더 좋았다.

[선배님, 저 지금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어요.]

밤 열두 시가 넘어서 숙소에 도착한 탓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씻고 나오자마자 정우진에게 문자가 왔다. 이진혁과 유노을은 이미 곯아떨어진 상태였고, 김강 이 미친놈은 근손실이 난다고 지금 방에서 웨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슬쩍 문을 열고 안쪽을 보며 말하자 김강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의를 탈의한 채 운동하느라 울끈불끈 튀어나온 등 근육이 움직이는 걸 보며 질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좀…… 적당히 하고 자라…….”

쟤는 피곤하지도 않나? 아직 젊어서 그런가? 아니면 근육에 미친 사람들은 다 저런 걸까? 하여튼 대단한 인간이었다.

대충 겉옷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멀리서 보닛에 기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양손을 위로 올리고 펄럭펄럭 흔드는 걸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많이 피곤하시죠?”

어지간하면 그냥 괜찮다고 할 텐데, 지금은 정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라 빈말도 나오질 않았다. 내가 잠깐 대답을 망설이자 정우진이 차 앞좌석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거 피로 회복제인데 밥 먹고 드세요. 빈속에 먹으면 속 쓰릴 수도 있으니까.”

박카스 같은 건가 싶어서 안을 확인하자 처음 보는 박스가 보였다. 온통 영어라 알아볼 수도 없었다.

“피로 회복제?”

“네, 앰플인데 저도 많이 피곤할 때 가끔 먹는 거예요.”

박스를 뜯어 안을 보자 한 번에 하나씩 먹을 수 있게 나눠진 유리병이 보였다.

“알약도 있는데, 같이 먹으면 돼요.”

나는 박스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정우진을 쳐다봤다. 내일은 오전부터 재킷 촬영과 뮤직비디오 촬영이 있어서 일찍 나가야 하기 때문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이걸 주려고 왔나 보다.

“잠깐 들어갈까?”

“안 피곤하세요? 그냥 이것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나는 정우진을 운전석에 태우고 나도 앞좌석에 탔다. 피곤하긴 했지만 이대로 보내자니 좀 미안해서 물었다.

“밥은 먹었어?”

“네, 아까 사진 찍어서 보내 드린 거요.”

“그거 네 시쯤 보낸 거 아니야? 저녁은?”

“아, 저녁은 입맛이 별로 없어서…….”

입맛이 없어서 한 끼 정도 안 먹을 수도 있지만, 정우진은 이렇게 거를 때가 많아서 걱정이었다. 원래도 많이 먹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정우진이 먹는 걸 이렇게 안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물론 몸에 무리 가지 않게 알아서 잘 챙기고 있기야 하겠지만…….

“선배님은 뭐 드셨어요?”

“점심에는 유노을이 제육볶음 먹고 싶다고 해서 그거랑 비빔밥이랑…….”

워낙 먹은 게 많아서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운전석에 기대 나를 구경하듯 쳐다봤다. 그 외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상 대화를 잠시 이어 나갔다. 커피는 무얼 마셨고, 화장실에 가서 손 씻는데 물이 튀어서 옷이 젖었다든가, 오늘 하늘이 유독 화창하고 파래서 예뻤다든가 하는, 그런 일상적이고 따분한 이야기였다.

“근데 너희도 컴백 곧 하지 않아? 저번에 연습실에서 나한테 들려 줬던 노래 있잖아.”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벌써 30분이나 지나서 슬슬 가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떠올라 물었다. 순간 정우진이 아주 잠깐 동안 멈칫하는 게 보였다.

“제가요?”

그러더니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들려줬던 거 있잖아. 제목이 뭐였더라?”

“아, 그거 저희 곡 아니고 솔로곡일 걸요?”

……걸요? 확실하지도 않은 말이라 눈만 깜빡거리다가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냥 말 걸려고 아무거나 가지고 와서 들려줬던 거지?”

내 물음에 정우진은 양 볼에 공기를 잔뜩 집어넣고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황당해서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지금 개인 활동 기간이라 한동안 단체 일정은 없을 거예요. 저는 휴식 중이고, 사한결은 솔로……. 아, 맞다. 선배님, 그거 혹시 아세요? 사한결이랑 유노을이랑 이복형제 사이인 거.”

“……?”

뜬금없는 말에 순간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복형제라고?”

“네. 아, 이거 계약할 때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그냥 모른 척했던 거니까, 선배님도 직접 들은 거 아니면 그냥 계속 모르는 척해 주세요. 사한결 본명이 유한결이거든요.”

비비가 데뷔하기 전부터 유노을이 사한결에 대해 좋지 않게 이야기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데뷔하고 나서부터는 자꾸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건다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있는데…….

“유노을, 외동이라던데?”

하지만 멤버들끼리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외동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눈가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말했다.

“저도 자세한 건 모르는데, 유철호 회장이 재혼할 때 데리고 온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강한결에서 유한결로 성도 바뀌고.”

“유철호 회장? 그게 누군데?”

“선라이즈 회사 만든 사람이요.”

많이 익숙한 이름에 정우진을 보며 눈만 깜빡거리다가 물었다.

“……초코톡톡?”

“네, 맞아요.”

“미친…….”

선라이즈는 냉동식품이나 인스턴트 제품, 스낵류를 생산하는 식품 제조 회사인데, 최근에는 초코톡톡이라는 초코 과자가 품절 대란을 일으키고 있는 걸로 유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꽤 유명한 대기업인 걸로 알고 있는데, 유노을이 선라이즈 회장의 아들이라니.

“그럼 유노을이 재벌 2세 같은 거야?”

“내놓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따로 알아봐 드릴까요?”

순간 혹해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저었다.

“됐어, 따로 알아보긴 뭘 알아봐……. 너 근데 혹시 집에서 흥신소 같은 것도 해?”

알아봐 준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왠지 조폭과 밀접한 직업인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희 아버지는 건설업 하시는데요?”

“아……. 너도 재벌인 거지?”

잠깐 잊고 있던 게 떠올라서 묻자 정우진이 웃었다.

“돈 많은 게 좋으세요? 그럼 저도 재벌 할게요.”

그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벌이라는 게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냐?”

“그냥 돈만 많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듣고 보니 또 그런 것도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정우진은 지금도 잘 벌고 있겠지만 이대로 별 탈 없이 몇 년만 더 지나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부자이기는 하지만.

“재벌이 좋아요?”

“재벌이든 뭐든 일단 넌 저녁 좀 굶지 마. 어제도 안 먹었잖아.”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요즘 선배님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서 입맛이 자꾸 없어지는 거 같아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는 정우진을 보며 뭐라고 하려는데, 정우진이 다시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잠깐이라도 만나서 너무 좋은 거 같아요. 피곤하시니까 한동안 제가 선배님 끝날 시간에 집 앞으로 올게요. 저는 어차피 할 것도 없어서 한가해요. 그리고 조금 일찍 끝나는 날에는 미리 말씀해 주세요. 저 요즘 마사지도 배우고 있거든요? 아로마 오일로 하는 거라서 피로 회복에도 엄청 좋대요. 근육 뭉쳐서 뻐근한 것도 풀리고.”

조금 전 유노을 이야기를 했던 것만큼이나 뜬금없는 소리였다. 게다가 정우진이 마사지라니? 이렇게 안 어울릴 수도 있나? 피식 웃다가 오일로 하는 거라는 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 다 벗고 하는 거 아니야? 오일로 하는 거면…….”

내 물음에 풀어진 얼굴로 웃고 있던 정우진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정우진이 찬바람을 쌩쌩 날리며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받아 봤어요?”

“뭐?”

“다 벗고 받는 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들었는데? 안 받아 봤어.”

어깨랑 목이 뻐근해서 스포츠마사지 같은 건 받아 본 적이 몇 번 있지만, 그렇게 다 벗고 오일 마사지를 받은 적은 없었다.

“아……. 제가 얼른 배울 테니까 절대 그런 데는 가지 마세요.”

“안 갈 거야. 별로 생각도 없고…….”

그냥 누워서 누군가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좀 거북해서 애초에도 나는 마사지 같은 걸 받으러 다니지는 않았다. 내 말에 정우진이 조금 전 표정은 거짓말이었다는 듯 등신 팔푼이처럼 헤헤 웃었다. 그걸 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혹시 도둑놈이 제 발 저린 건가, 싶어서 떨떠름하게 물었다.

“너는 자주 다녔냐?”

“아니요? 한 번도 안 가 봤어요. 근처에 얼씬도 한 적 없어요. 앞으로도 절대 안 갈 거예요. 만약 누군가가 안 가면 칼로 배를 찌른다고 해도, 절대 안 갈 거예요. 목을 졸라서 죽인다고 해도 안 갈게요. 맹세할 수 있어요. 만약 제가 그런 곳에 발을 들이면 절 묶어 놓고 때리셔도 돼요. 평생 밖에 못 나가게 감금해도 절대 불평하지 않을게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처럼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 기세에 눌려서 점점 반대쪽으로 도망가느라, 마지막에는 거의 차 문에 거머리처럼 바짝 붙었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질린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웃었다.

“그러니까 선배님도 가지 마세요.”

“알았다고.”

“약속해요.”

굳이 약속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그냥 얌전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보다 스프레드 촬영할 때 이름 좀 불렀다고 그런 것도 그렇고……. 뭔가 좀 집착 같은 게 많은 타입인가? 그동안 뭐라고 이름을 붙이지 못했던 묘한 상황들도 제법 있었던 터라 살짝 의심이 가기는 했지만, 손가락을 걸고 어린애처럼 웃고 있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뭐 어떤가 싶었다.

원래 사귀는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독점욕을 갖는 게 일반적이고, 마사지 같은 것도 당연히 싫을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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