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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 글 하나가 올라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같은 학교, 같은 반, 아르바이트 동료 등등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자 학창 시절 양아치였다는 글이 결국 거짓말이었다는 게 기정사실화되었다.
물론 다행이기는 했지만 찝찝한 기분이 계속 남아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것도 본인도 아니고 지인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뭘 바라고 그런 글을 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한번 아니면 말고, 식의 논란을 바랐던 걸까? 별생각 없이 쓴 글이면 차라리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이번에 우리 노래도 새로 나오고 그러니까 괜히 찔러 본 거야. 그러니까 형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상황이 일단락되자 그제야 좀 나아진 건지, 이진혁이 도리어 나를 위로했다. 고맙기는 했지만 본인의 정신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이진혁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너는 좀 괜찮냐?”
“난 괜찮지.”
“강이 말대로 너 토 주머니 같은 거라도 만들어야겠다…….”
우황청심환을 몇 개나 먹은 건지, 아직도 이진혁이 창백한 얼굴로 심호흡을 하고 있던 걸 떠올리면 눈앞이 아찔해졌다.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이진혁이 멋쩍은 얼굴로 뒷목을 만졌다.
“그냥 갑자기 이런저런 일들이 터지니까……. 아무튼 형도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다고 너무 힘든데, 막 안 힘든 척은 하지 말고.”
그 말에 누워서 다리를 흔들고 있던 유노을이 내게 물었다.
“근데 형은 학교 다닐 때 잠을 얼마나 잤으면 사람들이 다, 얜 그냥 학교에서 잠만 잤다고 그래? 형은 학교에 자러 갔어?”
“어.”
사실이었기 때문에 별 설명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하자 김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먹으러 갔는데.”
“자랑이냐?”
“형은 뭐 하러 갔는데?”
“학교에 당연히 공부하러 가지!”
유노을이 황당하다는 듯 말하자 김강이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잠을 학교에서 보충한 것도 사실이지만, 나 역시 먹으러 간 것도 정말이었기 때문에 공감이 가서 덩달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정우진에게 온 전화라 방으로 들어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여보세요.”
-선배님, 뭐 하세요?
“그냥 있었어. 왜?”
-인터넷에 글 올렸던 사람한테 연락이 왔는데, 선배님을 꼭 만나고 싶대요.
“날? 왜?”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라 눈을 크게 뜨고 되묻자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선배님이 중학생일 때 겪었던 큰일이라고 하면 아마 알아들을 거라고……. 저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일단 선배님께 전화 드린 거예요.
“…….”
중학생일 때 겪었던 큰일이라니?
아무런 주어도 없었지만 나는 그 사람이 말하는 게 무슨 일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때 겪었던 큰일이라고 하면, 나 때문에 삼촌과 숙모가 사고로 죽은 일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강수민 본인도 아니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 폭력을 당했던 사람의 지인이라고 했던 것도 그렇고, 확실히 강수민에게 이것저것 들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몰라서 아직 대답은 안 했는데, 선배님이 편하신 대로 하세요. 만나기 싫은데 굳이 만날 이유도 없고……. 제가 잡음 안 나오게 잘 해결할게요.
정우진의 말처럼 굳이 만날 필요까지 있나 싶었지만, 인터넷에 글을 올린 것도 그렇고 섣부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좀 제정신인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만나서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듯해서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만나서 할 말이 있대?”
-그런가 봐요. 만나시려고요?
“만나자는데 한번 만나 보지, 뭐. 무슨 말 할지도 궁금하고.”
정황상 별로 좋은 말을 할 것 같지는 않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도대체 이런 일을 왜 벌인 건지 이유가 궁금했다. 뭐 엄청 대단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당장은 잡혀 있는 스케줄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고, 내일쯤 만날까 했는데 늦은 밤에도 괜찮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밤늦게 만나기로 했다. 스케줄을 하는 동안 애들에게도 미리 말을 해 줘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면 중학생일 때 겪었던 큰일에 대해서도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집에 도착해 대충 씻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정우진이 보였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하루 종일 찝찝하고 불안하고 불쾌하고 노여웠던 마음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상할 정도로 신기한 상황에 내가 잠깐 멍하게 눈만 깜빡거리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아니…….”
피곤한 건 맞지만, 그것도 사실 정우진을 보는 순간 많이 가신 상태였다. 단지 누군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눈에 띄게 몸의 상태가 변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이래서 결혼하면 아빠들이 힘들게 일하고 집에 와서 자기를 반겨 주는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보면 피곤이 사라진다는 말을 했던 걸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게 사실일 줄은 몰랐다.
“왜 그러세요?”
내가 넋이 나간 얼굴로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점점 정우진의 얼굴에 불안감이 깃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바로 회사로 갈 거지?”
“그럴 생각이기는 한데……. 혹시 별로 안 내키면 그냥 만나지 마세요. 왜 그런 건지 궁금한 것도 그냥 다른 사람이 물어봐도 되긴 하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직접 만나는 건 좀 아닌가 싶은 마음이 계속 있었지만, 정우진을 보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회사에서 만날 거고, 같이 가는데 딱히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너도 같이 만날 건 아니지?”
차에 타며 묻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럼 전 뭐 해요?”
“뭐? 아니, 너도 같이 나오면 괜히 그림만 이상해지잖아. 그 사람이 너까지 엮어서 또 이상한 소설이나 쓰면 어쩌려고.”
그냥 회사에 데려다주려고 온 건지 알았는데 정우진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줄 알았더니, 정우진이 절박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했다.
“어떻게 엮을까요?”
“뭐?”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고. 선배님은 안 궁금하세요?”
“…….”
나는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안 나는 거 같은데, 혹시 술 마시고 왔나? 정우진의 얼굴에 입을 가까이 대고 숨을 한 번 마셔 보는데, 멀뚱멀뚱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이 막을 새도 없이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부닥쳤다.
말랑하고 따뜻한 게 쪽 소리를 내며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순간, 화들짝 놀라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크게 뜨는 나를 보며 정우진이 배시시 웃었다.
“아니, 아까부터 자꾸 뭔가 신호를 주는 거 같아서…….”
“신호는 무슨 신호?”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자꾸 쳐다보고, 만지고, 가까이에 오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사실 뽀뽀 한번쯤은 못 할 것도 아니었지만, 너무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그런 걸까? 진짜 별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민망해서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지르면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나 혼자 만날 테니까 너는 밖에서 기다려. 만약 다른 사람이랑 같이 들어가도, 매니저 형이나……. 아무튼 너는 안 돼.”
“그럼 대신 녹음기 들고 들어가세요. 밖에서 저도 들을 수 있게.”
계속 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정우진은 순순히 내 말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녹음기? 그냥 주머니에 넣고 들어가면 돼?”
“네, 그리고 조사를 좀 해 봤는데…….”
정우진이 자동차의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글 올린 사람이요. 그 사람 이름이 김도웅이거든요. 강수민이랑은 접점이 딱히 없고, 그 박씨랑 연관이 있는 거 같던데요. 같이 도박하던 멤버 같은데, 아마 박씨한테 들은 거 같아요.”
순간 박씨가 누구지, 하다가 그 임플란트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름을 나도 들은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정우진이랑 똑같이 박씨라고 불렀다.
“박씨는 강수민한테 듣고?”
“네, 학교 폭력 이야기도 그렇고……. 강수민은 박씨랑 공모해서 저희 회사에 돈 뜯어내려는 목적이었는데, 박씨가 김도웅한테 빚진 게 있어서 둘이 트러블이 좀 있었나 봐요. 그러는 과정에서 강수민이랑 선배님 이야기도 같이 한 것 같아요.”
“개판이네…….”
박씨랑 김도웅인지 뭔지 그 새끼들은 그렇다 쳐도, 강수민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가 가족 같지도 않은 원수지간에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어떻게 사촌 동생을 저런 도박하는 새끼들한테…….
이제는 강수민에게 기대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그러니까 강수민은 내 학폭 터뜨리려고 박씨한테 접근한 거고, 박씨는 김도웅한테 빚진 게 있어서 이번 일에 대해서 말한 거고. 박씨는 학폭 문제 터뜨리면 당연히 우리가 돈으로 무마할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내가 간단하게 정리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김도웅은 약도 하는 거 같아요.”
“약? 무슨 약? 설마 마약?”
“네.”
“…….”
마약이라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정우진이 강수민에게 물색없이 돈도 주고, 집도 사 주고 그러니까, 괜히 그 새끼들도 이상한 마음을 먹고 이런 일을 만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새끼들이 다 정우진을 호구로 보고 접근했다는 뜻이었다.
“…….”
슬쩍 시선을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운전하느라 앞을 보고 있었지만 내 시선을 느끼자마자 정우진도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웃음을 치면서 웃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착잡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