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입 안으로 들어오는 성요한의 혀를 물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끈질기게 파고들며 입 천장을 긁고 치열을 훑었다. 그의 혀가 내 입 안을 헤집을 때마다 피가 퍼지며 쇠 맛이 났다.
“성요한 씨, 그만해요…!”
가이딩이 되기는커녕, 저번과 같이 그에게 억지로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성요한을 제지했지만, 주변에 배리어가 쳐진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폭발음과 함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몸을 억누르던 성요한이 떨어져 나가자, 나는 서둘러 몸을 추스르며 주변을 봤다. 불타는 문과 함께 현태운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하는 거야.”
현태운이 정색한 얼굴로 성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이딩 중이잖아.”
성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내 모습은 그에게 겁탈당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옷은 다 뜯겨 나가고 입술은 부풀어 올라 있었다.
현태운이 내 모습을 보더니 서둘러 내 쪽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성요한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수치심도 없는지 웃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가이딩하다 말았는데, 나가 줄래?”
성요한의 말에 현태운이 그에게 다가갔다.
“정도껏 해. 신의 씨가 싫어하잖아.”
“이게 가이드의 일이야. 그리고 나랑 신의 씨는 페어고,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그 말에 현태운이 성요한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으나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가 잘되었는지 성요한이 이만 물러간다는 듯 두 손을 낮게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신의 씨, 집에서 봐요.”
성요한이 가고 현태운이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성요한이 쉽게 떠나는 모습이 믿기지 않아 현태운에게 물었다.
“뭐라고 말한 거야?”
“가라고 했어. 몸은 괜찮아?”
성요한이 가라고 해서 갈 사람은 아닌 거 같지만, 지금은 순순히 물러나 준 것에 안심했다.
“지금까지 성요한한테 이런 취급 당한 거야?”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는 성요한이 무서웠다. 성요한은 에스퍼였고, 그의 말대로 그가 나에게 각인한다면 나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현태운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성요한이 하고 싶었던 대로 되었을 것이다.
“오늘은 의무실에서 쉬는 게 좋을 거 같다.”
현태운은 내 옷을 추슬러 주며 말했지만, 그 모습에 나는 현태운이 어떻게 내가 성요한한테 겁탈당할 뻔한 걸 알고 왔는지 궁금해졌다.
“너 지금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네 파장이 평소와 달리 날카로워서.”
현태운의 말에 그 또한 내 파장을 느낄 수 있단 걸 알았다. 아무래도 매칭률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을 끝으로 더는 우리 사이에 말이 없었다.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한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가이딩실에서 나가기 전 현태운이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런 나를 현태운의 파장이 쫓아오는 걸 느꼈지만, 오늘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
현태운이 어떻게 나처럼 과거로 돌아왔는지도, 왜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가이딩을 해 준 날 이후로 현태운은 내 마음을 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도 내가 회귀 전 기억이 있는 걸 알아서 그런지 예전에 비해서 다가오는 횟수가 많아졌다.
내가 01S팀 전용실에서 놀고 있으면 꼭 찾아왔고, 평생 해 본 적 없을 거 같은 커피, 디저트 조공까지 했다.
심지어 현태운은 내 커피뿐만 아니라 팀원들 커피까지 사 왔다. 팀원들도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현태운의 모습에 놀란 거 같았다.
내 기억 속의 현태운은 팀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매번 싸웠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법 원만한 사이로 보였다.
“신의 가이드님 오시고 나서부터 현태운 에스퍼 매번 팀 전용실 오는 거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팀 전용실에 있을 때마다 노골적으로 오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현태운 에스퍼 저런 모습 처음 봐요. 서로 매칭률도 높은데 한번 페어 해 보는 건 어떠세요?”
민성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내심 민성의 제안에 살짝 놀랐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매번 현태운의 전담을 끊으라고 말했던 그였다.
“저는 페어 시스템이 잘 안 맞는 거 같아요.”
“그렇다면 아쉽네요. 사실 현태운 에스퍼랑 페어가 되시면 가이드님이 저희 팀에 들어올 수 있을 거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성요한의 이번 행동으로 나는 협회에 페어 해지를 통보했고, 05R팀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소속 팀이 없는 상황이고, 가족 같은 팀원들과 쌓았던 추억을 생각하면 나도 다시 01S팀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이 매번 바뀌었다. 01S팀 팀원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협회에 남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 다 때려치우고 퇴사해 버리고 싶기도 했다. 매번 퇴사를 결심하면서도 아직 협회에 남아 있는 처지라, 계속 이렇듯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스스로가 더욱 줏대 없게 느껴졌다.
“지금은 팀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서요. 나중에라도 다른 팀에 들어가게 된다면 01S팀으로 올게요.”
“정말이죠? 약속하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퇴근할 시간이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팀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오자, 금세 현태운이 쫓아왔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필요 없어.”
가까이 다가오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현태운은, 그와 내가 둘 다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서슴없이 다가오고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너, 너무 노골적으로 행동하지 마.”
“내가 노골적이었어?”
“응. 계속 내 얼굴만 봤잖아.”
“이때 아니면 못 보니까.”
현태운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거 같았다.
“너 갑자기 왜 그래? 정말 나 좋아하는 거야?”
“응.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내가 S급 가이드 됐다고 수작 부리는 거면 그만둬.”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밉겠지만, 조금이라도 믿어 줬으면 좋겠어.”
현태운의 얼굴을 보자 거짓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현태운이 내게 이렇게까지 필사적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내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 용서할 생각 없어.”
“알아. 사과 받아들여 달라는 게 아니야. 그저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용서를 구하게 해 줘.”
나는 더는 태운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원재의 훈련실로 이동했다. 태운은 그런 내 뒤를 여전히 쫓아왔지만, 어느 순간 파장이 사라졌다.
***
해가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설날이었다.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안 오셨기에 나와 원재는 함께 떡국을 만들어 먹었다.
가족이 있었더라면 본가에서 설을 쇠었겠지만, 우리 둘 다 혼자 남았기에 함께 보내게 되었다.
“원재야, 너네 부모님 어디 계신다고 하셨지?”
“92구역에요.”
92구역이면 우리 어머니가 안치된 묘원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뵈러 갔다 올까? 우리 어머니도 그쪽 구역이랑 가까운 곳에 계시거든.”
“정말요?”
“응. 이렇게 집에만 있기도 답답하잖아.”
내 말에 원재는 오랜만에 부모님도 뵙고 싶고 우리 어머니의 성묘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나와 원재는 마트에서 간단하게 술과 과일, 북어포를 사서 성묘하러 갔다.
원재는 반년 만에 부모님을 뵈어서 그런지 묘에 도착하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 모습에 나 또한 울컥했지만, 원재를 다독이며 함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계신 묘원으로 이동했다.
원재는 우리 어머니께 할 말이 많았는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묘 앞에서 이야기했다. 나 또한 그 모습을 보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확인하고 원재와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묘원에서 나왔다.
집까지는 1시간 넘게 걸렸기에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장시간 외출을 해서인지 살짝 피곤했다. 원재도 피곤한 얼굴로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씻고 바로 자자.”
“네.”
코트를 벗고 안으로 들어오는데, 거실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성요한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파장이 느껴지지 않아 성요한이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성요한은 파장을 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쭉 돋았다.
“당신 뭐야?”
“제가 집을 너무 길게 비웠죠?”
한동안 성요한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 기회에 그의 방을 완전히 없애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타나니 당황스러웠다.
“왜 다시 온 거예요?”
“설날인데 신의 씨 얼굴은 봐야죠.”
나는 성요한 얼굴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인상을 쓴 채 보자, 성요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얼굴을 보니 제가 불청객 같군요?”
“알았으면 나가세요.”
내 말에 성요한이 몸을 일으키더니 원래 사용하던 방으로 이동했다.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가이딩했던 날 그가 원재를 가지고 협박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결국 나가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형, 이대로 내버려 둘 거예요?”
“지금은 내버려 두자. 오늘 나갔다가 와서 피곤하잖아.”
“성요한이 여기 있는 게 더 피곤해요.”
“그럼 호텔로 다시 가자.”
원재는 지금 당장이라도 성요한을 내보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결국 호텔로 이동했다.
이날 이후로 성요한은 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일로 바쁜지 내게 접촉하지도 않았다.
슬슬 가이딩해 달라고 할 거 같았는데, 그럼 낌새조차 보이지 않으니 불길하기만 했다. 그래도 아무 짓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