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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가이드는 이만 퇴사합니다-4화 (4/65)

04화

나는 태운의 집에서 그와 함께 지내며 윤 박사님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렸다. 나와 태운은 외출하는 일 없이 집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냈다.

그의 집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스크린 룸과 수영장, 피트니스 룸 등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활동 공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집이 낯설었기에 나는 주로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태운은 내 옆에서 함께 티브이를 보았는데, 종종 협회의 부름으로 외출하기도 했다. 그가 나가면 나는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태운은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지만, 그의 집처럼 그도 아직은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만 조심스러워졌다. 원래도 성격이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만, 태운의 앞에서는 더욱더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나를 태운도 느낀 것일까, 그가 오늘은 내게 함께 외출하자고 권유했다.

“신의 씨, 답답한데 나갔다 올까요?”

“나가도 괜찮아요?”

“당연하죠.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요?”

“저… 음.”

태운은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평소에 공장과 숙소에서만 지냈기에 사람들이 평상시에 어디를 놀러 다니는지 몰랐다. 가고 싶은 곳 하나 제대로 말 못 하는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냥… 적당히 바람 쐬고 싶어요.”

“그럼 제가 자주 가는 곳에 갈까요?”

“자주 가는 곳이 어딘데요?”

“도착할 때까지 비밀이에요.”

궁금했지만, 태운의 비밀이라는 말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나와 태운은 함께 살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같이 밖에 나왔다.

“40분 정도 걸릴 거에요.”

핸들을 돌리는 태운의 모습을 보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태운이 능숙하게 차를 운전하며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신의 씨, 드라이브하는 거 좋아해요?”

“좋아하는 거 같아요.”

지금처럼 차를 타고 드라이브한 적은 처음이었지만, 태운의 스포츠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고 있으니 갑갑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럼 자주 드라이브해요. 다음에는 새벽 드라이브 어때요?”

“좋아요.”

태운과 차 하나 없는 도로에서 새벽 드라이브를 하는 상상만으로도 기대되고 기다려졌다.

“신의 씨, 어디 가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네.”

사실 태운이 자주 가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본가에 가는 거예요.”

“본, 본가요?”

본가라는 말에 저절로 몸이 경직되었다. 태운의 부모님을 뵈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부터 되었다.

“신의 씨, 얼굴이 굳었어요. 괜찮아요? 누구를 만나진 않을 거예요. 그냥 본가 근처에 가는 거예요.”

“아… 본가 근처.”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태운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산 중턱의 저택이었다. 해외 영화에서나 볼 법한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외관에 홀려 한동안 저택을 바라봤다.

그러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태운을 눈치채고 그의 안내를 받아 저택 뒤로 걸어갔다. 도착한 곳엔 넓은 유리 온실이 있었다.

“온실이네요?”

“네. 어머니께 물려받았어요.”

“그럼 아까 저택이 본가예요?”

태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나는 저택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럼 어머님 잠깐 뵙고 올까요?”

“못 봬요.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이 다물어졌다.

“부모님 두 분 다 각성자셨는데 게이트에서 순직하셨습니다.”

“…아, 제가 괜히 어머님 이야기를 꺼내서….”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에는 능숙하지 않았기에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나와 달리 태운은 별거 아니라는 듯 온실 문을 열었다.

“괜찮아요. 오래전 일인걸요. 이제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안으로 들어가죠.”

나는 결국 태운의 말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 안은 마치 열대 우림같이 이름 모를 나무와 식물들로 가득했다.

밖에서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들어오니 규모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와 태운은 온실 안을 거닐었다. 중앙에는 연못도 있었는데 안에 잉어들이 활발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노랗고 주황빛이 도는 잉어를 바라보다 태운에게 물었다.

“혹시 수선화도 있어요?”

“네. 있어요.”

“저희 어머니는 작년에 건강 악화로 돌아가셨거든요. 생전에 수선화를 좋아하셔서 보고 싶어요.”

“신의 씨 어머님도 일찍 떠나셨군요. 저희 어머니도 수선화 좋아하셨어요.”

태운의 어머니도 수선화를 좋아하셨다니, 만약 두 분이 살아 계셨으면 지금의 태운과 나처럼 좋은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른다.

태운이 안내해 준 곳에는 수선화가 옹기종기 심어져 꽃을 피우고 있었다. 무릎을 굽혀 꽃잎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꽃을 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평온해져요.”

“저도요.”

태운이 내 곁에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신의 씨도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많이 외로웠겠어요.”

“…네.”

“이제 외롭지 않게 제가 옆에 있어 줄게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다정한 태운의 모습을 보자 자꾸만 기대고 싶어졌다.

“고마워요. 저도 태운 씨 곁에 있을게요.”

나와 태운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온실을 두 바퀴나 돌았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식물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숙소에 키우던 화분들이 있어요.”

숙소의 식물들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일반인이 아니었기에 혼자 나가면 안 될 것 같아 쉽사리 가져오지 못했다. 태운에게 공장까지 같이 가 달라고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물을 주지 않으면 위험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집에 화분을 가져와도 될까요?”

“그럼요. 같이 가지러 가요.”

“정말요?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돌아가신 어머니가 키우던 소중한 식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내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식물을 키웠던 경험을 총동원해 돌보고 있었다. 태운이 흔쾌히 집에 들여도 된다고 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온실을 다녀온 바로 다음 날, 나와 태운은 숙소에서 화분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새로운 화분 하나도.

“선물이에요.”

“이게 뭐예요?”

흙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종이 가방 안에는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수선화 구근이요. 한 달 뒤면 싹이 나온다고 해요.”

“저한테 주는 거예요?”

“네. 신의 씨도 수선화 좋아하는 거 같아서요.”

나를 위해 구근을 사 왔을 태운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가득 채워진 기분이었다.

“맞아요. 태운 씨, 고마워요.”

꽃이 피면 태운과 함께 이 꽃을 어머니께 가져다드리면 좋을 거 같았다.

“잘 키워 줘요.”

“네.”

며칠 뒤 태운은 식물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테라스에 작은 온실까지 만들어 주었다. 태운의 물건밖에 없었던 집에 내 공간과 물건들이 하나씩 늘어나자 나 또한 점점 태운과 이 집에 스며드는 걸 느꼈다.

***

태운에게서 눈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가 이동할 때마다 눈길이 갔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되었다.

태운이 준 에스퍼&가이드 책자에 따르면, 매칭률이 높은 에스퍼와 가이드는 서로에게 끌리며 가이딩할수록 서로에 대한 호감이 높아진다고 했다. 그래서 매칭률이 높거나 전속이 된 에스퍼와 가이드는 서로 연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태운의 말대로 우리도 연인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태운과 연인이 되는 순간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나 같은 게 S급인 태운과 사귄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염치가 없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내가 과연 그의 파트너에 걸맞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태운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아요.”

아무래도 마음속 걱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 거 같다. 나는 인상을 풀며 태운을 바라봤다.

“…제가 태운 씨 곁에 있어도 될까요?”

“그게 걱정돼서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운이 내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약하게 비비며 말했다.

“어떤 말을 해야 신의 씨가 안심할까요.”

“…….”

“상위 에스퍼들은 게이트가 열리면 보스 마물을 죽이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해요. 처음 신의 씨를 본 날에도 보스에만 집중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 눈에 신의 씨가 보인 순간 눈을 뗄 수 없더라고요. 그리고 정신 차렸을 때는 신의 씨를 도와주고 있었어요.”

사실 태운이 나를 도와준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로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신의 씨와 닿자마자 가이딩되는 감각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늘 억지로 맞춘 듯했던 가이딩이 마치 짝을 찾은 것처럼 바로 연결됐거든요.”

“…저도 태운 씨랑 닿았을 때 바로 파장이 느껴져서 신기했어요.”

“저도요. 누군가에게 이토록 관심이 생긴 것도 처음이에요.”

“…….”

“저 신의 씨한테 첫눈에 반한 거 같아요.”

태운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그와 맞추고 있던 시선을 나도 모르게 피했다. 그와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얼굴로 순식간에 피가 쏠리며 고개가 푹 숙여졌다.

“갑작스러운 일들로 신의 씨가 당황스러울 거 같아요. 그래도 확실한 건 저한텐 신의 씨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에요. 제겐 이제 신의 씨 말고 중요한 사람은 없어요.”

태운의 말에 조금 전의 불안함이 가시는 걸 느꼈다. 그의 말대로 나는 태운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에스퍼의 수치를 단기간에 빠르게 올리고 목숨과 직결된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건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뿐이었다.

“신의 씨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게요.”

태운이 내 손을 살며시 잡자, 그의 온화한 파장이 나를 감쌌다. 마치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기류에 나 또한 마음이 놓였다. 더는 불안으로 떨지 않고 태운을 믿고 곁에 있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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