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갑작스러운 현태운의 파장에 서둘러 주변을 살펴봤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살피며 이동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현태운의 파장이 약해졌다.
그런데 센터에 도착해 안면 있는 경비원과 인사를 나누고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현태운의 파장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아 살짝 짜증이 일었다. 나를 쫓아오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현태운의 파장을 찾았다. 현태운은 아무도 없는 훈련실 층으로 이동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어디 있다가 온 거예요?”
나타나자마자 어디 있다가 온 거냐고 추궁하는 태운의 모습에 역시 세현과 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말해야 하죠?”
내내 숨어 있다가 내가 혼자가 되자 모습을 드러내다니,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현태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신의 씨 몸이 정부 쪽 사람의 파장에 휩싸여 있어요.”
“그래서요?”
“혹시 어제 그 사람이랑 있었어요?”
솔직하게 말해야 현태운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차세현 씨네서 잤어요.”
“왜 그 사람네 집에서 잤어요? 서로 집에 머물 정도로 친하지 않잖아요.”
“저희 친해요. 친하니까 같이 잘 수도 있죠.”
“신의 씨, 조금만 더 신중하고 몸을 소중히 여겨 주세요. 각인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해요.”
태운은 나와 세현이 성적 접촉을 하지 않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책에서 에스퍼는 가이드가 각인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현태운 씨, 당신이 내 애인이에요? 적당히 간섭해요. 귀찮게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긴 한가요? 이러니까 내가 당신을 싫어하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신의 씨 마음을 얻을 수 있어요?”
“평생 얻을 수 없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싫어요?”
나는 답하지 않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러자 태운의 얼굴 근육이 떨리더니 더욱더 굳어졌다.
“왜 제가 싫은 거예요? 신의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운명이라고 생각해서 협회로 데려온 거예요. 저 신의 씨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현태운 씨는 S급이라면 모두 운명 같겠죠.”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태운은 나를 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애쓴다고 생각했지만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
“신의 씨,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신의 씨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에요.”
“왜요? S급이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좋게 봐줄 거 같아요?”
내 말에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입술로 말을 이었다.
“신의 씨를 좋아하니까요.”
태운은 어느새 귀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울상이었다. 그의 말이 지금은 진심같이 느껴졌지만, 연기를 잘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신의 씨, 저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 주세요.”
태운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더는 속고 싶지 않아 손을 쳐 내며 말했다.
“제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요.”
“미안해요…. 그리고 저, 신의 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 계속 하고 싶었는데,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또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뜸을 들이는지 태운을 빤히 바라봤다.
“저 사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요.”
내 말에도 태운은 여전히 입만 달싹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답답하기만 했다.
“할 말 없으면 들어가도 될까요?”
내가 들어가려고 하자 태운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신의 씨는 예전에 제 전담이었어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훈련실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현태운의 말에 몸을 멈췄다. 그러자 태운이 계속 말을 이었다.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저랑 신의 씨가 함께 살았고 신의 씨가 절 많이 좋아해 줬었어요.”
계속 생각하던 일이 있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면 혹시 현태운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 그 상상이,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그건 언제부터 알았어요?”
나도 모르게 현태운에게 되물었다. 그와의 지난날들이 떠오르며 머릿속이 빠르게 엉켰다.
“2달 전에요.”
2달 전이면…. 불현듯 현태운이 울면서 나를 찾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나를 향한 그의 행동이 조심스러워졌었다.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미래에서 왔어요. 미래의 저는 신의 씨한테 아주 못되고 나쁜 사람이어서 지금 벌 받는 걸지도 몰라요.”
“…….”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을 보면 현태운도 충분히 돌아올 수 있었고 지금의 말들을 들어 보면 그도 회귀한 거 같았다.
“이제는 신의 씨한테 잘하면서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어요.”
태운의 마지막 말에 생각을 멈췄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현태운이었지만, 그와 행복을 바랐던 나는 이미 죽어 버렸다.
“이제 와서…?”
“네, 지금이라도요.”
나는 태운의 눈을 차가운 눈으로 마주하며 바라봤다. 현태운이 어떻게 과거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고 두 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늦었어.”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럼 죽기 전에 잘해 주지 그랬어?”
그래, 현태운은 내가 죽기 전에 잘해 줬어야 했다. 하다못해 내가 죽을 때라도 나를 버리고 가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나보다 먼저 돌아왔든, 늦게 돌아왔든 이제 내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말에 태운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그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믿을 수 없단 얼굴이었다.
“…혹시 신의 씨도 돌아온 거예요?”
그는 의문과 당황이 어린 기색으로 나를 바라봤다.
“신의 씨.”
“이제 알았으면 씨 붙이지 말지? 예전처럼 반말해.”
회귀한 것을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현태운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고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내 말에 현태운의 눈이 다시 눈물로 가득 찼다. 결국 그는 고개를 내렸다.
“너, 어떻게 과거로 돌아왔어?”
지금은 현태운이 우는 것보다도 그가 어떻게 돌아왔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죽어서 과거로 돌아왔으니 현태운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신의 네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어….”
“너 나 안 좋아했잖아. 그대로 버려 놓고 갔으면서. 내가 S급이 되니까 마음이 달라졌어?”
과거로 돌아오기 전 내게 야멸차게 행동하던 현태운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놓고 간 거 아니야. 치유계 에스퍼를 데려오려고 했어.”
“내가 같이 있어 달라고 말했잖아!”
“미안해. 미안해, 신의야.”
지난날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며 내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의 내가 너무나도 불쌍해서.
“신의야, 내, 내가 잘못했어.”
현태운은 그대로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제발…. 내가 정말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줘….”
“놔.”
현태운은 나도 과거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패닉에 빠진 듯했다. 긴장이 서린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고, 쉴 새 없이 떨리는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가서… 혼자 놓고 가서 미안해.”
“너 이러는 거 이상해.”
내 기억 속의 현태운은 늘 냉정하고 매정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이렇게 변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너랑 나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그냥 전속이었을 뿐인데 갑자기 왜 이래?”
“내가 바보라서…. 자존심 때문에 너를 괴롭혔어.”
“너 갑자기 이러는 거 이상하다고. 내가 이제 S급이 돼서 그래?”
나의 등급이 올라간 것 말고는 회귀 전과 달라진 점이 없어, 그가 변화한 이유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예전부터 좋아했어.”
“거짓말하지 마. 너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래?”
“너무 어려서 신의 너한테 못되게 굴었어. 미안해.”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예전에 현태운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내게 용서를 비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 모습을 보니 하나도 통쾌하지 않고 오히려 불쾌했다.
“신의야….”
“너 이러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솔직히 만나고 싶지도 않았어.”
“너 나 좋아했었잖아. 그 마음은 이제 조금도 없는 거야?”
태운의 목소리는 쉴 새 없이 떨렸다.
“네가 뭘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나는 너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어.”
현태운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태운이 나를 더 미워하게 될까 봐 늘 속으로 삼켰었다.
“알아. 그래도 네가 날 자기 자신보다 아껴 줬다는 건 알아.”
“그래. 그래서 죽었지.”
현태운을 좋아했던 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죽으면서 현태운을 향한 내 마음과 몸 또한 죽어 버렸다.
“현태운.”
“응?”
“나 너 안 좋아해. 이렇게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싫어.”
“왜…?”
“널 구하려다 죽었어. 죽으면서… 몸도 마음도 감정도 다 죽었어. 너 때문에.”
내 말에 태운은 결국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너무나도 서럽게 우는 모습에서 나를 향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알았으면 더는 다가오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가이드 훈련실로 들어왔다. 어떻게 태운이 과거로 돌아왔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멍하고 꿈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현태운과의 관계가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를 좋아했던 마음에 이젠 증오감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