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마치 태운은 온 적 없었던 것처럼 나 혼자 덩그러니 가이딩실에 있었다.
태운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있었단 걸 알려 주듯 그의 파장이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태운이 덮어 주고 간 것인지 센터 마크가 박혀 있는 담요가 내 몸 위에 덮여 있는 걸 확인했다. 말은 사나워도 여전히 다정한 태운을 느끼며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담요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출근 알람이 울려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침이 될 때까지 가이딩실에서 잠을 잤단 걸 깨달았다.
먼저 담당자님께 현재 상황에 대해 연락하고 가이드 전용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샤워했다. 오늘은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복으로 갈아입은 뒤 강의실로 향하면서 태운의 가이딩 수치를 확인했다. 밤새도록 가이딩해서 그런지 안정권에 접어든 것을 보자 안도감이 들었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지훤이 내 얼굴을 보더니 기분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지훤의 말대로 기분이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태운과 밤새도록 같이 있었고 그동안 그와 냉전 상태였는데 차가웠던 관계가 다시 온화해진 기분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음을 어렴풋이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
일요일에는 가이딩 강의와 훈련이 없었기에 종일 집에만 있었다. 밖에 나가고 싶어도 아직은 자유롭게 나갈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쉬는 날 없이 공장에서 일만 했었다. 쉬는 날이 있다곤 해도 늘 피곤에 찌들어 잠만 잤기에 쉴 때는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예전처럼 침대에 누워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멀뚱멀뚱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다 가방에서 ‘효과적인 가이딩’이란 서적을 꺼냈다. 조금이라도 승급을 위해 노력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서적을 읽으며 중요한 부분을 볼펜으로 밑줄 긋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현관문을 거칠게 두들겼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라 방에서 나와 문을 지켜보자, 거친 발길질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누구세요?”
“문 열어.”
태운의 목소리였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속절없이 심장이 뛰었다. 태운이 가이드 기숙사까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바보 같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목소리의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평상복 차림의 태운이 보였다. 예전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태운은 제복도 평상복도 잘 어울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태운이 신발을 신은 상태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인상을 팍 쓴 채 거실을 둘러봤다.
“C급답게 구질구질한 곳에서 사네. 이런 곳에서 잘도 잠이 오겠다?”
“…살기에는 나쁘지 않아요. 태운 씨,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는 내 말에 답하지 않은 채 집 안 곳곳을 살폈다. 평소 센터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길었기에 집 안은 솔직히 휑했다. 태운이 찾아와서 좋았지만, 이런 집 안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진 않았기에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나와.”
태운도 보잘것없는 내부가 싫었는지 나오라는 말을 남긴 채 밖으로 나갔다. 나는 말없이 따라나섰다.
기숙사에서 나오자, 태운의 스포츠카가 현관에 세워져 있었다. 태운은 차에 타라고 짧게 말한 뒤 운전석에 올랐다.
나는 얌전히 조수석에 올랐다. 내가 가만히 앉아만 있자, 태운이 안전띠를 매라고 짧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정신 차린 내가 서둘러 안전띠를 매며 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우리 집.”
“태운 씨 집은 왜요?”
“이제부터 우리 집에서 살면서 가이딩해.”
태운의 말에 나는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봤다. 다시는 그의 집에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요?”
“그래.”
확실히 함께 가이딩실에서 밤을 새운 날을 기점으로 태운과 내 관계가 조금씩 예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말, 정말 맞죠?”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어 태운에게 재차 물었다. 이 상황이 꿈같이 느껴져 태운만 옆에 없었다면 뺨을 꼬집어 보았을 것이다.
“그딴 표정 하지 마. 너 좋아서 부르는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네가 C급인 건 좆같지만, 이용할 수 있을 때 많이 이용해야 나한테 이득이잖아.”
“…….”
“이제부터 내가 필요할 때만 가이딩하고, 내가 집에 있을 땐 방 밖으로 나올 생각 하지 마.”
지금 태운의 말이 이기적이고 나를 배려하지 않는단 걸 알지만, 그저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리고 함께 지내다 보면 분명 내가 알던 다정한 태운으로 돌아올 것이다.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내 말에 태운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태운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운의 옆방이 아니라 집 안쪽 구석에 있는 작은 방을 사용하게 됐다.
그래도 기숙사보다 훨씬 좋았고 태운과 함께 살 수 있었기에 행복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태운은 그대로 자기 침실로 들어갔고, 나 또한 방에 들어갔다. 태운과 같은 집 안에 있다는 게, 그저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
태운의 집에 돌아오고 나는 더욱더 열심히 가이드 승급 훈련을 받았다.
태운은 대부분 새벽에 취한 상태로 들어왔다. 상위권 에스퍼는 카페인과 알코올에 중독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에스퍼의 능력을 쓰느라 안 그래도 무리하는데, 인위적 가이딩은 부작용이 잇따르다 보니 알코올이나 카페인, 그리고 마취제로 이겨 내는 것 같았다.
태운도 부작용을 겪고 있어서인지 집 안 곳곳에 술과 약들이 많았다. 태운의 고통을 옆에서 겪다 보니 나까지 괴로워졌다. 태운이 부작용 없이 평안한 일상을 보내길 바랐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방 안에서 태운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새벽이 되었을 때 태운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에 앉아 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늘 곧장 방으로 들어가던 태운인데 내 방문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태운과 함께 있으면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말들은 늘 내 심장에 비수를 꽂았으니 말이다.
이내 방문이 열리며 태운이 들어왔다.
“이신의, 나와.”
그의 부름에 서둘러 밖으로 나오자, 태운이 살짝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오늘도 술을 마시고 들어왔단 걸 바로 눈치챘다.
등급이 나오기 전에는 한 번도 술을 마신 걸 본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그때도 참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가이딩을 해 줘서 괜찮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술 마시고 온 거예요?”
“말하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
결국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었다.
태운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있을 때는 가이딩할 때만이었다. 태운은 저번에 말했던 대로 나를 철저하게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인간 이신의가 아니라 가이딩 도구로 취급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태운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이용당해도 괜찮았다.
태운의 집에 오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가이딩을 했다. 태운은 불면증이 있어서 내가 가이딩을 해 줘야 푹 자는 것 같다.
태운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를 등진 채 손만 뒤로 뻗은 자세였다. 그 모습에 나는 살며시 옆에 앉았다. 그리고 태운의 말 없이도 알아서 가이딩을 시작했다.
나는 태운의 손에 내 손을 조심스럽게 포갰다. 태운은 손을 편 채였지만, 나는 깍지를 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가이딩이 시작되자, 쉴 새 없이 날뛰던 태운의 파장이 조금씩 얌전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잠시 그의 뒤통수를 응시했다가, 찬찬히 몸 전체를 살폈다.
태운의 인생이 나보다 불쌍하게 느껴졌다. S급 에스퍼로 온 국민에게 추앙받고 있지만, 늘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고 갑작스러운 폭주로 죽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태운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까.
그래도 매칭률 높은 나를 만나 다행이었지만, C급 가이드와 매칭률이 높은 거였으니 좌절할 만도 했다.
목숨을 지켜 줄 사람이 C급이라면 나도 미덥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태운의 야멸찬 행동이 이해가 갔다.
태운은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 번 몸을 뒤척이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태운의 지친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머리끝을 매만졌다. 가이딩 워치를 확인하니 안정권에 들어서 있었다. 보통 안정권에 들어서면 방으로 돌아가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태운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태운을 보다 방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가지 마.”
태운이 잠결에 가지 말라고 말했다. 진심이 담긴 소리가 아니란 걸 알지만, 나는 다시 돌아와 그의 손을 잡았다.
옛날에도 이렇게 태운의 손을 잡고 밤을 보냈었는데. 마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내가 S급이었더라면 아마 태운의 옆에서 자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태운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으며 언젠간 그의 옆에서 다시 잘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