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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던 동네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산등성이처럼 가팔랐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 근처에 아직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구멍가게와 작은 빵집, 그리고 백반집 등이 보였다.
“빵이라도 먹을까?”
밥을 먹기에는 너무 과한 것 같아서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갑자기 뒷좌석에서 뭔가를 쑥 꺼냈다.
“저 식빵 가지고 왔어요.”
“뭐? 식빵?”
갑자기 웬 식빵? 내가 놀란 눈으로 묻자 정우진이 식빵 한 봉지를 들곤 내게 보여 줬다.
“……?”
그냥 말 그대로, 식빵 한 봉지……. 우유식빵…….
“어……. 그래, 그럼. 그냥 그거 먹자.”
다른 빵도 아니고 식빵 한 봉지만 덜렁 가지고 온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왠지 어릴 때 정우진이 내게 줬던 게 떠올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그렇고, 식빵을 챙긴 것도 그렇고 뭔가……. 추억 여행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분위기가 갑자기 너무 엄숙해진 것 같아서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군말 없이 정우진을 따랐다.
“이 길 진짜 오랜만이다. 그쵸?”
“그치.”
“자판기 커피 마실래요? 따뜻한 거.”
“그래, 뭐…….”
올라가다 보니, 자판기가 보여서 주머니를 뒤졌다.
“동전 있어?”
“저 있어요.”
그렇게 밀크 커피 두 잔을 뽑은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들고 다시 등산을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꽤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는 거의 폐허네.”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질 않았다. 물론 시간이 늦어서 잠들었을 수도 있지만, 뭔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나는 게 사람이 사는 곳 같지가 않았다.
“여기 기억나세요? 예전에 비올 때 선배님 여기서 미끄러졌잖아요.”
정우진이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특히 더 경사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나는 이 길목을 다니며 넘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끝까지 올라가자 늘 별을 구경하던 가장 높은 집이 있던 곳에 도착했다.
역시나 예전과는 다르게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었다.
“예전에는 담이 엄청 높았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까 되게 낮네.”
반쯤 부서진, 담벼락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낮은 턱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그 위로 올라섰다.
"손잡아 드릴까요?"
됐다고 하려다가 그냥 손이 남아서 붙잡자 정우진이 강한 힘으로 나를 당겼다. 굳이 옥상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이 담 위에만 서도 하늘이 꽤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새카만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콕콕 박혀 있었다.
“어릴 땐 더 많았던 거 같은데.”
“그러게요. 오늘만 별로 없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어릴 때의 추억이 미화가 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게 어릴 적 내 기억 속의 저곳은 마치 은하수처럼 별들의 강이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으니까.
“이거 드실래요?”
고개를 들고 멀뚱멀뚱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고개를 돌리자 부스럭거리면서 비닐 안에서 정우진이 식빵 한 조각을 꺼냈다. 그걸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
“왜요?”
“그냥, 웃기잖아. 여기까지 와서 식빵이나 먹고 있는 게.”
“다음에는 제가 만들어서 줄게요.”
차가운 식빵을 받아서 한 입 먹자 그냥 식빵 맛이 났다. 그래도 반쯤 식은 자판기 커피와 함께 먹으니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야, 커피에 식빵 찍어서 먹어 봐. 그럼 맛있어.”
“이렇게요?”
“어.”
내 말에 정우진이 반을 찢은 식빵을 종이컵 안에 푹 담갔다가 빼서 먹었다.
“맛있지?”
“네, 선배님도 드실래요?”
정우진이 다시 식빵을 커피에 찍어 내 입가에 댔다. 몇 번 그렇게 받아먹으니 커피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커피 한 잔 더 뽑아 올까?”
“지금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나를 보던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낮은 턱에서 내려서서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내려갔다. 자연스럽게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꽉 잡고 놔주질 않았다.
“손 좀 놔.”
“왜요?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데.”
“아무도 없는지 어떻게 알아? 그냥 조용해서 그렇지, 누가 있을 수도 있잖아.”
내가 속삭이듯 작게 말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없어요.”
“장담을 하네? 있으면 어쩔래?”
심심한데 내기라도 해 볼까 싶어서 묻자 정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없어요. 이 근처 건물 제가 다 사서 지금 빈집이에요.”
“…….”
동네 슈퍼에서 포켓몬 빵을 다 사 왔다는 말투로 정우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순간 말을 제대로 알아듣질 못해서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여기 건물을 다 샀다고?”
“다는 아니고 거의 다요.”
“아…….”
내기했으면 좆될 뻔했네…….
뭔가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언제 샀는데?”
“한……. 2년 좀 넘었을 걸요?”
“왜 샀어? 여기에다가 뭐, 건물이라도 짓게?”
아니면 뭔가 재개발 투자 같은 건가? 동네가 워낙 노후된 곳이라 가능성이 있기도 한 것 같은데……. 너무 외진 곳 아닌가? 이런 쪽으로는 문외한인 나도 여긴 투자 가치가 조금도 없어 보이기는 했다.
“나중에 집이라도 지을까요? 사람도 별로 없고 좋은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아무런 계획도 없이 산 건가? 하여튼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정우진은 돈을 참 특이하게 쓰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의문만 가득한 채 자판기 앞에 도착한 우리는 커피를 또 두 잔 뽑았다.
“야, 맞다. 그거 어떻게 됐어? 박도웅? 걔.”
“박도웅? 아……. 음주 운전해서 병원에 있다던데요?”
“뭐?”
커피를 받으며 나는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음주 운전? 갑자기?”
“네, 그때 술도 마시고 약도 한 상태라서 엄청 많이 다쳤다던데.”
“…….”
조금 전 건물을 샀다고 말했던 것처럼 별거 아닌 듯한 말투였다. 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말없이 쳐다보자 정우진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변명하듯 말했다.
“지금 저 의심하고 계시죠?”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잖아. 너 진짜…….”
그 새끼가 죗값을 받길 원하긴 했지만, 그 벌을 정우진이 주길 바란 건 아니었다. 애초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정우진의 손이 굳이 저런 새끼 때문에 왜 더러워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근데 갑자기 사고가 왜 나?”
아주 조금이라도 그 사고에 정우진이 관여되어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정우진은 끝까지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게 누가 술 마시고 운전하랬나? 약을 하랬나? 내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왜 저한테 그러세요? 진짜 너무해.”
“…….”
정우진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근데 듣고 보니까 또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누가 술 마시고 운전을 하랬나? 근데 어떻게 이렇게 딱 타이밍이 좋게 사고가 난 건지 모르겠다.
“어쩌다가 사고가 난 건데?”
“저야 모르죠. 약도 해서 그런지 환각이라도 본 건가, 갑자기 빈 건물에 들이박았다던데.”
“……죽은 건 아니지?”
“엄청 많이 다쳤다고 하던데……. 특히 다리가 많이 다쳤대요.”
도대체 뭘 얼마나 어떻게 많이 다친 건지 물어보기가 겁이 났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진짜 네가 한 거 아니지?”
“안 했다니까요? 저는 그냥 매일 밤 기도한 것밖에 없어요.”
“무슨 기도?”
“제발 그 나쁜 새끼가 벌 받게 해 주세요.”
정우진이 눈을 감고 살짝 고개를 들며 말했다. 뿌옇게 우리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가로등 불빛과 맞물려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성스러워 보였다. 아니, 성스러운 건지 불길한 건지…….
정말 기도를 하듯 한참 그러고 있던 정우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의 악의가 이렇게 무서운 건가 봐요. 나는 진짜 착하게 살아야지.”
“…….”
“정말 제가 한 거 아니에요.”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건지, 시종일관 장난스럽던 표정이 별안간 진지해졌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모습에도 여전히 나는 혼란스러웠다. 정우진이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는데 동조했다는 사실보다, 왜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벌이게 된 건지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다.
“정말 아니에요. 맹세할 수 있어요.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다시금 정색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럼 그 새끼는 그냥 자기가 음주 운전해서 다쳤다는 거지?”
“네, 그리고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원래 약도 하고 술을 밥 먹듯이 먹으면서 음주 운전도 자주 하던 놈이었어요. 그동안 운지 좋아서 사고가 안 났던 거지. 저에게 죄가 있다면 그냥 그 새끼의 음주 운전을 기원하면서 술 사 먹을 돈을 준 것밖에는 없어요.”
“…….”
당당하게 하는 말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요상한 표정으로 한참 정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다.”
“앞으로 선배님께 해가 되는 사람들은 제가 인생을 바쳐서 저주할게요. 직접 죽이면 감옥 가니까.”
“…….”
오르막길을 도로 올라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예전에 내가 살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이미 예전에 없어져서 그곳에는 다른 건물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언젠가 이 근처에서 정우진이 어린 마음에 나를 대신해서 강수민의 장난감 노릇을 했던 걸 떠올렸다.
“저주하지 마.”
“저주도요? 그냥 생각만 하는 건데?”
“그래,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걸 보고, 재미있게 놀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 누군가를 저주하지도 말고, 손을 더럽히지도 말고, 헛돈을 쓰지도 말고, 자존심을 굽히지도 말고,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지도 말고, 누군가에게 대신 욕을 먹지도 말고.
“아무것도?”
내가 말을 하다 말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정리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네 마음대로 살아. 네 마음이 가는 대로. 네 멋대로.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내 말에 정우진의 눈이 커졌다.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보던 정우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짜요?”
“그래, 진짜로.”
“후회 안 하겠어요?”
“……?”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