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와 B의 사이-176화 (18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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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주변 지인들에게 생일 선물을 할 때에도 나는 갖고 싶은 게 뭔지 물어보고 필요한 걸 사 주는 편이었다. 몰래 사서 서프라이즈로 준다? 이런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

그러니까 나는 그런 쪽으로 센스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고민이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딱 이거다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케이크? 정우진은 그런 걸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고, 너무 식상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래도 생일인데 작은 거라도 케이크는 사야 할까? 그래, 그럼 그냥 작은 걸로 하나 사기로 하고……. 케이크는 그냥 옵션 같은 거지, 메인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했다.

지갑 같은 걸 사 줄까? 아니면 시계? 아니, 근데 정우진이 평소에 하고 다니는 시계 가격을 생각하면 날 갖다 팔아야 그럴듯한 걸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렇다고 어정쩡하게 싼 걸 사 주자니 그것도 좀 성의 없을 듯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한참 머리를 쥐어짜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인터넷의 힘을 빌려 보기로 했다.

‘20대 남자 생일 선물’이라고 검색창에 입력을 하자 이것저것 뜨기 시작했다.

“노트북, 향수, 자전거, 태블릿PC, 게임기……. 무선 이어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트북이나 태블릿PC, 게임기 같은 건 사 줘 봤자 별로 쓰지도 않을 것 같고. 무선 이어폰은 이미 있지 않을까? 자전거는 사 줘도 타고 다니지도 못할 텐데.

향수는…….

“…….”

정우진은 평소에도 따로 향수를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집에 놀러 갔을 때도 향수는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무엇보다 가끔 안거나 곁에 올 때 샴푸 냄새인지 로션 냄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도 괜찮아서 굳이 향수를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

선물 고르기가 원래 이렇게 힘든 거였나? 고민도 별로 안 하고 그냥 사 달라는 것만 사 줘서 선물 사기가 이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하얀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음악 방송 대기실에서 리허설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라 다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진혁은 소파에 담요를 덮고 누워 눈을 붙이고 있는 중이었고, 유노을과 김강은 무슨 힘이 그렇게 남아도는 건지,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참참참 같은 걸 하면서 놀고 있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김강이 앞머리를 올린 채 유노을에게 딱밤을 맞는 걸 보다가 다시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검색을 했다.

‘애인 생일 선물’

심각한 표정으로 포스팅된 글을 한참 찾아봤지만, 뭔가 여자 선물과 섞인 느낌이라 편의를 위해 또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남자 친구 생일 선물’

“…….”

하지만 이것도 20대 남자 생일 선물과 특별히 다른 건 없었다. 그냥 반지 같은 걸 사 줄까? 아니면 커플링? 이건 좀 이른가? 아니, 생일 선물이면 생일인 사람을 위한 걸 줘야 하는데 커플링은 아닌가?

어릴 때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뒤로 처음 맞는 생일이라 뭔가 근사한 걸 주고 싶은데, 마음만 앞섰지 정작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라도 좀 넉넉했으면 이렇게까지 초조하진 않을 텐데, 며칠 남지도 않았고…….

하필이면 또 생일이 컴백 시기랑 겹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 아까부터 무슨 다리를 그렇게 떨어?”

조용히 놀고 있던 유노을과 김강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주 잠깐 선물에 관한 걸 물어볼까 했지만, 저 눈치 빠른 악당 같은 것들이 또 언제 어디서 나를 놀릴지 몰라서 그냥 고개만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또 눈물 나? 울고 싶어? 막 북받쳐 올라?”

“나한테 안겨서 울어.”

“…….”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구구절절 묻는 유노을과 긴 팔을 활짝 펼치는 김강을 보고 있자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앞으로 내밀면서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아, 맞다. 형, 내일 생일인데 우리 스케줄 있어서 어떡해?”

“괜찮아.”

하는 김에 자고 있는 이진혁의 사진도 찍었다. 나중에 SNS에 올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강이 물었다.

“밤에 우리끼리 작게 파티 같은 거라도 할까? 케이크만 사서.”

“됐어. 안 그래도 피곤한데. 그냥 다음에 좀 한가해지면 그때 해 줘.”

그동안 그냥 지나간 생일이 훨씬 더 많아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바쁜데 괜히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아서 한 말인데, 김강이 극구 반대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럼 생일 축하 노래라도 부르자, 아침에. 미역국 먹으면서.”

“초코파이 사서 3단 정도로만 쌓을까?”

“그럴 거면 그냥 작은 케이크 사는 게 낫지 않아?”

“아니면 밥 케이크 같은 거 만들어 볼까?”

유노을과 김강은 생일 당사자인 내 말은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정우진의 생일 선물을 빨리 생각해야만 했다.

흔하지 않고 특별하고, 정우진에게 잘 어울리는 완벽한 무언가를 주고 싶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으니까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지 않는 게 시간이 지난다고 생각이 날까? 결국 스케줄 때문에 바빠서 생일 당일에는 정우진을 만나지도 못하고, 11일이 되어서야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전화도 하고 문자도 꽤 하긴 했는데, 정우진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기분 탓인가 했는데, 갈수록 통화할 때의 목소리도 점점 힘이 없어지고, 문자의 빈도도 줄었다.

그래도 횟수만 따지면 엄청 많기는 했지만, 어쨌든 줄어든 것도 사실이긴 했다.

정우진의 상태가 왜 그렇게 된 건지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요즘 계속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고, 잠시 아주 잠깐 얼굴만 보자는 것도 시간이 없어서 못 만났던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많이 미안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시간이 나거나, 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볼 수 있다면 만나러 갔겠지만 이미 잘 시간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4주 차만 지나면 이렇게까진 바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우리 둘의 생일 그 4주 안에 다 몰려 있는 바람에 그게 문제였다.

어쨌든 내 생일은 이미 지났다 쳐도 정우진의 생일 전에는 만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승강기에서 내려 거의 뛰다시피 지하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자 정우진이 웬일로 밖에 나와 있었다.

“야, 너 왜 나와 있어?”

정우진에게 뛰어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지하라 그런지 목소리가 울렸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거의 지척까지 다가가자 자리에 서서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이 뜬금없이 말했다.

“저 안아 주세요.”

“뭐?”

“안아 주세요.”

“갑자기?”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없이 대뜸 하는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실내였다면 그냥 원하는 대로 안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일단 들어가자.”

“저도 안아 주세요.”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까부터. 빨리 들어와.”

자꾸 이상하게 떼를 쓰는 정우진을 차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선팅이 워낙 짙어서 불법인 건 아닌지, 평소에는 걱정을 했는데 이럴 때는 또 도움이 됐다.

“갑자기 왜 안아 달라고 해?”

“…….”

앵무새처럼 안아 달라는 말만 하더니 막상 물어보니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나도 덩달아 입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정우진은 약간 야윈 것 같기도 했다. 눈가도 조금 빨간 것 같고……. 앞머리도 살짝 길었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민망하고 어이가 없어져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누가 보면 몇 달은 못 만난 줄 알겠다. 고작 며칠 못 만났는데……. 아니, 근데 정우진은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쉬고 있으면서 살이 왜 빠졌지?

손을 뻗어 어깨와 팔뚝을 더듬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아까보다 조금 더 눈가를 붉힌 채 입을 열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놀란 눈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 그거 아직 기억……. 아니, 뭐. 너도……. 아니.”

너도 태어나 줘서 고맙다고 하려다가 아직 생일이 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는 걸 깨닫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것도 아니고 어렸을 때 스치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게 고맙기도 하고 참 민망하기도 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저 문장 자체도 너무 낯간지럽고…….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서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만지다가 말했다.

“고마워.”

“이 말은 직접 만나서 해 주고 싶었어요.”

“아…….”

8일 자정이 되자마자 정우진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왔었다. 잠깐 통화도 했었는데 그땐 안 하더니……. 너무 예상치도 못했던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 당혹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당혹감이 아니라 감동을 받은 건가? 뭐 때문에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야, 너는 그때 엄청 어렸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네.”

웃으며 말을 돌리자 정우진이 내 쪽으로 몸을 완전히 틀었다.

“당연히 기억하죠. 저 자고 있는데 창문 엄청 두드렸잖아요.”

“맞아, 그랬지……. 너 자다가 눈도 못 뜨고 나왔는데.”

잠이 덜 깨서 팍 일그러진 얼굴로 눈가를 비비면서 내 생일을 축하해 주던 어린아이가 떠오르자 절로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 엄청 끌고 다녔네. 막 새벽에 억지로 깨우고, 창문 밖으로 탈출시키고……. 야, 맞다. 내가 너 데리고 가출했던 것도 혹시 기억나?”

내 물음에 정우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파서 하루 만에 다시 돌아갔잖아요.”

“아, 진짜. 그때 왜 그랬지?”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정우진이 배시시 웃었다. 같이 가출하자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웃던 그날과 똑같은 미소였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너무 서러워져서 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떠나 버리면 유진이는 혼자 남게 되니까 결국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없으면 아무도 그 애를 챙겨 주지 않을 게 틀림없기 때문에 사실은 싫다고 해도 어떻게든 꼬셔서 데리고 갔을 것이다.

아무튼 유진이의 손을 잡고 일단 동네를 떠나기 위해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혼자도 아니었고, 춥지도 않았으며, 떠난다는 생각에 그저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네에서 내가 가 본 가장 먼 곳까지 도착하자, 그때부터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곳부터는 길도 모르고, 슬슬 배가 고파졌기 때문이다. 내 손을 잡고 한 발자국씩 나를 따라 걷던 유진이도 슬슬 지쳐 가고 있었다.

‘……우리 오늘은 집에 가고 내일 다시 나올까?’

결국 내 가출 준비가 미흡했다는 걸 인정하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러자 유진이는 가출을 하자고 했을 때처럼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돌아가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파서 결국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먹기도 했었는데…….

잠시 어릴 때의 추억에 잠겨 있다가 문득 정우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는 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럭저럭 잘난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안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듯했다.

아까 갑자기 안아 달라고 했던 것도 마음에 걸려서 물었다.

“너 근데 아깐 왜 그랬어?”

“언제요?”

“갑자기 안아 달라고 했잖아.”

“아……. 그냥요.”

내 물음에 정우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별 게 아닌 건 아닌 것 같아서 미간을 구기고 다시 물었다.

“왜? 말을 해. 왜 안아 달라고 했는데.”

“그냥 그랬어요. 오랜만에 만났잖아요.”

“그래서 갑자기 안아 달라고 했다고? 그때 너 표정이 별로 안 좋던데?”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끈질기게 묻자 계속 시치미를 떼던 정우진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입술을 댓 발 내밀고 가만히 나를 보더니 원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은 제가 다른 사람을 안고 있으면 어떨 거 같으세요?”

“뭐?”

“제가 다른 사람이랑 포옹하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요?”

“…….”

아까 보자마자 안아 달라고 했던 것만큼이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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