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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가이드는 이만 퇴사합니다-18화 (18/65)

18화

성요한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해 준 이후, 태운과 나 사이에 껄끄러운 기류가 흘렀다. 서로 집에서 마주쳐도 모른 척했고, 방에서만 지내기를 반복했다. 적어도 집에서 지낼 때는 몇 마디 정도는 나눴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똑같은 일상이었다.

가이딩 훈련을 받고, 저녁이 되면 기밀 프로젝트 훈련을 진행했다.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A급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태운과 내 관계처럼 진척이 없었다.

초조했지만, B급이 되었을 때처럼 꾸준히 훈련받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단 걸 이번 B급 승급으로 알게 되었으니까.

태운은 A급 게이트가 발생할 때마다 현장에 나갔지만, 여전히 내 도움은 받지 않으려 했다. 그는 기계와 약물 가이딩을 받으며 술로 고통을 이겨 냈다.

하지만 태운이 술에 취해 종종 무의식적으로 내 방에 찾아올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를 기쁘게 맞이하며 가이딩을 해 줬다. 그리고 함께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태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나를 찾아와 주는 그가 고마웠다.

***

저녁을 먹고 프로젝트 훈련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연구실로 오라는 윤 박사님의 호출을 받았다.

종종 윤 박사님의 부름을 받았기에 오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의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윤 박사님은 혼자가 아니었다. 저번에 봤었던 성요한 에스퍼도 함께였다.

나중에 다른 가이드들이 성요한에 관해 이것저것 말해 주었다. 그는 S급 에스퍼라든가, 그의 금발은 염색이 아니라 혼혈이라서이고, 해외에 장기간 파견되었다가 이번에 돌아왔다 등등.

모두가 아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윤 박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다.

“신의 가이드님 오셨군요.”

“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우선 앉으세요.”

원형 테이블에는 의자가 4개 있었는데 나는 윤 박사님과 성요한 에스퍼 사이에 앉았다.

윤 박사님은 내게 태블릿 PC를 보여 주었다. 화면에는 내 가이딩 파장에 대한 수치들이 적혀 있었다.

“데이터를 보면 아시겠지만, 일주일간 수치에 변화가 없어요.”

“…그렇네요.”

“그래서 이번에 신의 가이드님의 승급을 도와줄 분을 찾았습니다. 성요한 에스퍼님이세요.”

윤 박사님의 말에 나는 그제야 성요한 에스퍼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성요한입니다. 저희 구면이죠?”

“네. 이신의입니다.”

“알아요.”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지 살짝 입꼬리 올린 미소가 좋은 인상으로 비쳤다. 태운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 성요한 에스퍼님이 어떤 도움을 주신다는 걸까요?”

“가이딩 훈련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함께 훈련해야 능률이 높아요. 알고 있지요?”

“네. 이젠 기계로는 한계가 있는 걸까요?”

윤 박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태블릿 PC 화면을 보여 주었다.

“승급하기 위해서는 기계 가이딩이 아니라 에스퍼와의 가이딩이 필요해요. 여길 보세요.”

내 가이딩 전도율이 항목들 중에서 제일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윤 박사님은 다른 가이드의 전도율도 보여 주었다. 확실히 에스퍼와 훈련받은 가이드의 전도율이 나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저는 태운 에스퍼님의 전속 가이드예요.”

“이건 기밀 프로젝트예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윤 박사님의 말에 살짝 놀랐다. 규율에 고지식한 면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오늘 시험 삼아 가이딩 훈련해 볼까요?”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성요한 에스퍼가 말했다.

“그것도 좋을 거 같군요.”

순간 다른 에스퍼와 가이딩하지 말라던 태운의 말이 떠올랐지만, 태운이 원하는 등급이 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프로젝트 가이딩실로 이동했다. 가이딩실에는 기계들과 침대가 놓여 있었다. 성요한 에스퍼가 침대에 앉으며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신의 씨, 앉으세요.”

“…네.”

나는 성요한 에스퍼에게 팔목이 잡힌 채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 매직미러를 보았다. 유리 너머에서 윤 박사님이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게 맞는 것인지 걱정되었다. 내가 계속 망설이는 사이,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윤 박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결국 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 접촉 가이딩 1단계부터 시작하죠.

윤 박사님의 말에 성요한 에스퍼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잡을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을 잡자마자 곧장 파장이 연결되었다. 순간 그와 처음 가이딩했을 때가 떠오르며 거부감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떼려고 했지만, 저번과 같이 어두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태운 때만큼은 아니지만, 수월하게 파장이 이어졌다.

- 2단계로 진입하죠.

접촉 가이딩의 1단계는 손을 잡는 것이고 2단계는 포옹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성요한의 몸을 더듬더듬 껴안았다.

- 전달률이 높고 아주 좋아요.

“전달률이 높다고 하네요.”

내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있던 성요한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는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10분간 서로를 안고 있었다. 이제 슬슬 훈련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 3단계로 높여 보죠.

3단계까지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3단계까지 진행하라는 윤 박사의 말에 나는 매직미러를 바라봤다. 3단계는 점막끼리의 접촉이었다.

“3단계는….”

“태운이랑도 했던 거잖아요.”

성요한 에스퍼는 말이 끝나자마자 내 얼굴 쪽으로 얼굴을 내렸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태운이 떠오른 나는 그를 밀쳤다.

아무래도 에스퍼들은 점막 가이딩에 익숙하기에 거리낌 없이 키스할 수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저 3단계까지는 못 하겠어요.”

“왜요?”

“전 현태운 에스퍼의 전담 가이드예요. 태운이랑만 가이딩해야 할 거 같아요. 그게 계약이고요.”

- 다른 에스퍼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S급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깁니다. S급이 되고 싶은 거 아니었나요?

스피커에서 윤 박사님의 타박이 이어졌다. 그의 말에 멈칫했지만,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두 번 다시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태운이랑만 할래요.”

- 유감스럽게도 성요한 에스퍼님께 부탁드리기 전에 현태운 에스퍼님께도 부탁드렸지만, 거절당했습니다.

태운이 거절했다는 말에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하지만 태운을 제외한 다른 에스퍼와 점막 가이딩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못 하겠습니다.”

결국 가이딩실에서 나왔다. S급이 되고 싶다면 성요한 에스퍼와 훈련하는 게 맞았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작은 자존심이었다.

***

오늘도 훈련이 끝날 시간에 맞춰 담당자인 진호 형이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호 형을 알게 된 지도 1년이 돼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를 담당자님이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편안하게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형도 나를 동생처럼 대하고 있고 말이다.

차 조수석에 오르자, 진호 형이 나를 반겼다.

“왔어?”

“네.”

안전띠를 매자 차가 출발했다. 성요한 에스퍼의 가이딩을 거부하고 난 뒤로 평소보다 더 열심히 가이딩 훈련을 해서 그런지 몸에 힘이 없었다.

결국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린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진호 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신의야, 힘들지는 않아?”

1년간 진호 형은 늦은 시간까지 훈련하는 나를 데리러 왔다. 누구보다도 내가 힘든 걸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힘들 게 뭐가 있어요.”

사실 이번에 기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힘들긴 했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너 매번 등급 테스트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거 센터에서 모르는 사람 없어.”

“괜찮아요. 그래야 승급할 수 있으니까요.”

내 말에 형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한동안 차 안에 침묵이 맴돌았지만, 다시 형이 말을 이었다.

“태운이가 밉지? 사실 태운이만 만나지 않았어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거야.”

“아니에요. 태운이 만나서 각성도 된 거고요.”

“…태운이가 왜 이리 등급에 예민한 건지 지금까지 궁금했었지?”

“궁금하긴 하죠.”

사실 늘 궁금했었다. 낮은 등급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서 혐오하는 태운이었기에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진호 형은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동안 내게 말하지 않았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태운이가 처음부터 가이드를 싫어했던 건 아니야.”

“그럼 왜 싫어하게 된 건데요?”

“태운이한테 여동생이 있었어. B급 가이드였지.”

A등급 이상 각성자의 정보들은 모두 협회에서 관리했기에 태운에게 여동생이 있단 건 처음 알았다. 본 적도 없고 말이다.

“너랑 태운이처럼 여동생도 S급 에스퍼와 매칭률이 높았어. 그런데… 게이트에서 폭주 상태인 에스퍼를 가이딩하다가 역가이딩으로 죽었어.”

“…….”

“부모님도 폭주로 게이트에서 사망했으니까 트라우마가 심할 거야.”

진호 형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고 말았다.

“태운이는 자신과 같은 S급 가이드가 아니면 폭주했을 때 도움이 되지 않다고 생각해. 역가이딩 위험도 크니까 먼저 몸이 거부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뜻이야.”

나는 그제야 태운이 나를 차갑게 대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라도 동생과 부모님이 게이트에서 죽었다면 각성자 시스템 자체를 미워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말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침묵을 유지했다. 진호 형도 나와 마찬가지로 말없이 운전만 했다.

이내 집에 도착하고 형에게 말해 줘서 고맙다고 말한 뒤,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약에 찌들어 자는 태운이 보였다.

가이딩 워치에 뜬 수치는 다행히 평정권이었다. 그래도 방사 가이딩을 하며 소파에 앉아 태운을 바라봤다.

내 등급을 확인하자마자 변해 버린 태운이 미웠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나를 마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그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진호 형의 말로 태운의 사정을 알게 되니 그의 행동이 이해됐다.

역시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태운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태운을 마음에 품어 버렸으니 말이다.

태운의 마음이 나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었다. 내게 마음을 열 동안 나는 그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면 된다.

나는 태운의 얼굴을 보며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태운을 기다리며 가이딩 훈련을 하루도 빠짐없이 받고, 그를 위해 가이딩하면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가이드로 각성하고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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