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승급 심사 테스트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유난히 오늘따라 기운이 없었다. 이번에도 승급을 못 한다면 태운이 나를 버리고 S급 가이드에게 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A급으로 승급한다면 태운도 내가 S급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 S급 가이드보다 매칭률이 높은 나를 더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더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사실 이젠 태운의 다정했던 모습들이 모두 내 착각은 아닌지 혼란이 올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다정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부디 이번 심사 결과가 A급이길 바라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검은 제복 차림의 남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태운만큼은 아니지만, 키가 큰 남자였다.
이내 나는 그가 이번에 새로 각성한 S급 가이드란 걸 알 수 있었다. 뉴스 기사에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S급 가이드는 잘생기고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거나 해를 가한 적은 없지만, 태운과 매칭 테스트를 한 것과 S급 가이드라는 것만으로 싫은 감정을 느꼈다.
그를 모른 척 지나치려고 했지만, 생각지도 않게 S급 가이드 쪽에서 먼저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그가 내게 인사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어정쩡하게 선 자세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신의 가이드님이시죠?”
내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이미 나에 대해 아는 모양이었다. 아마 내가 태운의 전속 가이드여서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네. 그쪽은….”
하지만 나는 태운과 S급 가이드에 관련된 일들은 알고 싶지 않아서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저는 주원재예요. 이번에 가이드로 각성했어요.”
“그렇군요….”
“아직 이곳에 익숙하지 않아서 모르는 게 많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네.”
빨리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나는 다시 걸어가려고 했지만, 주원재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식당이요.”
“저 지금 밥 먹고 왔는데. 다음에는 같이 먹어요.”
“네. 그럼 저는 이만.”
주원재는 나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며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그와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바람과는 달리 주원재와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트레이닝실에서도 갑자기 나타나 함께 운동하자고 하질 않나, 식사 시간도 어느 순간 같아져 점심도 같이 먹었다.
난처했다. 이대로 싫은 티를 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럼 내가 너무 치졸해 보여서 참았다. 그래도 기밀 프로젝트를 할 때는 쫓아올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기밀 프로젝트가 끝나고 오늘도 진호 형이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1층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에 있었는데 빠르게 올라왔다.
문이 열린 순간 발이 멈추고 말았다. 안에 주원재가 있었다. 왜 그가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신의 형도 여기 사세요?”
여러 번 마주치다 보니 나보다 네 살 어린 주원재는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존댓말을 사용했다.
“네. 주원재 씨도 여기 사시는 거예요?”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바로 아래층 버튼에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이번에 이사 왔어요.”
“…그렇군요.”
“집도 가까운데 우리 센터까지 카풀할까요?”
“괜찮아요. 담당자님이 매번 태워다 주셔서요.”
“그럼 나중에라도 생각 있으시면 말씀 주세요.”
주원재는 아쉽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얼굴을 애써 보지 않으며 층수를 확인했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여기 혼자 사시는 건 아닐 테고… 혹시 현태운이랑?”
우리보다 네 살 어리면서 현태운이라고 친근하게 말하는 모습에, 둘이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 태운이랑 단둘이서 살아요.”
나는 그에게 우리 사이에 낄 자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주원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주원재에게서 살기를 느꼈지만 이내 빠르게 사라졌다.
“그렇구나. 형 일요일에 쉬시죠? 저희 집 놀러 오세요.”
“잘 모르겠네요. 주말에도 바빠서.”
“그럼 형 편한 시간대에 맞출게요. 시간 괜찮으실 때 말씀 주세요.”
“알겠어요.”
말로만 알겠다고 말했다. 아마 내가 그의 집에 가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주원재가 다시 말을 하려고 하는 찰나, 엘리베이터 안내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주원재가 사는 층이었다.
“형, 그럼 내일 봬요. 좋은 밤 보내시고요.”
“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억눌렀던 숨이 나왔다. 같은 아파트라니 더욱더 성가신 상황이 되었다.
이번에 A급으로 승급하게 된다면 계약금도 올라갈 것이고 혜택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러면 태운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 가자고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주원재가 태운과 가까이 사는 것이 싫었다.
주원재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더욱 철두철미하게 그를 피해 다녔지만, 그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지 계속해서 마주쳤다.
트레이너도 훈련 시간도 완전히 같아졌고, 그러면서 점심 또한 함께 먹게 되었다. 휴식실에서 쉴 때도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주원재가 내 옆에 있었다. 피해도 쫓아왔다. 친구도 없는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결국 주원재에게 싫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는 모르는 것인지 모른 척하는 것인지 끈질기게 내 곁에 머물렀다. 180cm의 덩치가 종일 옆에 있으니까 불편했다.
처음에는 나를 견제하는 줄 알았는데, 늘 나를 볼 때마다 천진한 미소와 함께 에너지 음료라든지 간식 같은 걸 건네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서 싸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래서 방심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일은 승급 테스트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늘 승급 테스트 전날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은 태운과 함께 자고 싶었기에 그를 기다렸지만, 태운은 내 마음도 모른 채 자정이 넘은 새벽 시간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새벽 2시가 되었을 때 결국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끊어져 있다는 멘트만 돌아왔다. 혹시라도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가이딩 워치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심장 박동 수와 가이딩 수치는 평정권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했기에 결국 내 방으로 와서 잠을 청했다.
잠을 자고 있는데,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내 방문 앞에서 소리가 멈췄다. 얕은 잠을 자던 중이라 작은 소리에도 눈이 떠졌다.
머지않아 문이 열리며 태운의 파장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태운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술 냄새가 풍겨 왔다. 근래 태운의 술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서 그만 마시라고 몇 번 잔소리했지만, 부작용 때문에 끊을 수 없는 거 같았다.
태운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이신의, 자?”
태운의 물음에 답을 할까 고민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결국 입을 열었다.
“…안 자.”
내 말에 태운이 옆에 눕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조용히 나를 껴안았다.
그 모습이 나는 또 싫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태운이 지금처럼 내게 스스럼없이 스킨십할 때는 술에 꽤 취했을 때였기에 나도 모르게 투정을 부렸다.
“전화기 꺼져 있더라. 걱정되니까 켜 놔.”
“걱정돼?”
“응.”
“걱정하지 마. 집에는 매일 잘 들어올 거니까.”
“그럼 자정 안에라도 들어와.”
“알겠어. 이신의 말 잘 들어야지. 나한텐 너밖에 없는데.”
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가증스러웠다. 센터에 가면 늘 태운과 주원재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그리고 둘의 추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 와전된 이야기라는 걸 알지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문드러졌다.
“왜 나뿐이야? 새로 온 S급 가이드도 있잖아.”
“필요 없어. 나한테는 너만 있으면 돼.”
술에 취했을 때 하는 말은 믿지 않지만, 진심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만큼은 태운의 말이 진심이라고 믿기로 했다.
“나도. 나도 태운이 너만 있으면 돼.”
내 진심이었다. 아마 술에 취한 태운에게는 닿지 않을 테지만.
태운이 내 머리에 깊게 키스했다. 늘 말은 얄밉게 해도 태운이 나를 챙겨 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 태운이 담배를 끊은 것과 누그러진 그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가끔이지만, 나를 위해 무언가를 사 올 때도 있었고 말이다.
처음에는 나와 손이 닿는 것도 껄끄러워하던 그였는데, 내가 가이딩하자고 하면 손을 먼저 내밀어 주기도 했다. 이제는 이렇게 그와 함께 침대에 있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마 태운 또한 나를 향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가 나를 더욱더 좋아해 주기를 바랐다.
“나 내일 등급 발표 날이야.”
“그, 래?”
태운은 술에 취한 것이 확실한지 말이 꼬였다. 지금의 내 말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말을 이었다.
“응. 이번에 승급하면 옛날처럼… 대해 줄래?”
목이 메어 와서 띄엄띄엄 말했다. 나는 태운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자는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꽉 껴안는 그에게서 답을 들은 거 같았다.
나는 내 허리를 안고 있는 태운의 손에 내 손을 포개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부디 내일 A급으로 승급되길 바랐다.
그리고 내 바람대로 다음 날 나는 A급으로 승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