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환영회 날까지는 센터에 나가지 않고 쉬어도 된다고 해서, 그동안 나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과거로 돌아왔을 때부터 내가 이미 각성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현태운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파장을 느꼈었다. 게다가 이직이라도 하게 되면 다시 각성 테스트를 받아야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는 정기적으로 테스트를 받으니 언젠가는 내가 가이드라는 사실이 협회에 알려졌을 것이다.
나는 결국 협회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거다. 그래도 다행인 건 S급이라서 협회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결국 이번에도 현태운이 원하는 대로 휘둘렸을 것이다.
현태운은 내가 알던 모습과 같았다. 막무가내였고 등급으로 사람을 대하는 속물이었다.
하지만 겉모습만큼은 여전히 상냥했다. 이미 겪은 거짓된 상냥함이었기에 나는 속지 않았다.
협회에서 지내게 된 이상 현태운과 대면하는 일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그의 접촉을 막을 생각이다.
이제 더는 현태운을 생각하지 않고 슬슬 자려고 했지만, 과거로 돌아오고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과거로 돌아오고 단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결국 오늘도 새벽까지 깨어 있다가 간신히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진석의 방문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 때문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어 문을 열어 주자, 진석이 며칠 전 맞췄던 제복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가이드님, 일정보다 빠르게 제복이 완성되었어요.”
나는 케이스 안에서 제복을 꺼내 확인했다. 손수 제작한 제복이라서 그런지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사이즈가 안 맞을 수 있으니까, 지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진석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침실로 돌아와 옷을 바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내 옷이라고 말하듯 몸에 딱 맞았다.
제복을 입고 나오자, 진석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얼굴이 잘생기셔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시네요.”
“감사합니다.”
한동안 칭찬을 계속하던 진석이 곧 정신을 차리고 오늘 일정에 대해 말했다.
“성요한 에스퍼님과 페어가 되셔서 05R팀에 들어가실 거 같아요.”
아무래도 성요한이 05R팀이라서 나도 이 팀에 배속된 거 같다. 현태운을 전담했을 때는 01S팀이었는데….
늘 차가웠던 현태운과는 달리 01S팀 팀원들은 모두 내게 잘해 주었다. 자연스레 민성 선배가 떠올랐다. 그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위해 함께 셸터에서 나와 줬다. 마지막에 민성을 보지 못해서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부디 살았기를 바랐다.
마음 같아서는 01S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현태운과 만나는 건 싫었기에 결국 알겠다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네. 그럼 정확히 확정되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축하 파티에서 입을 정복에 대해서도 의견을 구하고 싶은데요.”
이번 주에 있을 파티에 대해 진석이 말했지만, 나도 모르게 귓등으로 넘기며 다른 생각을 했다.
미래가 바뀌고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대로 흘러가는 것을 지켜만 봐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내가 과거로 돌아온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알 수 없으니 불안하기도 했고, 앞으로의 일들 또한 짐작할 수 없어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니 최대한 조심하면서 지내야 할 것 같았다.
***
오늘 S급 가이드로 각성한 나를 위한 축하 파티가 열렸다. 진석과 파티가 시작되기 전부터 머리 손질과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은 뒤 미리 맞춰 둔 정장을 입고 저녁에 파티장으로 이동했다.
파티장에 가기 전, 성요한이 내 파트너가 되어 함께 들어갔다.
내 부탁대로 현태운은 참석하지 못하게 했는지 그의 파장이 느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파티장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였다.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빨리 끝났으면 했다. 성요한도 내가 긴장한 걸 느꼈는지 긴장감을 풀어 주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신의 씨, 긴장하지 말아요. 어차피 다가오지도 못해요.”
“…네.”
나는 그의 말에 짤막하게 대답하며 나를 부르는 협회장 쪽으로 향했다. 협회장은 나를 반기며 주요 임원직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번에는 협회만이 아니라 정부와 다른 기관 사람들도 많이 참석한 거 같다. 하지만 협회장은 협회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접촉을 막았다.
한동안 인사만 하다,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되었다. 협회장이 축하 연설을 하고, 그다음이 내 인사 차례였다. 협회에서 대필해 준 인사말을 그대로 읽고 내려오는 것이라 쉬웠지만, 그래도 많이 떨렸다.
그렇게 축하 공연이 이어지고, 조금은 숨을 돌리나 했더니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모두 안내받은 질문들이라서 빠르게 답하고 화장실로 대피했다.
“집에 가고 싶다.”
나는 평소보다 길게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멀리서 훤칠한 남자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말끔하게 올리고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준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아는 것인지 알은체해 왔다.
“안녕하세요, 이신의 가이드님. 이번에 S급으로 각성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그의 고급스러운 정장을 보면 기자 같지는 않았다.
“정부 소속 차세현 에스퍼입니다.”
그는 내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명함을 받으며 확인하자, 서울본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부는 협회와 달리 게이트가 아니라 반(反)각성자와 테러 집단을 관리하고 문제를 처리하고 있었다. 반각성자 집단은 에스퍼와 가이드임에도 소속 없이 자신들의 인권을 주장하고 있는 집단이었다.
세현의 직함 옆에 S급 에스퍼라는 문구도 함께 있었다. 정부의 S급 에스퍼라니…. 나는 다시 그를 바라봤다.
“협회 쪽은 사람 보는 눈이 있나 봐요. 신의 가이드님 같은 인재들을 찾아내는 것을 보면 말이죠.”
갑작스러운 접근이라 세현을 절로 경계하게 되었지만, 그의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정부 쪽에도 시간 나실 때 방문해 주시면 기쁠 거 같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목소리를 작게 바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신의 가이드님이 원하신다면 절차 없이 언제든지 정부 소속이 되실 수 있어요.”
대놓고 소속 변경을 권하다니. 아무리 단둘이고 협회와 사이가 나쁜 정부 소속이라 할지라도 대담한 언사였다. 세현은 싱긋 웃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괜찮다면 핸드폰 번호를 교환할 수 있을까요?”
“왜요?”
갑자기 핸드폰 번호를 묻는 그에게 다시 경계심이 발동했다. 하지만 세현의 첫인상이 좋아서인지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신의 씨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그리고 막 가이드가 되셨으니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세현의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그라면 어차피 내 번호를 쉽게 알아낼 거 같아 나는 순순히 번호를 알려 줬다. 그러자 그는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첫인상이 좋아서인지 그와 또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성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신의 씨, 여기 있었어요?”
그는 자신에게서 떨어지면 안 된다며 내 어깨에 손을 단단히 두르고 나를 다시 파티장으로 데려갔다.
***
파티 내내 성요한과 협회장 사이에 껴서 사람들을 소개받다 보니 금방 지쳐서 개인실에서 숨을 돌렸다.
셔츠 윗단추를 풀고 생수를 마시고 있는데 마치 내가 혼자 남길 기다렸다는 듯 현태운의 파장이 느껴졌다. 그의 파장에 나도 모르게 몸이 긴장되며 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설마 현태운일까?’ 하는 생각을 할 때,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현태운이 안으로 들어왔다.
“신의 씨.”
설마 했던 생각이 현실로 다가오자 놀람과 동시에 짜증이 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신의 씨 축하 파티인데 제가 빠질 수는 없죠. 그리고 보고 싶어서 왔어요.”
“협회에서 접근 금지라는 말 못 들었어요?”
더는 현태운과 엮이고 싶지 않은데 계속해서 다가오는 그에게 신경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신의 씨한테 당분간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긴 하더라고요.”
“아시면 나가 주실래요?”
“그건 싫어요. 신의 씨랑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풀고 싶어요.”
그 모습에 나는 결국 진석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진석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 가이드님, 무슨 일이세요?
“지금 제 개인실에 현태운 에스퍼가 와 있어요.”
내 말에 진석은 금방 가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현태운은 내 통화 소리를 옆에서 들으며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불청객이었나 보군요.”
“아셨으면 돌아가 주실래요?”
“정말 축하하고 싶어서 온 거였어요. 신의 씨, S급 각성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현태운은 자기 말대로 그저 나를 축하하기 위해 온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알겠으니까, 나가세요.”
내 단호한 모습에 현태운은 다음에 또 오겠다고 하고 사라졌다. 나는 이대로 그가 영영 나타나지 않았으면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