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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가이드는 이만 퇴사합니다-54화 (54/65)

54화

몇몇 일정을 소화하며 휴식을 취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지원군으로 와 준 각성자들을 위한 감사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호텔 파티장엔 다양한 나라의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모여 파티를 즐겼다.

유독 한곳에 시선이 쏠렸는데, 바로 나였다. 폭주 상태인 레이너를 잠재운 일화가 퍼지고 다수의 에스퍼를 방사 가이딩하는 모습이 기자에게 사진이 찍혀 본의 아니게 현재 미국에서 제일 유명 인사가 되었다.

원래 S급들의 신원은 모두 기밀인데, 관심도가 높다 보니 실시간으로 털리고 있었다. 각성자들 또한 내게 관심이 많았다.

이번 게이트에서 내게 가이딩받았던 에스퍼들이 한 명씩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전해 왔다. 아마 곁에 성요한이 없었더라면 에스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접촉을 막기 위해 파티에 있는 동안 성요한과 함께하라는 협회의 지시가 있었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다른 나라인 만큼 위험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었기에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신의 씨, 인기 많네요.”

성요한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표정 없이 바라봤다. 그의 파장이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나는 성요한의 말을 무시하며 직원이 건네준 샴페인을 마셨다. 그런데 멀리 현태운의 모습이 보였다. 현태운은 혼자였지만, 그의 주변엔 몇 명의 가이드가 있었다.

가이드들은 현태운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가까이 가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거 같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려 고개를 돌렸다. 성요한은 어느새 미국 협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슬쩍 자리를 옮겨 관현악 연주를 들었다. 그런 내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즐거워 보이네요.”

현태운의 목소리였다. 그의 파장을 느끼긴 했지만, 내 뒤까지 온 줄은 몰랐다. 나는 애써 음악에 귀 기울이며 짧게 대답했다.

“네.”

“다행이에요. 한국에서는 답답해 보였는데, 여기서는 편해 보여요.”

현태운의 말에 생각해 보니, 미국에 오고 갑갑함이 가신 걸 느꼈다. 하지만 한국과는 다른 답답함은 있었다. 역시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현태운 씨도 여기서 가이드 구해 보는 게 어때요?”

“저는 신의 씨 말고는 없어요.”

“제가 C급이어도요?”

“네.”

현태운이 S급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할 때면, 나도 모르게 현재 등급과 회귀 전 등급을 비교해 따져 묻게 됐다. 아무래도 그간 그가 해 온 일들에 상처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안 믿어요.”

내 말에 태운은 몇 초간 말이 없었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럼 신의 씨는 여기서 새로운 에스퍼를 구할 생각인가요?”

“네. 한국보다 훨씬 신사적이라서요.”

“미국 쪽 협회가 한국보다 더 악질이에요.”

현태운은 평소와 달리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악질이라 한들 회귀 전 현태운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더는 현태운을 상대하지 않고 성요한에게 가려고 할 때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레이너가 샴페인 두 잔을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신의 님, 찾고 있었어요.”

“레이너!”

“오늘 일이 있어서 늦게 왔어요. 테라스로 가서 마실래요?”

레이너가 샴페인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그 모습에 태운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태운은 내게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무시했다.

나는 레이너가 건네준 샴페인을 들고 그와 함께 테라스로 이동했다. 레이너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의 님이 곧 떠난다고 생각하니 슬프네요.”

그동안 신의 님이라고 부르던 레이너의 말이 신경 쓰였기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슬퍼요. 그리고 님 빼고 이름으로 불러요. 신의라고.”

“그래도 되나요?”

“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이너가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그럼 신의도 절 레이라고 불러 줘요.”

“알겠어요.”

레이너는 나보다 5살 많았지만, 친근한 말투와 행동이 친구같이 느껴졌다.

“신의는 오늘 즐거워요?”

레이너는 한국식 존칭은 모르는지 나를 친구처럼 신의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부분을 지적할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이 덕분에 이렇게 파티에 오고 미국에 머물 수 있어서 즐거워요.”

“저야말로 신의가 미국에 와 줘서 고마워요.”

레이너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손등에 키스하려다 멈췄다.

“또 무례를 저지를 뻔했군요.”

“아니에요.”

한동안 레이너와 이야기하다, 무의식적으로 춥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레이너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한 뒤 혼자만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와인 잔 두 개가 손에 들려 있었다.

“와인이네요?”

“네.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거예요.”

그의 말에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오래 숙성된 짙은 포도 향이 느껴졌다.

“맛있네요.”

“그렇죠?”

레이너의 말대로 식었던 몸이 녹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레이너의 따듯한 배려 덕분일 것이다.

테라스 너머로 넓은 정원이 보였다. 정원 곳곳에는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보는데, 레이너가 말했다.

“10시에 눈이 내릴 거예요.”

“그래요? 어떻게 알아요?”

“매년 이날 10시에 눈이 내려요. 그러면 커플들이 그때 키스를 나누죠.”

“키스요?”

“네. 눈 아래에서 키스한 연인은 내생에서도 만난다고 해요.”

“그렇군요….”

10시가 되려면 아직 1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키스를 할 사람은 없었기에 그저 이 문화를 보고 싶었다.

멀리 미국 협회장과 대화를 끝낸 성요한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레이너와 내가 함께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결국 레이너에게 인사를 하고 성요한과 파티장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성요한은 와인을 마시는 나를 보며 물었다.

“이제 슬슬 호텔에 가는 게 어때요?”

“저는 더 놀고 싶은데요.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요.”

“알겠어요.”

10시에 눈이 온다고 했으니까 더 기다리고 싶었다. 눈도 보고 싶고 말이다.

나는 내게 오는 에스퍼와 가이드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번역기를 통한 대화라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 내 모습을 성요한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어셋으로 통역되는 말들을 들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성요한은 그저 옆에서 경호원처럼 나를 지켜봤다. 그리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적당히 쳐 냈다. 그러다 결국 한계에 도달했는지 내게 다시 방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신의 씨, 이제 슬슬 올라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내일 비행도 있잖아요.”

“알겠습니다.”

나는 결국 알겠다고 답하고 성요한과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 성요한은 그저 내가 다른 에스퍼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조금 전과는 상반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잘 자요.”

성요한이 내 머리에 키스했다. 나는 그런 그를 쳐 내고 방으로 들어와 그가 키스했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파장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렇게 파장을 느끼는 것이 다행이었다. 멀어지는지 가까워지는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성요한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다시 파티장으로 갔다. 순전히 눈이 보고 싶어서였다.

올해 한 번도 눈을 보지 못했다.

파티장에서 와인을 받아 테라스 구석으로 갔다. 그런데 뒤늦게 취기가 확 올라왔다.

와인 잔을 천천히 흔들고 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레이너의 말대로였다.

정원에 있던 사람들과 파티장 안의 사람들이 키스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기하고 로맨틱한 장면이었다.

한동안 사람들을 보다 슬슬 올라갈까 하고 몸을 일으키자 몸이 휘청거렸다. 이대로 바닥에 쓰러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행히 누군가 내 몸을 잡아 줬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처음 보는 외국인이었다.

“도와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혼자 걸어가려고 했지만, 계속 휘청거렸다.

그제야 다시 파티장에 온 것이 후회됐다.

조금 전의 남자가 내게 몇 번이나 다가왔지만, 나는 그의 도움을 거부했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몸이 다시 기우는 순간, 또다시 누군가에게 붙들렸다. 하지만 낯설었던 조금 전 남자와 다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한층 더 낮은 목소리의 남자가 내게 말을 건넸다. 괜찮냐고 물은 거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남자의 몸에 기댄 채 움직였다.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온도가 너무나도 좋았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올렸지만, 복도 등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사람도 나를 보지 못하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는 이 선량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나를 감싸는 파장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행동을 했다. 아마 술에 취해 행동이 대담해진 거 같았다.

나는 고개를 올려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정말 짧은 입맞춤이었다. 지금의 키스엔 취기에 힘입은 호기심을 제외하고는 다른 감정은 없었다. 10시에 오면 키스하는 미국 문화를 체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이대로 짧은 키스로 끝내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상대방은 그대로 나를 벽에 밀친 채 깊은 키스를 해 왔다.

키스는 현태운과 성요한이랑만 해 봤고 하는 방법도 제대로 몰랐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상대와 혀를 얽고 그의 입술을 빨았다. 그저 지금은 후회를 뒷전으로 미루어 놓은 채 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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