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갑작스러운 원재의 연락에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성요한의 파장이 느껴져, 보지 않고도 원재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서둘러 파장을 따라 거실로 가자, 제집처럼 소파에 앉아 있는 성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 떨어져 성요한을 지켜보던 원재가 나를 보자마자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형 왔어요?”
“응.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형한테 전화하기 바로 전에요. 계속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요.”
원재의 말에 나는 성요한에게 다가가 물었다.
“성요한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신의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 질문에 성요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여기 왜 왔냐고요.”
“오늘부터 저도 여기서 같이 살 거예요.”
“성요한 씨가 왜 우리랑 같이 살아요?”
“이번에 신의 씨, 협회에 말도 없이 미국에서 매칭 테스트도 하고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잖아요.”
세현이 미국 협회의 스카우트 제안을 알고 있을 정도이니, 한국 협회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 갈까 봐 여기 있는 거예요?”
“네. 협회에서 신의 씨를 감시하라고 하네요.”
협회에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런 식으로 성요한을 감시 역할로 집에 둘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말도 없이 오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공문 보냈을 텐데요?”
성요한의 말에 서둘러 단말기를 확인하자, 10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된 거죠?”
성요한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이 있는 복도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신의 씨 옆방 비어 있던데. 제 방은 그 방으로 할게요.”
“나가요.”
성요한에게 서둘러 나가라고 말했지만, 그는 무시하며 방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나는 결국 성요한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 손목을 낚아챘다.
“나가라는 말 안 들려요?”
“내가 나가면, 협회에서 신의 씨 통제 들어갈 거예요.”
“…….”
“그러면 신의 씨는 이제 밖에 못 나가요. 이대로 인간 가이딩 기계가 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내 옆에 있어요.”
성요한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협회는 충분히 나를 감금하고 가이딩만 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요한을 집에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인상을 쓴 채 성요한을 바라만 봤다. 그런 내 팔목을 원재가 잡으며 작게 말했다.
“형…. 지금은 성요한 에스퍼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사실 협회가 요즘 이상해요.”
“왜?”
“형이 미국에 있을 때, 저한테도 형이 한국 협회를 배신하고 미국으로 간다고 했거든요.”
“그럴 리가 없잖아.”
미국 협회에 갈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한국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나를 통제하기 위해 구실을 만든 거 같다. 나를 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 그동안 협회가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줬던 것이 이상하긴 했다. 그래도 성요한을 집으로 보낸 건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지금 성요한 씨가 이렇게 나오면 미국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내 말에 성요한은 비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내 표정은 더욱더 경직되었다.
“신의 씨가 얼마나 위험한 발언을 한 줄 아세요? 그리고, 협회가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아요?”
“성요한 씨 때문이잖아요. 저 미국에 갈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가 주세요.”
“같이 있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제발 나가라고요!”
내 말에도 성요한은 내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서둘러 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님, 지금 성요한 에스퍼가 저희 집에 있는데요.”
- 안 그래도 가이드님께 연락드리려고 했어요.
반응을 보니 진석은 성요한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 같다.
- 협회에서 오늘부터 성요한 에스퍼님과 함께 지내시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다시 페어가 되라는 말도 있었고요.
“저는 성요한 에스퍼랑 한집에서 살 생각도, 페어가 될 생각도 없어요.”
- 사실… 협회에서 가이드님을 주시하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이럴 거면 미국에 절 보내지 마셨어야죠.”
- 아마 일부러 보낸 거 같습니다. 가이드님을 가둘 명분이 필요했겠죠.
진석의 말이 맞았다. 내가 자신들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억누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성요한 에스퍼를 여기에 계속 둘 수도 없잖아요.”
- 우선 협회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제가 상황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고, 성요한과 도로 페어를 맺게 될지도 모른다는 암담한 소식만 하나 더 늘어났다. 한국 협회를 쉽게 본 거 같았다.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원래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협회가 이렇게 나온다면 미국의 스카우트 제의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
결국 진석의 상황 보고가 올 때까지 성요한과 지내게 되었다. 다행히 성요한이 우리에게 접촉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거실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밥 안 먹어요?”
나는 종일 소파에 앉아 있는 성요한을 향해 물었다.
“PTF 패치 착용 중이라서 괜찮아요.”
PTF 패치는 최대 한 달간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필수 영양소가 공급되는 패치였다. 생각해 보니 현태운도 PTF 패치를 자주 착용했었다.
새삼 S급 에스퍼들의 생활이 편리하단 생각이 들었다. PTF 패치도 협회에서 지원해 주고, 가이드의 거주지에 침입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으니 말이다.
결국 나와 원재만 식사하고 성요한은 거실에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봤다.
감시당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원재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밥을 먹는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평소보다 덜 먹기도 했고 말이다.
“성요한 씨, 언제까지 거실에 있을 거예요?”
“제 집인데 마음대로 못 하나요?”
“여기가 왜 성요한 씨 집이에요. 그리고 할 일 없으면 방에 들어가세요.”
나는 식탁을 정리하며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성요한을 향해 타박하듯 말했다.
“일은 안 해요? 왜 계속 집에 있는 거예요?”
“딱히… 나가고 싶지 않아서요. 그리고 신의 씨랑 집에 있는 게 좋아요.”
성요한도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거 같았다. 생각해 보면 현태운도 늘 집에서 가이딩을 받으며 지냈다.
언제까지 성요한과 살아야 하는 것인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잖아요.”
“저는 계속 있을 생각인데요? 이대로 신의 씨와 각인, 서약도 할 생각이에요.”
각인이라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성요한이 나를 겁탈하려고 했던 일 또한 생각나서 진저리가 쳐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저는 성요한 씨랑 각인할 생각 없습니다.”
내 말에 성요한은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저주처럼 들렸다. 그와의 각인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성요한이랑 각인하는 건 현태운과 각인하는 것보다 싫었다.
한동안 성요한과 언쟁하고 있는데, 어느새 방에서 나온 원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형 방에 가면 안 돼요?”
“가이드끼리 뭘 하려고 방으로 들어가요.”
성요한은 귀도 밝은지, 우리와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원재의 말을 듣고 우리를 막았다.
“신경 쓰지 마시죠.”
“둘 사이에 날 끼워 주면 신경이 안 쓰일 거 같은데요?”
나는 성요한을 노려보고 원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이대로 성요한과 대화를 이어 가는 건 좋지 않았다. 원재가 불안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형이 성요한한테 각인당할까 봐 무서워요.”
원재는 문이 닫히자마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원재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성요한이 억지로 각인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기에 나 또한 그와 한집에 있기 껄끄러웠다.
“왜 에스퍼랑 가이드 사이에만 각인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요. 불공평해요.”
원재의 말처럼 나도 각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각인하면 꼼짝없이 상대 에스퍼와 평생을 함께해야 했으니 말이다.
“나도 각인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저도 에스퍼랑은 각인하고 싶지 않아요.”
생각해 보면 원재도 나와 같은 입장이었다. 원재는 이대로 S급이 아니라 A급으로 사는 것이 편할 것이다.
S급으로 승급하게 된다면 나처럼 협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고, 원치 않은 가이딩과 전담을 하게 될 거다.
“오늘은 형이랑 같이 자면 안 돼요?”
“알겠어.”
원재는 성요한만큼 덩치가 있었지만, 성요한이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성요한이 있는데 혼자 방에 있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내 침대는 성인 남자 둘이 자도 남을 정도로 컸다.
“제가 에스퍼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쵸, 형?”
“그러게.”
나 또한 내가 에스퍼가 되었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에스퍼 또한 게이트에서 마수들과 대치해야 했고 언제 죽을지 몰랐기에 위험한 건 똑같았다. 지금은 그저 가이드로 각성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