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센터에 나가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어갔다. 협회에서는 그들이 말했던 휴가 기간이 지났음에도 별다른 말 없이 휴가를 연장해 주었다.
그 모습에 협회가 내 행동을 눈감아 주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S급인 나를 놓치는 건 손해이니 맞춰 주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퇴사하고 싶은 내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원흉인 성요한은 내가 센터에 오지 않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가이딩 워치를 통해 가이딩을 요청해 왔다. 지금도 성요한의 가이딩 요청 알림이 왔지만 무시했다.
이제는 현태운보다도 성요한을 보는 것이 껄끄러웠다.
허벅지에 닿았던 성요한의 그것만 떠올려도 저절로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더는 그와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가이딩 워치를 풀며 오늘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어렴풋이 현태운의 파장이 느껴졌다.
내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한 지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파장이라는 건 정말 성가셨다. 매칭률이 높지 않은 파장들은 차단할 수 있었지만, 매칭률이 높은 파장은 고스란히 내게 노출되었다.
차단하려고 해도, 내 파장과 현태운의 파장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옛날에는 그의 파장이 내 곁으로 다가올 때마다 좋았는데, 이제는 성가시고 불쾌했다.
머지않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확인하지 않아도 현태운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월 패드로 다가가 화면을 확인하니, 긴장한 모습의 현태운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음성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여긴 무슨 일인가요? 접근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어요?”
- 일주일이 넘도록 센터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들어서. 걱정돼서 왔습니다.
“현태운 씨가 걱정할 일 아닙니다. 돌아가세요.”
- 아주 잠깐만 시간을 내어 주시면 안 되나요? 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필요 없습니다.”
내 말에 현태운이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처음 보는 우울한 얼굴이었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 그럼 문 옆에 두고 가겠습니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재차 거절했음에도 현태운은 물건을 두고 돌아갔다. 그의 파장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여전히 월 패드 앞에 서 있었다.
놓고 간 물건은 무시하면 그만인데, 계속 신경 쓰일 거 같아 밖으로 나와 확인했다.
문 옆에 내가 좋아하던 초콜릿 브랜드 상표가 그려진 종이 가방이 놓여 있었다. 확인해 보니,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내가 즐겨 먹던 수제 초콜릿이었다. 이 초콜릿을 좋아하게 된 건 현태운이 종종 나를 위해 사 왔기 때문이었다.
이 초콜릿을 보니 그때의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금방 지워 버렸다. 나는 초콜릿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 테이블에 초콜릿 상자를 올려놓았다. 현태운이 준 것이라 껄끄러웠지만, 자꾸만 시선이 갔다. 결국 내가 알던 맛과 같은지 알고 싶어 상자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예나 지금이나 맛은 똑같았다.
여전히 현태운이 싫었지만, 내가 알던 그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는 계속해서 애매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지금의 행동도 그랬다.
나는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초콜릿을 들어 박스째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현태운이 내게 했던 행동들을 계속해서 상기했다. 회귀 전이나 후나 현태운은 같은 인물이었다.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해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멀리 나온 것은 아니고, 택시를 타고 30분 정도 걸리는 번화가였다.
공장에서 일했을 때 쉬는 날에 종종 옷이나 생필품들을 사러 왔던 곳이다.
오랜만에 물건들을 구경하고, 필요한 물품을 사니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되었다. 쇼핑을 끝내고 슬슬 집에 가기 위해 택시 정류장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검은 코트를 입은 에스퍼들이 능력을 사용하며 도로를 엉망으로 만들고 도망치는 뒷모습이 보였다.
협회 에스퍼는 아닌 것 같았다. 협회 쪽 사람들이었다면 이미 긴급 알람이 울리고도 남았다. 그렇다면 정부 쪽 에스퍼인가 짐작했으나, 그 또한 아닌지 정부 마크가 찍힌 제복을 입은 에스퍼들이 뒤에서 그들을 맹추격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반각성자들이나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휘말릴지도 몰라 서둘러 집에 가려고 했지만, 도로가 모두 통제당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근처에 있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할 거 같았다. 나와도 하필 이런 날에 나오다니 낭패였다.
지하철 안내판을 보며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데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정부 제복을 입은 각성자였다. 다쳤는지 흰색 와이셔츠가 피로 범벅이었다.
“괜찮으세요?”
나는 서둘러 남자 곁에 앉아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다행히 치유 능력이 있는 각성자인지 조금씩 상처 부위가 아물고 있었다. 하지만 파장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가이드를….”
남자는 가이드를 불러 달라고 말했지만, 골목에는 나와 남자뿐이었다. 정부 가이드를 찾을 수는 있었지만 찾는 시간에 남자의 생태가 더욱 악화할 거 같았다.
원래 협회 가이드들은 협회 에스퍼들만 가이딩해 줄 수 있지만, 협회 규칙 같은 건 더 이상 내 안중에 없었다.
“제가 가이딩해도 괜찮을까요?”
내 말에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남자는 나와 상성이 잘 맞는 건 아닌지 다른 에스퍼들에 비해 가이딩이 더딘 느낌이었다. 그래도 날뛰던 남자의 파장은 잠잠해졌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딩을 받으면서 남자도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는지 내게 누구냐고 물었다.
“…누구세요?”
“지나가던 가이드입니다.”
내 말에 그는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그에게 신상을 밝힐 생각이 없었기에 슬슬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정부와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평정권 정도로 수치가 올랐을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직 남자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까지 해 준 것도 나로서는 많이 배려해 준 거였다. 그리고 남자는 치유계 능력이 있으니까 금방 회복할 것이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벽에 기대어 준 뒤 가려고 했지만, 남자가 내 팔목을 잡았다.
“이름이 뭡니까.”
“알려 줄 수 없습니다.”
“사례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아요.”
그저 남자가 이대로 정부로 잘 복귀했으면 했다. 나는 결국 남자의 손을 빼내고 걸음을 빨리했다.
건물 사이에서 나온 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자, 다행히 정부 제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쓰러진 남자를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원재가 퇴근했는지 도어 록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늘 퇴근하면 내게 달려오던 원재였는데 오늘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상한 느낌에 현관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원재야, 왔어?”
내 말에도 원재는 답하지 않았다. 거실로 들어선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센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 있는 거야?”
“혀엉….”
원재는 힘없는 걸음으로 내가 앉아 있는 소파로 걸어오더니, 내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늘… 협회에서 현태운 에스퍼를 전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현태운 에스퍼를?”
“네.”
어렴풋이 원재가 현태운의 전담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현재 센터에서 현태운의 전담이 될 가이드가 없으니 남은 사람은 이번에 A급으로 각성한 원재뿐이었다.
“저는 현태운 에스퍼 전담할 생각 없다고 말했는데, 협회에서 말을 들어주지 않아요. 저 이제 어떡해요?”
원재가 어렸기에 협회가 만만하게 생각하고 일을 추진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내일 나랑 같이 협회에 가자.”
“정말요?”
“응. 그리고 전담이 됐다고 해서 가이딩할 필요 없어. 계속 거부하면 돼.”
내 말에 그제야 원재의 얼굴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형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안심돼요.”
말로는 원재를 위로해 주긴 했지만, 아마 협회에서 쉽게 전담을 끊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만히 있기보다는 행동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선택이라고 믿었기에 함께 협회에 요청할 생각이었다.
다음 날, 원재와 협회에 갔지만 예상대로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모습에 협회를 향한 반감만 심해졌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강하게 나갈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협회는 나와 원재를 계속 이용할 생각으로 평생 협회에 발을 묶어 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