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복원 능력이 있는 에스퍼들이 붕괴된 도시들을 하나씩 복구해 나갔다.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도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능력이란 건 역시 신이 주신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온 지원군들은 원래 곧장 한국으로 귀환해야 했지만, 미국 협회가 큰 활약을 펼친 현태운과 S급 에스퍼의 폭주를 막은 나에게 더 머물 것을 권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을 더 미국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 본사가 있는 뉴욕으로 이동했다.
미국 협회는 나와 현태운을 최고급 호텔의 최상층에 머물게 해 줬다. 미국에서 우리는 영웅처럼 모두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 땅을 밟은 뒤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가이딩하느라 기력이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그 탓에 호텔에 온 첫날은 종일 자기만 했다.
부족했던 잠을 채웠지만 피로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다. 별다른 일정이 없다면 오늘도 호텔에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현관으로 이동해서 문을 열자, 한국인으로 보이는 직원이 서 있었다. 한국인이 맞는지, 직원이 한국어로 인사와 함께 작은 봉투를 건넸다.
“이신의 가이드님께 편지가 와서 전달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나는 편지를 받아 들고 다시 침실로 이동했다. 확인해 보니 내가 도와줬던 레이너에게 온 편지였다.
[친애하는 이신의 가이드님께, 폭주했을 때 가이딩해 주신 것에 감사의 답례를 하고 싶습니다. - 레이너]
맨 하단에는 승낙한다면 아래의 번호로 연락 달라는 메시지도 적혀 있었다. 사실 그가 괜찮아졌는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점심을 먹은 뒤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영어가 아닌 한국말이 들려왔다.
- 여보세요.
“이신의입니다. 초대장 잘 받았어요.”
-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이트에서 큰 신세를 졌어요.
게이트에서 신세를 졌다는 말에 지금 통화하고 있다는 사람이 레이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는 핸드폰 자동 번역 기능으로 대화하려고 했는데, 능숙한 한국어에 놀랐다.
“아닙니다. 제 일을 한 것뿐이에요. 그런데 혹시 한국어 가능하신 거예요?”
- 네. 어렸을 때부터 배워서 조금 할 줄 압니다.
“너무 잘하셔서 놀랐어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 신의 씨 덕분에 아주 좋아요. 감사의 의미로 저희 집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
“당연히 좋죠.”
이왕 미국에 왔는데 미국 문화를 체험하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 그럼 내일 점심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네.”
사실 영어를 할 줄 몰라, 레이너의 안부만 물어보려고 했는데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말에 식사 초대에 응하게 되었다.
레이너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것만으로도 내적 친밀감이 느껴져, 그와의 만남이 기대되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레이너가 보내 준 정장과 구두가 왔다. 함께 온 카드에는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 그래도 뭐를 입고 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라 다행이었지만, 선물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왕 선물해 준 것이니 입고 가기로 했다. 정장은 나한테 딱 맞았다.
점심이 되고, 레이너가 보내 준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보통의 가정집이리라 예상했는데 대저택에서 집사와 메이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위한 통역사도 함께였다. 역시 S급이라서 재력도 남다른 거 같았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가자, 레이너가 있었다.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인사와 함께 볼 키스를 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신의 님.”
익숙하지 않은 호칭과 행동에 놀랐지만, 나를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해 주는 레이너의 모습에 나 또한 조금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딱딱한 것보다는 이게 좋았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기뻐요. 선물도 고마워요.”
나는 레이너에게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의 님이 입어 줘서 기뻐요.”
나는 그의 말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느낌이 이상했다. 그런 나를 보던 레이너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고기 좋아해요?”
“네. 좋아합니다.”
“그럼 다이닝 룸으로 이동합시다.”
레이너는 서슴없이 내 어깨를 잡고 이동했다. 그는 스킨십에 거리낌 없어 보였다. 해외는 가이딩이 아니더라도 스킨십에 관대하니까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따랐다.
레이너가 의자를 빼 주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레이너 또한 앉는 모습을 바라봤다.
“신의 님이 가이딩해 주지 않았으면 전 죽었을 거예요.”
“아니에요. 셸터에 능력 좋은 가이드들이 많던데요?”
“아니요. 신의 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미국의 영웅이기도 하고요.”
“해야 할 일을 한 거뿐이에요.”
“고마워요.”
레이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빼냈다. 이런 내 모습에 레이너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좋아서 그만. 미안합니다.”
사과하는 그는 마치 주인에게 혼나는 대형견 같았다.
“아니에요.”
살짝 어색해지려는 순간, 식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고 쉐프가 하나씩 요리를 설명해 주었다.
나와 레이너는 이번 게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응접실로 돌아가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면서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레이너가 말을 꺼냈다.
“이틀 뒤에 파티 있는 거 알죠?”
“네.”
이번에 게이트로 지원 온 각국의 각성자를 위해 미국에서 감사의 파티를 연다고 했다.
“그때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어요?”
갑작스레 파트너 제안을 하는 레이너에게 놀랐지만, 그가 날 좋게 봐주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파트너는 어려울 거 같았다.
“저는 함께 온 동료들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아쉽네요.”
나는 미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레이너는 금세 괜찮아졌는지 질문을 이었다.
“본국으로 언제 돌아가는 거예요?”
“삼 일 뒤에요.”
“일찍 가시네요. 신의 님과 더 있고 싶은데.”
그는 정말 아쉬운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한국에 놀러 오면 관광을 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레이너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한국에 놀러 가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
레이너의 저택에서 호텔로 돌아오고 기가 빠져서 호텔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저녁은 룸서비스로 간단하게 먹고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민성과 태운이 서 있었다. 분명 접근 금지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귀찮게 하지 않기로 각서까지 썼는데 그는 여전했다. 이제 실망감도 들지 않았다.
“신의 가이드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
민성에게 물으며 현태운의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그런 내 모습에 민성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이왕 미국에 왔는데 같이 산책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민성의 말에 현태운이 제안한 일이란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현태운은 평소와 달리 긴장한 얼굴이었다.
내가 말이 없자 민성이 서둘러 말했다.
“그리고 가이드님 디저트 좋아하신다면서요. 근처에 유명한 베이커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즐겨 먹는 디저트 브랜드의 본점이 근처에 있었다. 아마 그곳을 말하는 것이다.
민성의 말에 고민되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현태운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민성과 미국 거리도 걷고 싶고 본점의 디저트를 먹고 싶은 마음이 컸다.
민성은 기대와 걱정이 섞인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드님, 감사해요. 준비하실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준비를 마치고 우리 셋은 뉴욕 거리로 나왔다. 아직 겨울이라서 코트에 머플러를 둘러도 추웠다.
늦은 시간임에도 거리는 휘황찬란하고 사람들이 많았다.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되어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가 유명한 베이커리예요.”
민성의 말에 그가 가리킨 곳을 보자, 멋들어진 베이커리 본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민성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은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뭔가 일이 생긴 거 같았다.
“협회에서 급하게 문서 하나를 작성해 달라고 해서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죄송해요.”
“괜찮아요.”
“가이드님이랑 에스퍼님은 둘러보다가 오세요.”
원래 민성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디저트를 사고 싶기도 했다. 호텔과도 가까운 거리였기에, 사고선 곧장 돌아가면 되었다.
내가 베이커리 안으로 들어가자, 현태운도 따라 들어왔다. 다행히 그는 나와 떨어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호텔에서 먹을 디저트를 골랐다. 둘러보니 진한 맛의 밤 크림이 올라간 몽블랑이 시그니처 디저트인 거 같았다. 그런데 예약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아쉬운 대로 에클레어 몇 개를 구매했다. 현태운도 디저트를 샀는지 베이커리 상표가 붙은 종이 가방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머뭇거리다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네며 종이 가방을 주었다.
“신의 씨, 선물이에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종이 가방을 얼떨결에 받고 안을 보자, 조금 전에 먹고 싶었던 몽블랑이 있었다.
“필요 없어요.”
“단거 좋아하잖아요. 호텔에서 드세요.”
출입문 앞에서 대치하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져서 결국 현태운의 선물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태운은 아무 말 없이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그 모습을 힐끗 봤다. 이제 슬슬 더러운 성격이 나와야 하는데 태운은 다정함을 연기했다. 그런 그가 사실은 내가 알고 있던 태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생각해 보면 원재도 A급이 나왔고, 나도 S급이 되었으니 여기는 내가 알던 세계와 다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현태운에게 너무 모질게 행동한 건 아닐까, 란 생각을 했지만, 과거의 현태운을 생각하면 지금의 현태운도 미워졌다.
어느새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현태운의 얼굴을 보니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능력 부작용으로 잠을 못 잤을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세요.”
현태운이 호텔 방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손에 들린 현태운의 선물과 그의 초췌한 얼굴이 계속 마음에 밟혔다. 나는 들어가지 않은 채 결국 그에게 물었다.
“약물 가이딩 받고 있어요?”
“네.”
“들어와요.”
미국 게이트를 위해 무리하게 능력을 사용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모른 척할 수도 있었지만, 약해져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부작용에 괴로워하는 현태운의 가이딩 수치를 조금이라도 올려 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네?”
갑작스레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내 말에 현태운은 놀란 얼굴이었다.
“가이딩해 줄게요.”
“정말요?”
현태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몽블랑이 든 종이 가방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거 보답이요.”
“신의 씨, 고마워요.”
태운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에게서 몸을 돌리고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 뒤로 현태운이 따라오는 걸 느끼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가이딩 워치 켜 봐요.”
현태운의 가이딩 수치는 43%였다.
“안 아팠어요?”
“괜찮아요. 매일 이래서.”
“접촉 가이딩은 못 해요. 방사 가이딩 해 줄게요. 옆에 앉아요.”
내 말에 현태운이 머뭇거리더니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의 파장을 찾으며 방사 가이딩을 시도했다. 현태운의 파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뒤엉켰다.
“평정권까지만 가이딩해 줄게요. 그동안 자요.”
“신의 씨, 고마워요. 그럼 조금만 잘게요.”
나는 더는 답하지 않은 채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태운의 얼굴을 바라봤다.
많이 피곤했는지 현태운은 빠르게 잠이 들었다. 지금의 모습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종종 소파에서 태운을 가이딩해 주면 그는 곧장 잠이 들곤 했다.
나는 태운의 자는 모습을 좋아했었다. 정말 평온해 보였으니까.
지금도 평온해 보이는 태운의 모습을 보며 나 또한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