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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가이드는 이만 퇴사합니다-19화 (19/65)

19화

태운과의 생활은 대체로 힘들었지만, 좋았던 기억도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내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나 태운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할 때, 말은 차갑게 해도 나를 챙기려는 그의 모습과 나를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들을 볼 때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느새 나의 일상에 태운이 조금씩 스며들어 있었다.

여전히 태운을 품은 내 마음은 변함없었다. 내 감정이었지만, 감정이란 게 내가 지우거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태운을 품은 내 마음은 변함없었다. 내 감정이었지만, 감정이란 게 내가 지우거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태운 또한 나와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졌는지 나를 멀리하지 않고 편안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가이딩하다 보면 애정이 생긴다더니 태운 또한 내게 조금은 호의가 생긴 듯했다.

요즘 내 바람은 지금처럼 태운과 평온한 일상을 지내는 것이었다.

일요일에는 체력 단련만 하고 가이딩 훈련은 쉬었기에 오후부터는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핸드폰에는 친해진 가이드들의 나오라는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지만, 오늘은 쉬고 싶었기에 거절하고 온실의 꽃들을 관리했다. 태운이 선물해 준 수선화 구근에서는 매년 꽃이 피었다. 내 생일이 다가올 때면 자라기 시작해 꽃이 피어나면 어머니를 뵈러 갔다.

나는 한동안 싹이 올라온 수선화를 보다, 태블릿 PC로 서핑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소파에 앉아 가이드 커뮤니티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요즘 가이드 사이에서 유행하는 팔찌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서로 나눠 끼면 애정이 깊어진다는 팔찌였다. 광고성이 다분한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효과를 본 가이드들이 많아서 나도 솔깃했다.

팔찌를 태운과 함께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어렵겠다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태운이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신의, 뭐 하냐?”

태운도 집에만 있는 게 심심했는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뭐 좀 보고 있었어.”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운이 볼 수 있도록 태블릿 PC를 그가 있는 쪽으로 보여 줬다. 태운이 바로 내 옆까지 다가와 화면을 보았다.

“각성자 커플 팔찌?”

역시나 태운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그 모습에 예상대로란 생각을 했다. 태운이 나와 커플로 무언가를 맞출 리가 없었다.

결국, 태블릿 PC 화면을 끄고 소파에서 일어나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요즘 가이드 사이에서 말이 많길래 한번 본 거야.”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이젠 이렇게 감정을 숨기는 것도 능숙해졌다.

“그래?”

태운은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응. 점심 먹을래? 아주머니가 너 좋아하는 갈비찜 해 놓고 가셨어.”

“먹을래.”

“그럼 씻고 나와. 차려 놓을게.”

태운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식사 준비를 했다. 솔직히 팔찌를 봤을 때 태운과 함께 낀 모습을 상상하긴 했다. 하지만 역시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슬프진 않았다. 지금은 이 생활만으로도 만족했다. 3년간 태운의 곁에 있는 가이드는 오직 유일하게 나 하나뿐이니 말이다.

***

프로젝트 가이딩 훈련을 끝내고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아직 마취 기운이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일어나지 못한 채 한참을 누워 있다 몸을 일으켰다.

올해부터 두통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윤 박사님이 처방해 준 약을 먹고 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이딩이 끝났음을 알리는 호출 버튼을 누르자, 윤 박사님과 그의 조수가 프로젝트실로 들어왔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윤 박사님은 내게 수고했다고 말하며 내 몸에 붙어 있는 전극들을 하나씩 떼어 냈다.

그러나 여전히 두통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꽉 누르며 말했다.

“박사님, 요즘 두통이 심해진 거 같아요. 근육 경련도 잦고요.”

“많이 심한가요?”

“네. 지금도 머리 전체가 울리는 기분이에요.”

두통과 경련 때문에 자다가 깨어날 때가 이제는 두 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약을 더 처방해 줄게요.”

“알겠습니다….”

저번 주에도 약이 하나 더 늘어났는데, 이번에도 약을 더 늘리면 몸이 버틸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약이 독하다 보니, 먹으면 종일 멍하거나 수면 시간이 길어졌다.

하지만 약으로나마 억눌러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저번에 검사했을 때 증상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시적 현상이고 위험하지 않으니까 두려워하지 말아요.”

“네.”

윤 박사님이 괜찮다고 말하니 조금 안심되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 보니 걱정은 여전했다.

전극을 모두 빼내고 윤 박사님께 인사를 한 뒤 탈의실로 이동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벽을 짚으며 걸어갔다. 대체 몸이 왜 이럴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역시 가이딩 훈련을 과도하게 했기 때문인 듯했다. 곧 승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이 버텨 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걱정하기 무섭게 순간 눈앞이 핑 돌더니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순간, 코에서부터 무언가 흘러나왔다. 코를 훔쳤지만, 멈추지 않았다. 코를 들이켜자 비릿한 맛이 느껴져 손을 내려다보니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안쪽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선 서둘러 화장실로 향하려 했지만, 그대로 이명과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다. 더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와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몸이 경련하기 시작하더니 목구멍이 조여들어 숨이 막혔다.

다행히도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의 가이드님!”

하지만 곧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희게 변했다를 반복하더니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대로 끊겼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태운의 모습이 보였다. 태운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심되었다. 내가 생각보다 많이 그에게 의지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일어났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찌릿한 두통이 다시 느껴졌다. 내가 인상을 쓰자 태운이 다시 침대에 눕혀 주었다.

“누워 있어.”

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자, 처음 보는 곳이었다. 하지만 의료용 침대와 환자 모니터로 병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병원이야?”

“응, 센터 병원이야. 너 어제 쓰러졌어.”

마지막 기억은 복도 바닥이었다. 아무래도 몸의 이상 증상으로 결국 쓰러진 것 같다.

“몸은 움직일 수 있겠어?”

태운의 말에 손가락과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움직였다.

“응. 그런데 머리가 살짝 아프네.”

태운은 한동안 내 몸 상태를 물어보더니, 곧이어 의사를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병실로 찾아왔다. 그는 내 몸 상태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이틀간 병원에서 머물면서 경과를 봐야 할 거 같아요. 지금 보니까 계속해서 증상이 있었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 나타났나요?”

“올해 초부터였던 거 같아요. 훈련이 끝나면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안 좋았어요. 가이딩했을 때도 그랬고요.”

“당분간은 훈련을 자제하고 가이딩 또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군요.”

의사는 오늘은 안식을 취하고 내일부터 몇 가지 검사를 하자고 말한 뒤 나갔다.

의사가 나가고 나서야 그동안 혹독하게 훈련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3년간 쉬는 날 없이 훈련받았고, 특히 올해엔 승급을 위해 훈련받는 시간을 더 늘렸다.

3년간 아무런 일이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는데 이미 몸은 망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윤 박사님은 괜찮다고 말씀하셨는데….

의사가 돌아간 뒤, 식사가 준비되었다. 영양소가 골고루 배합된 식단이 차려졌다. 입맛은 없었지만 빈속에 약을 먹을 수 없으니 뭐라도 먹어야 했다.

수저를 들었지만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밥을 먹으려고 해도 계속 헛손질을 하자, 태운이 직접 젓가락을 들었다.

“먹여 줄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말해.”

태운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손으로 반찬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가 반찬을 집어 입에 대어 줄 때마다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좋아서 행복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태운이 이렇게 늘 다정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 먹네.”

“우웅.”

나는 우물거리며 태운의 얼굴을 살폈다.

“걱정 끼치지 마라.”

“웅.”

태운은 다시 내 입에 반찬을 넣어 주었다. 나는 받아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관심하지만 나를 챙겨 주는 태운에게 다정함을 느끼며 그가 조금은 나를 좋아한다고 믿고 싶었다.

밥을 다 먹으면 태운이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걱정되었는지 오늘 밤은 내 병실에서 머문다고 했다.

태운은 보조 침대까지 가져와서 내 옆에서 잠들었다. 가이딩이 아니라 평범하게 내 옆에서 자는 태운의 얼굴을 졸릴 때까지 바라보다 나 또한 잠들었다. 오늘 밤은 몸도 마음도 너무나도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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