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눈물도 마르고 두통 또한 잦아들었다. 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기밀 프로젝트 훈련을 진행하는 연구동 건물에 내 전용 훈련실이 있었기에 그곳에서 잘 생각이었다.
연구동은 센터 옆에 있었는데, 아직까지 연구원들이 있는지 창문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입구에서 ID 카드를 태깅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3층으로 내려와 복도 끝 쪽에 있는 내 훈련실로 가고 있을 때였다. 빛이 새어 나오는 쪽에서 두런두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너무 늦어서 훈련실을 사용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쪽으로 다가가니, 연구원들이 휴식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L-034 상태가 좋지 않아요. 슬슬 등급 올려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윤 박사님이 B급에서 바로 S급으로 올라가는 걸 원해.”
“이미 A급 된 지 반년이 지나가는데 너무 가여워요.”
들어가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이게 무슨 말이지?’
연구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승급을 은폐하고 있는 거 같았다.
“이번에 뇌출혈 초기 증상까지 보여서 이대로 멀티 프로젝트는 그만둬야 할지도 몰라요.”
“그건 윤 박사님이 결정하실 일이야. 너무 간섭하면 너도 진석이처럼 된다.”
“알겠습니다….”
내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인 거 같아 서둘러 자리를 옮기려는 순간, 태운의 이야기가 나왔다.
“아, 그리고 현태운 에스퍼랑 이번 S급 가이드, 아예 가이딩이 안 된다면서요.”
“상관없어. 파장만 맞추면 가이딩은 되니까. 윤 박사님이 따로 생각하는 일도 있는 거 같고.”
조금 전 태운과의 일이 있었기에 듣기가 힘들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내 훈련 담당 연구원이 내렸다.
“어? 신의 가이드님, 지금까지 훈련하신 거예요?”
“…잠깐 놓고 간 게 있어서 가지러 왔어요.”
갑작스러운 연구원의 등장에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놀랐지만,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구나. 이번에 S급 가이드 각성한 거 들었죠?”
“네.”
현재 센터는 S급 가이드의 각성이 가장 큰 이슈였다.
“신의 씨도 곧 S급으로 승급할 거예요. 힘내요.”
“감사합니다.”
나는 인사를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연구원 딴에는 내게 위로를 해 준 것이지만, 전혀 위로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승급이라는 단어가 내게 무겁고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조금 전 연구원들의 대화로 윤 박사님이 어떻게든 S급 가이드와 태운을 엮어 줄 것만 같아 더 불안하고 싫은 감정이 들었다.
등급이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시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통의 강도가 강해지는 걸 느꼈다.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훈련동 건물로 이동했다.
오늘은 가이드 휴식실 소파에서 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구비된 담요를 가져와 덮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반사적으로 태운이 떠올랐다.
태운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마 조금 전의 내 행동으로 많이 화나 있을 것이다.
태운에게 키스하다니…. 질투에 눈이 멀어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부디 오늘의 행동으로 태운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평소처럼 내 행동을 가볍게 여기고 잊어 주길 바랐다.
태운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서글퍼져, 생각들을 지우며 잠을 청했다. C급 가이드 판정을 받았던 날보다도 우울한 밤이었다.
***
다행히 태운은 그날 일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 모습에 나 또한 평소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태운의 행동이 차가워진 걸 느꼈다. 내가 자는 시간에 들어오거나,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갔다. 그리고 집에 있는 시간보다도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평소에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침은 함께 먹곤 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못 하니 답답했다. 그날의 키스 탓일 수도 있으나, 그 뒤로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짓을 했을 수도 있다. 우선 오늘 밤에 그와 이야기해 오해를 풀 생각이다.
오전 훈련을 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이딩 훈련을 멈췄음에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고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다른 훈련이 더 있었지만, 결국 다 취소하고 팀 전용실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지훤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팀 전용실에 지훤이 온 건 처음이었다. 이상하게도 불길함이 느껴졌다.
“지훤아, 여긴 무슨 일이야?”
“형, 왜 전화 안 받아.”
핸드폰은 무음으로 설정하고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미안, 급한 일이야?”
“잠깐 들어가도 돼?”
팀 전용실에는 민성 선배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선배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훤에게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지훤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형, 현태운 에스퍼님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역시 몰랐네. 현태운 에스퍼님 이번에 온 S급 가이드랑 서약할지도 몰라.”
“뭐?”
지훤의 말에 너무 놀라 입이 닫히지 않았다. 서약이라니, 상상도 못 한 단어였다.
“어제 현태운 에스퍼님이 협회에 각인 서약서에 관해서 물어봤다고 하더라고.”
“…와전된 거겠지.”
“아니야. 이미 협회에 소문 쫙 났어. 형 우울해할까 봐 왔는데…. 정말 몰랐어?”
오늘 함께 훈련받는 가이드와 에스퍼들이 나를 안쓰러운 눈길로 보던 것이 떠올랐다.
S급 가이드가 온 지 보름이 지났다. 그리고 보름간 태운은 나와 한 번도 가이딩하지 않았다.
“알려 줘서 고마워.”
“우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지훤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민성 선배가 우리 얘기를 듣고 있었는지 말에 끼어들었다.
“신의 씨, 이대로면 현태운 에스퍼 전속도 끊길 텐데, 다른 에스퍼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건 어때요?”
“제가요?”
다른 에스퍼들과 친하게 지낼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신의 씨 센터에서 인기 많아요. 현태운 에스퍼 때문에 다들 못 다가간 거지.”
“그런가요…?”
“네. 오늘 각성자 모임 있는데, 갈래요?”
각성자 모임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쉽지 않았고, 그간 승급 테스트 때문에 센터에서 훈련만 받으면서 살았다.
“그래, 형. 안 그래도 이번에 가이드 모임에서도 형 부르라고 하더라.”
그간 종종 술자리나 모임에 부름을 받았던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거절했었다. 오늘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태운과 S급 가이드가 함께 있는 상상을 하자 화가 끓어올라, 홧김에 승낙을 해 버렸다.
요즘 기밀 프로젝트 훈련도 하지 않았기에 퇴근 이후엔 한가했다.
그렇게 저녁 모임에 가기로 하고, 집도 들르지 않은 채 민성 선배가 알려 준 모임 장소로 향했다. 장소는 센터 근처에 있는 라운지 바였다.
10분 일찍 도착했는데,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이드 3명에 에스퍼 6명이었다. 등급은 A, B급이 섞여 있었다.
나는 민성 선배의 옆에 앉아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참석한 내게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현태운의 서약서 소식을 듣고 내게 괜찮냐며 위로했다.
내가 태운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지 다 알고 있으니 걱정이 되는 거 같다. 하지만 이런 관심들이 내게는 부담스럽기만 했고,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의 씨는 현태운 에스퍼님 말고는 가이딩을 해 본 적 없는 거죠?”
“네.”
“아쉽네요. 전속만 아니었다면 다른 에스퍼들이 더 잘해 줬을 텐데.”
사실 전속은 드물었다. 매칭률이 50%가 넘어야 했고 A급 이상 가이드만 전속이 가능했으니까. S급 에스퍼와 매칭률이 높은 내가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번에 다른 에스퍼들이랑 매칭 테스트 해 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맞은편에 있는 에스퍼의 말에도 그저 미소만 지은 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어차피 곧 전속도 끊어질 거잖아요.”
하지만 이어진 말까지 듣자 이내 입이 일자로 굳어졌다. 그의 말대로 태운이 S급 가이드와 서약한다면 전속은 바로 끊어질 것이다.
“저랑 내일 매칭 테스트 해요.”
“아직 전속이 끊기는 게 확정이 아니라서 매칭 테스트는 어려울 거 같아요.”
“그럼 확정되면 저랑 제일 먼저 하기예요.”
모두 나와 매칭 테스트를 하자고 했다. 아무래도 S급 에스퍼의 전속을 했던 내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어차피 가이딩은 다 비슷할 텐데….
에스퍼들뿐만 아니라 가이드들의 시선 또한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모두들 쉴 새 없이 질문을 해 왔다. 급기야는 애인이 있냐는 사적인 질문까지 해 와서 난처했다.
결국 2차를 간다는 사람들에게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태운에게 어디냐고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너무나도 불안했다. 사람들의 말대로 태운이 S급 가이드와 서약을 맺고 나와 전속을 끊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사실 자만하고 있었다. 태운과 맞는 가이드는 나밖에 없다고. 태운이 말하던 S급 가이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오늘은 잠이 안 올 것 같아, 몸에 수면 칩을 붙였다. 다행히 칩을 붙이기 무섭게 몸에 힘이 풀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걱정들을 모두 잊은 채 편히 잠들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