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번에 게이트에서 한국 협회 소속 각성자들의 활약이 커서인지 셸터 비행장에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의 배웅 속에서 무사히 비행 셸터에 올랐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긴장감에 제대로 잠도 못 잤는데, 게이트가 무사히 닫혀서인지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미국에서의 생활을 잠시 돌아보다 눈을 감았다. 8시간은 셸터에서 보내야 했고 시차를 맞추기 위해 슬슬 자야 할 거 같았다.
조금씩 잠이 들려는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현태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약속까지 해 놓고, 대체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지 모르겠다.
“신의 씨, 현태운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잠을 방해받은 탓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태운의 말에 우선 들어오라고 말했다. 이내 현태운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장시간 비행이라서 이게 필요할 거 같아서요.”
쇼핑백을 건네받으며 안을 슬쩍 보자, 태운의 말대로 수면에 필요한 물건들과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이런 거 부탁한 적 없어요.”
“제가 주고 싶어서 그래요. 이번에 미국에서 가이딩해 줘서 고마워요.”
“그건 원해서 해 준 게 아니라, 제 일이라서 해 준 거예요. 의미 부여하지 마세요.”
나는 평소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에서의 일로 관계가 호전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철저하게 부수고 싶었다.
“알아요.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그 물건들은 필요 없으면 버리세요.”
그렇게 말한 현태운은 더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인사하고 나갔다. 더는 그가 준 물건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기에 쇼핑백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놓고 다시 눈을 붙이려고 할 때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또 현태운인가 싶었지만, 성요한이었다.
“레이너와 매칭 테스트는 잘하고 왔나요?”
다짜고짜 들어와서 레이너와 매칭 테스트를 잘했냐는 성요한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노크도 없이 무슨 예의예요. 그리고 어떻게 알았어요?”
“신의 씨에 대한 건 웬만해서는 다 알고 있어요.”
그 말에 성요한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단 걸 알 수 있었다.
“몰래 감시한 거예요?”
“네.”
곧장 대답하는 성요한은 숨길 생각이 아예 없어 보였다. 그 모습에 기가 찼다.
“성요한 씨가 뭔데 절 감시해요.”
“신의 씨는 한국 협회의 주요 인재잖아요. 저한테도 중요한 사람이고요.”
“저한테도 사생활이란 게 있어요. 성요한 씨와 더 이상 페어도 아니고요. 더는 제게 접근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페어가 끊긴 건 유감스러운 일이에요.”
성요한은 그렇게 말하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지어낸 것임을 알기에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나가 주실래요?”
“저랑 페어를 끊어도 신의 씨는 협회에서 못 나가요.”
정부에 갔었을 때도 성요한은 같은 말을 했었다. 확신하는 그의 말에 짜증이 담긴 눈초리로 바라봤다.
“개소리하지 말고 나가라고요.”
“페어가 끊겨도 예전과 같을 거예요.”
성요한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행동에 위험을 느끼며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방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그런 나를 성요한이 가볍게 붙잡아 침대에 던졌다. 그리고 자신 또한 침대에 올라오며 말했다.
“도망쳐도 내가 끝까지 찾아서 내 옆에 둘 거니까.”
“나한테 왜 그래요!”
최근 들어 성요한의 집착이 강해진 것을 느꼈다. 그 모습에 가이딩 강의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에스퍼는 가이딩받을수록 상대 가이드에게 강한 집착과 소유욕이 생깁니다.’
협회에 들어오고, 나와 가장 길고 오래 가이딩한 사람은 성요한이었기에 강의 내용처럼 나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말했잖아요. 신의 씨는 내 가이드라고.”
그렇게 말한 성요한이 내 입술에 입을 맞대며 혀를 집어넣었다. 나는 곧장 발버둥 쳤지만, 성요한이 능력으로 내 몸을 옥죄었다.
성요한의 파장이 진득하게 내 파장에 접촉하며 자신의 것이라는 듯 나를 옭아맸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에 헐떡여도 성요한은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입 안을 헤집고 떨어졌다.
“앞으로 재미있어질 거예요.”
나는 침대에 널브러진 채 성요한을 노려봤다. 그는 내 모습에 미소로 답하고 나갔다.
성요한이 나가고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현재의 나로서는 성요한을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성요한의 말대로 페어가 끊겼어도 그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와 가이딩을 시도할 것이고 언젠가 그에게 각인당할 것이 분명했다. 각인을 당하면 정말 끝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었다.
성요한에게 각인당하기 전 협회에서 나가든지, 나를 도와줄 사람을 모아야 했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가이드였기에 현재 상황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일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미국에 가는 건 최후의 선택이었다.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현태운이 떠올랐다. 현태운이라면 성요한에게서 나를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태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현태운에게만큼은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
해외 파견은 처음이었던지라 무섭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지만, 다양한 나라의 각성자들을 만나는 좋은 경험이었다. 이참에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좋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다시 왔을 때는 미국 게이트에서의 나와 현태운의 활약이 이미 중계된 뒤라 미국에서보다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과 한국 협회에서 주는 성과금도 상당해, 이것만으로도 퇴사 후 지내기에 충분할 거 같았다.
협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인사차 에스퍼·가이드 뉴스에도 얼굴을 비췄다.
인터뷰를 마치자 진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 떨어진 것뿐인데 그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담당자님!”
“가이드님, 잘 다녀오셨어요? 활약 잘 봤어요.”
“네, 여기 선물이요.”
나는 캐리어에서 미리 빼놓은 선물을 진석에게 전했다. 진석은 내 선물을 기쁜 얼굴로 받아들였다.
“제 선물까지 사 오신 거예요?”
“네. 그런데 제 짐은 어디 있나요?”
“현태운 에스퍼님께서 집까지 다 옮기셨어요.”
현태운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고스러운 일이 사라져 편하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제 물건 만지지 말라고 해 주세요.”
“순식간에 옮기셔서 막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진석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란 걸 알기에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나는 진석에게 미국에서 고생해 당분간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싶다고 말해 두었다.
머지않아 집에 도착했다. 나는 진석에게 인사를 한 뒤 집으로 올라왔다. 진석의 말대로 문 앞에 내 캐리어들과 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현태운 생각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애쓰며 캐리어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놀라고 말았다.
원재가 현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몸을 일으키며 나를 꽉 껴안았다.
“형!”
“그래, 형 왔어.”
나 또한 원재의 등을 손으로 껴안았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동안 나를 놔주지 않는 원재를 다독이며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향했다.
“형이 오기만 기다렸어요.”
“나도 빨리 오고 싶었어. 여기, 선물.”
나는 캐리어를 풀고 원재의 선물을 꺼냈다. 미국에서 레이너와 함께 고른 술과 미국 비행 면세점에서 구매한 향수가 든 종이 가방을 그에게 건넸다.
“제 선물까지 사 온 거예요?”
“당연하지.”
원재는 내게서 쇼핑백을 건네받으며 안을 확인했다. 그는 선물을 보며 기쁜 듯 말했다.
“술이랑 향수네요?”
“응. 나한테 술 배우고 싶다고 했잖아.”
“맞아요. 역시 형은 기억하고 있었어.”
원재는 다시 나를 껴안았다. 그는 나보다 컸지만, 스무 살이라서 그런지 내겐 아이같이 느껴졌다.
“향수도 너무 좋아요. 매일 사용할 거예요.”
향수는 면세점에 들렀을 때 하나씩 시향하고 고심 끝에 고른 것이다. 부드러운 우디 향이었다.
원재는 향을 맡으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선물 사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원재가 무엇을 하면서 지냈을지 궁금해졌다.
“그동안 뭐 하면서 지냈어?”
“혼자 집에 있었어요.”
“협회에서 가이드 신년 파티 했잖아. 안 간 거야?”
“네…. 형 없으니까 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친한 사람도 없고요.”
“이 기회에 친구도 사귀면 좋았을 텐데.”
“저는 형만 있으면 돼요.”
사실 처음에는 나를 향한 원재의 맹목적인 마음이 크게 걱정되지 않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원재와 평생 같이 살 수도 없었고, 퇴사를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원재가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조금씩 괜찮아지리라 애써 믿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