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대격변 3
인사과에서 여러 공방이 오갔지만, 애초에 비각성자나 다름없는 가이드를 향해 힘을 개방한 채 위협한 에스퍼의 잘못이 더 컸기에 다행히 별다른 징계를 받진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을 포함해 싸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가이드와 힐러들은 이 교육에 포함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각성자 관리팀 부장은 가차 없이 던전 공략팀 전원에게 지루한 교육이라는 형벌을 내렸다.
원래도 그런 사람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공정한 인간이었다.
‘……정작 여기에 있어야 할 인간은 병동에서 쉬고 있을 텐데…… 억울해.’
제 성질 이기지 못하고 흥분해 한지수를 겁박했던 에스퍼는 손바닥보다 작은 반려 몬스터에게 두드려 맞고 길드 내 의료 시설에 입원한 상태라 이 페널티 교육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한지수가 울컥울컥 치솟는 억울함을 꾹꾹 억누르는 와중에 교육 관리자는 참석자 명단에 ‘강의 참여도’ 항목을 펜으로 하나하나 표시하며 말했다.
“10분간 쉬고, 2부는 강사님과 함께 ‘각성자 차별 예방 교육’ 시작하겠습니다. 늦지 않게 돌아오세요.”
예예~ 하고 적당히 대답한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몇몇은 담배나 화장실 등 용무를 보러 나갔고, 나머지 인원은 자리에 엎드리거나, 강의실에 딸린 탕비실로 가 커피 믹스나 현미 녹차 티백을 뜯었다.
한지수는 1층 카페에서 텀블러에 받아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후, 책상에 올려 둔 크로스백을 슬그머니 열었다.
가방에 깔아 둔 보송보송한 수건 위에 대자로 뻗어 잠든 제 반려몬 골든 햄스터가 보였다. 손가락으로 햄스터의 토실토실한 배를 조심스레 쿡- 찔러 봤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쿡-
“뀨우우…… 퓨우우우…….”
쿡쿡-
“쀼우우…….”
세상모르고 잠든 것을 보니, 적어도 서너 시간은 깨지 않을 것 같았다.
지루한 교육 시간 동안 얌전히 잘 자는 효자 반려몬 덕분에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조용히 가방을 닫은 지수가 강재윤의 손목 스마트 워치를 보며 물었다.
“형, 게이지 봐도 돼?”
“새삼스레 뭘 물어?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봐.”
아무래도 단둘이 가이딩실에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있는 공간이다 보니, 수치 노출이나 그 외 여러 에스퍼들이 신경 쓰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강재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지수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액정에 팝업된 숫자는 27%이었다. 에스퍼 폭주 게이지 수치를 확인한 지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강재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깍지 껴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막 던전 클리어했는데, 피곤하지 않아?”
“이 정도는 괜찮아. 어차피 오프고. 근데, 형이야말로 공략 확정됐다며? 지역은?”
“부산 태종대 부근. 측정 불가인 걸 봐서는 공략하는데 며칠 걸릴 것 같아.”
“……측정 불가…….”
하필 측정 불가 등급이라는 말에 지수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측정 불가 상태의 던전은 공략팀이 입장했을 때 어떤 변수가 생길지 예측할 수 없는 던전이었다.
막 생성된 던전의 지형이나 특성을 파악하는 시스템이 개발된 지 벌써 2년 반이 넘었지만, 현재 기술로 측정할 수 없는 던전도 소수 존재했다.
일반적인 던전은 측정할 경우 등급이 표기되며 해당 등급의 측정이 적중할 확률이 95% 이상으로 안정적인 편이었다. 문제는 측정 불가 던전이었다. 이 던전은 측정할 때마다 등급이 다르게 측정되거나 또는 아예 표기되지 않았다.
이런 측정 불가 던전의 가장 위험한 부분은 초반 등급이 계속 C~E등급 사이로 랜덤하게 측정되다가, 공략팀이 입장하자마자 갑자기 A급 던전으로 변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매우 드물게 보스 몬스터를 찾지 못해 공략을 실패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사고가 잦아지자, 재작년부터 각성자 협회에서는 측정 불가 던전 공략팀 구성 시 S급 각성자를 필수로 한 명은 꼭 넣도록 규정을 신설했다. 수많은 하위 공략팀의 희생 끝에 안전 규정이 생긴 셈이었다.
“……인벤에 비상식량 꽉 채워 가. 귀환석 받는 거 잊지 말고.”
“하하, 이미 많…… 응, 알았어. 걱정하지 마. 더 챙길게.”
이미 많다는 말에 지수가 흘겨보자 무서운 것도 없으면서 움츠러든 척한 강재윤이 사람 좋은 얼굴로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리고 입장 전에 꼭 수치 0%로 만들어.”
“우리 지수 봐서라도 꼭 0%로 맞춰야겠네.”
평소처럼 다정하고도 장난스러운 말투에 지수가 재차 강조하며 말했다.
“농담 아니라, 진짜로. 꼭 0%까지 내리고 들어가. 나도 최대한 노력해 볼 테니까…….”
“응. 그럴게. 지수가 노력해 주는 것도 기대되네.”
지수는 마지막 말은 은근히 못 들은 척했다. 괜히 여기서 얼굴 붉히며 대꾸하다 놀림받는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고 가이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B급 가이드인 한지수와 S급 에스퍼인 강재윤의 상성은 38%로, 엄밀히 말해 매칭률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가이딩은 정신적인 부분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 행위였다.
이는 에스퍼와 가이드가 서로를 신뢰하는 정도에 따라, 또는 서로 신체적인 접촉을 하는 범위에 따라 효율이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대격변 전부터 오래 알고 지낸 두 사람은 매칭 대비 최상의 성과를 내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짧은 휴식 시간 동안 지수는 강재윤의 폭주 수치를 1.5% 줄이는 데 성공했다.
가이딩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라면 고작 1.5%가 무슨 최상의 성과냐고 할 수 있는 수치였다. 하지만 집중하기 어려운 주변 환경과 1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가이딩 시간, 그리고 두 사람의 매칭률을 고려해 보면 굉장한 결과였다.
한지수 역시 수치보단 이런 환경적 요인을 종합해 고려했을 때 나쁘지 않은 결과라 판단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10분 좀 덜한 것 치고는 나름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 고마워, 지수야.”
부드럽고도 다정한 대답을 들은 지수의 얼굴에 웃음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곤 솔직한 칭찬에 조금 우쭐해진 기분으로 턱을 살짝 들고 말했다.
“오늘 형만 시간 괜찮으면 종일 해 줄 수도 있어.”
“그럼 정말 고맙지. 마침 오늘 일정도 없어. 같이 저녁 먹자.”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아니, 잠깐. 아까 스케줄러에서 형 이름 본 것 같은데?”
“하하, 그래? 이상하네. 오늘 다른 일정은 없을 텐데?”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한 재윤이 깍지 낀 손 말고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집었다.
일정을 확인하나 했는데, 지수에게 화면이 보이지 않는 각도로 기울여 액정을 연신 톡톡 두드리는 걸 보니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잠깐. 이 형 설마 일정 취소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지수가 화면을 본 건 아니라 물증은 없었지만, 그간 강재윤의 행적을 떠올려 보면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지수의 의심대로 강재윤은 페널티 강의가 끝나고 있을 중요 회의에 ‘긴급한 용무로 불참’ 항목을 체크하고, 일정을 삭제했다. 옆에서 지수가 입술을 앙다물고, 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든 말든 기분 좋은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뭐 먹고 싶어? 형이 예약해 둘게.”
“……그냥 매운 거만 빼고, 토토랑 같이 갈 수 있는 식당이면 돼.”
몬스터 테이밍 스킬이나 아이템 덕분에 반려 몬스터 문화가 자리 잡은 지 벌써 3년이나 됐지만, 여전히 반려 몬스터와 동반 입장 가능한 식당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강재윤은 한지수 한정으로 분리 불안과 집착증을 보이는 햄스터가 잠든 가방에 시선을 두고 물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부산으로 갈래?”
“그래도 돼?”
“안 될 게 뭐 있어? 잘됐네. 같이 가자. 오랜만에 지수가 좋아하는 바다도 보고, 형 공략할 동안 토토랑 호텔에서 푹 쉬다가 먼저 올라가.”
“……어차피 나야 내일부터 이틀간 오프긴 한데…….”
던전 등급이나 난이도에 따라 다르지만, 던전을 클리어할 경우 통상 하루나 이틀 휴일이 주어지는 것은 평화 길드 복지 중 하나였다.
지수의 경우 금일 페널티 교육 때문에 길드로 출근했지만, 내일부터 이틀간 오프가 자동으로 등록된 상태였기에 저 제안이 꽤 솔깃했다. 그래도 여전히 걸리는 부분은 있었다.
“난 괜찮은데…… 형. 진짜 오늘 스케줄 없는 거 맞아?”
“응, 없어.”
“…….”
조금 전까진 있었는데, 없앴다는 부분은 쏙 빼고 대답했지만, 그간 전적 탓인지 한지수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형, 오늘 중요한 스케줄 있는 거면…….”
지수가 혹시 자신 때문에 다른 일정을 빼는 거면 그러지 말라고 말하려는 찰나, 교육 담당자가 외부 강사와 함께 들어왔다.
덕분에 강재윤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앞을 보고 앉았다. 그 반응을 본 지수는 그가 분명 오늘 스케줄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취소해도 딱히 중요한 일정이 아니니까 취소했겠지, 싶어 추궁하는 것을 관뒀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한 지수는 여전히 재윤의 손을 맞잡은 채 앞을 바라봤다. 새로 들어온 강사가 강의 내용을 설명하며 간단히 인사하는 시간을 가지는 동안에도 지수는 여전히 가이딩을 이어 나갔다.
페널티 강의 내용이야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앞을 보고 집중하는 척만 하면 그만이었다. 페널티 대상자가 아니라 감독 참관인 강재윤 역시 앞을 보면서 깍지 껴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