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초인종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이미 밝아져 있었다. 울다 지쳐 잠들어서인지 눈이 부어올라 잘 떠지지 않았다.
이대로 다시 눈을 감고 싶었지만, 계속된 초인종 소리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향했다. 눈물이 뺨에 말라붙은 것이 느껴져 손으로 훔치며 밖을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혹시 태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김진호 담당자입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태운이 아니라 담당자님이었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담당자님은 양손에 짐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잘 잤어요? 벌써 점심이에요.”
점심이란 말에 생각보다 오래 잤단 걸 깨달았다.
“…네.”
“여기 핸드폰이랑 제복이요.”
계속 기다리던 핸드폰이었기에, 빠르게 종이 가방을 받아 들며 안을 들여다봤다. 안에는 핸드폰 상자가 들어 있었다.
“계약서대로 반년간은 외부랑 연락 안 돼요. 그리고 이동할 때는 제가 동행합니다.”
계약서를 자세히 보지 않았기에 그런 규정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아무래도 계약서를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다.
“네.”
“제복은 신체 정보 사이즈로 가져와 봤는데 지금 입어 보세요. 맞으면 내일 여분도 가져올게요.”
곧장 핸드폰부터 확인하고 싶었는데, 옷부터 입어 보라는 말에 결국 제복을 받아 들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복은 흰색이었는데 몸에 딱 맞았다. 교복을 제외하곤 제복이나 정장을 입었던 적이 드물었기에 낯설었다.
나는 빳빳한 소맷단을 만지며 어색하게 밖으로 나왔다.
“사이즈는 잘 맞는 거 같아요.”
담당자님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제복이 잘 어울린다며 이대로 여벌 옷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이제 점심 먹고 센터로 가죠.”
도시락을 꺼내는 담당자님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나중에 먹겠다고 말했다. 지금 입맛도 없었고, 이대로 먹어도 다 게워 낼 것이 분명했다.
기운 없는 내 모습에 담당자님은 걱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혹시라도 배가 고프면 알려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센터로 이동하자며 나갈 준비를 했다.
결국 핸드폰은 만지지도 못한 채, 센터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 기숙사에서 센터까지 차로 15분 거리였기에 담당자님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센터에 가면 이번에 배정받은 팀부터 안내할 거예요.”
“팀에 들어가야 하나요?”
“네. 원래 C급 이하랑 막 각성한 각성자는 팀에 못 들어가지만, 신의 가이드님은 현태운 전담이 되면서 같은 01S팀에 배정받게 됐어요.”
지금처럼 태운의 집에서 그의 가이딩을 할 줄 알았는데 팀에 소속되다니 걱정이 앞섰다. 팀에 들어가서 내가 잘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태운처럼 팀원들도 C급인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겁부터 났다. 어제 태운의 행동이 내게 트라우마를 남긴 것 같았다.
“현태운과 달리 다들 친절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담당자님이 백미러로 굳어진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네…….”
내 말에 담당자님은 이제부터 진행할 일정을 이어 말했다.
오전에는 각성자 이론과 가이딩 훈련, 체력 단련 등을 한다고 했다. 오후에는 팀원들과 게이트 시뮬레이션이나 공동 훈련을 하고, 게이트가 열린 날과 태운이 가이딩을 신청했을 땐 가이딩을 진행하면 된다고 했다.
빡빡한 일정을 듣자마자 암담했지만, 태운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안도했다.
센터에 도착하고 담당자님의 뒤를 따라서 팀 전용실로 향했다.
팀 전용실은 센터 3층에 있었다. 담당자님은 내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팀 전용실 문을 열며 말했다.
“이신의 가이드님 오셨습니다. 가이드님, 인사 나누고 계세요. 저는 잠깐 일 보고 올게요.”
“…네.”
20평 크기의 팀 전용실에는 팀원들 자리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었고 오른쪽에는 팀장실과 응접실, 탕비실이 있었는데 투명 유리 벽으로 나뉘어져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내가 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팀장님이 먼저 나를 반겼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01S팀 팀장 박정원이에요.”
“안녕하세요, 이신의입니다.”
나는 팀장님과 악수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태운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팀장님은 내게 한 명씩 팀원들을 소개해 주었다. 가이드는 한 명이었고 에스퍼는 팀장님 포함 세 명이었다. 등급은 모두 A급이었다.
A급만 모인 팀에 C급인 내가 들어와도 되나… 하는 걱정이 됐지만 모두 웃으며 나를 반겼고 인상도 하나같이 친절해 보였다.
내 자리는 A급 가이드인 최민성의 옆자리가 되었다.
“같은 가이드끼리 잘해 보아요.”
민성의 미소에 다시금 안심되어 나 또한 미소를 띤 채 답했다. 그리고 태운의 자리로 보이는 빈자리를 보며 물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런데… 현태운 에스퍼님은 언제 오시나요?”
“현태운 에스퍼는 오늘 안 올 거예요. 원래 여기 잘 안 와요.”
“아…….”
“그러고 보니 현태운 에스퍼 전담이라고 했죠?”
“네.”
태운이 지금껏 어떻게 지내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모두 한결같이 내게 연민의 눈길을 보냈다.
이내 민성이 의자를 밀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현태운 에스퍼 때문에 많이 힘들죠?”
“…아니에요.”
“다 알아요. 성격 거지 같은 거.”
그는 비밀을 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자신 역시 처음 팀에 들어왔을 때 현태운 때문에 고생했었다는 말도 함께 했다.
“매번 단독 행동에 말은 지지리도 안 듣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가이드님.”
가이드님이라는 내 말에 민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이드님이라고 하는 건 너무 딱딱해요. 내가 선임이니까 편하게 선배라고 불러요.”
“그래도 되나요?”
“당연하죠. 이제부터 같이 생활할 거잖아요? 딱딱한 거 싫어요.”
“그럼 알겠습니다, 민성 선배님.”
내 말에 민성은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띠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내 일거리가 없어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 A급이다 보니 괜히 눈치 보게 되고, 혹시 실수해서 미움받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과는 달리 팀원들은 모두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줬다.
팀장님 또한 중간에 들어온 나를 더욱더 신경 써 주었다. 현장 게이트 관련해서 훈련 계획표도 만들어 주시고 친절하게 조목조목 설명해 주셨다.
팀원들마저 쌀쌀했다면 정말 힘들었을 텐데 등급과 관계없이 대해 주는 그들에게 고마웠다.
***
퇴근 시간에 맞춰 담당자님의 차를 타고 기숙사로 이동했다. 내가 팀에 들어온 것을 태운도 알 텐데 오지 않는 그의 모습에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단 걸 알 수 있었다.
언제쯤 태운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지, 그리고 언제 그와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자꾸만 초조해졌다. 결국 담당자님께 물어보게 되었다.
“담당자님…. 태운 씨는 C급 가이드를 싫어하는 거예요?”
어제 태운이 C급이라는 단어를 말하며 냉소를 지었던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유 없이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이유가 뭐예요?”
“제가 말하기는 조금 그래서…. 나중에 태운이한테 물어봐요. 안 알려 주겠지만….”
“…알겠습니다.”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좌절했겠지만, 이유가 있다면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작은 희망을 품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기숙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내일부터는 8시 30분에 맞춰서 올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담당자님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쓸쓸히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핸드폰이 떠오르자 계단을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드디어 핸드폰을 개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운의 번호를 모른다는 것이 다시금 떠올랐다. 고민하던 나는 우선 담당자님 명함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태운과 떨어져 지낸 지 고작 하루인데 그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
가이드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장 대신 센터와 기숙사를 오가는, 비슷비슷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오전에는 센터의 커리큘럼대로 훈련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오후에는 팀 전용 훈련실에서 팀장님께 에너지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받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사이에 태운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태운에게 연락을 해도 내 번호인 것을 아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속상했지만, 그의 연락을 계속 기다렸다.
오늘도 퇴근하자마자 곧장 기숙사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있는데, 201호 문이 열리며 앳된 남자 얼굴이 쑥 나왔다.
“역시 사람 들어왔구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놀랐지만, 마주 인사했다.
“전 최지훤이고 올해 21살이에요. 그쪽은요?”
갑자기 나타나 통성명하는 지훤의 모습에 놀랄 겨를도 없이 얼떨결에 답하고 말았다.
“저는 이신의고 23살이에요.”
“형이네요. 이제 자주 만날 텐데 친하게 지내요.”
“네.”
나는 짧게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지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지만, 바로 옆방이고 같은 가이드니까 친해지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가이딩 워치를 확인했다. 태운의 가이딩 수치가 퇴근 전보다 떨어져 있었다.
내가 가이딩을 해 줘야 하는데…. 그래도 이렇게나마 태운의 안부를 확인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와 떨어진 것이 더욱더 실감이 났다.
태운과의 생활은 꿈같았고, 정말 꿈처럼 이제는 아득하게 느꼈다. 그저 지금은 다시 태운과 이야기를 나누고 예전의 다정한 얼굴을 보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