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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9화 (9/172)

#008.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것 2

모처럼 그리스까지 왔으면서 아픈 막내 때문에 남겠다는 다른 멤버들은 다 내보냈지만, 리더인 강재윤만큼은 자리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내보낼 수 없었다.

결국 다른 멤버들만 놀러 나가고 재윤은 종일 지수의 곁에서 병간호를 했었다. 지수는 어젯밤 꿈에서 희미하게 본 산토리니의 풍경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어제 꿈에 나왔어. 우리가 촬영한 장소 같긴 한데, 안개가 낀 것처럼 잘 보이지 않더라고. 그래서…… 다시 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 분명 좋을 거야.”

재윤은 다시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지수의 말에 망설임 없이 긍정하며 확신했다. 분명 좋을 거라고.

지수 역시 그럴 것 같았다. 어젠 헬기에서 눈물을 찔끔 보이긴 했지만, 어쩌면 이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걸음이 될 것 같았다.

출처 없는 자신감과 긍정적인 기운이 샘솟았다. 대격변 이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대격변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생일이 기대됐다.

지수는 제가 이렇게까지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건 그동안 쭉 곁에 있어 준 강재윤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저 역시 재윤에게 무언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형, 나도 형한테…….”

지이잉-

“……지수야. 잠시만. 이건 받아야겠다.”

“아, 응.”

갑자기 울린 휴대폰 때문에 말하지 못했지만, 던전 공략은 내일 아침이었으니 딱히 상관은 없었다. 물어볼 시간은 많았다. 형은 뭐가 갖고 싶은지, 어디에 가고 싶은지, 내게 바라는 건 없는지 등등 말이다.

강재윤이 잠시 테라스로 나가 통화하는 동안 지수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직도 커어어 잠든 토토의 배를 쓰다듬었다.

“토토야. 밤새 혼자 뛰어다녔어? 왜 이렇게 실신했어?”

“쮸우우우…… 퓨우우우…….”

몇 분 동안 요상한 소리를 내며 자는 토토를 연신 쓰다듬고 있자, 통화를 마친 재윤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지수는 설마 등급 외 던전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어 벌떡 일어나 물었다.

“무슨 일이야? 던전에 문제라도 생겼어?”

“아니. 이쪽은 괜찮아. 오늘 새벽에 용인 쪽에 게이트 균열이 하나 더 생겼거든.”

“……그래서 일찍 일어난 거야?”

“응. 용인 쪽은 측정 중인데 S급일 확률이 높아서 이쪽 던전을 오늘 진입하기로 했어.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나와서 올라가야 할 것 같네.”

“……공략팀 다른 멤버는? 여기 도착했대?”

“적어도 1시간 내에는 전원 도착 예정이니 걱정할 거 없어. 이쪽이 문제가 아니라 용인이 문제지.”

“…….”

“지수야. 형이 있는데 뭘 걱정해. 최대한 금방 끝내고 나올게.”

강재윤은 연신 지수를 안심시키며 달랬다.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토토도 부스스 일어나 앉아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쮜이…….” 울었다.

재윤은 꾸싯꾸싯 앞발로 열심히 세수하는 토토를 흘긋 보곤 지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미안. 오랜만에 휴일 겹쳤는데, 이렇게 되네.”

“뭐가 미안해, 신경 쓰지 말고 던전이나 잘 다녀와. 등급 낮아도 무조건 조심 또 조심하고……. 아 잠깐. 형 수치!”

지수가 바로 재윤의 손목을 당겨 워치를 확인했다. 어제 따로 잠들기 직전까지 틈나는 대로 열심히 가이딩한 결과 현재 수치는 11%였다.

“……어제 그냥 같이 잘걸. 아직 시간 좀 있지? 가이딩 더 받고 가.”

“그래. 그럴게.”

사실 지금 바로 가서 현장에 나온 관계자들과 브리핑을 해야 했지만, 강재윤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한지수를 안심시키는 거였기에 시키는 대로 얌전히 침대에 누워 팔을 벌렸다.

망설임 없이 강재윤의 품에 와락 안긴 한지수는 그의 넓은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곤 조금씩 꼼지락거리며 편한 자세로 그를 마주 안고 가이딩에 집중하려 했지만, 어째 잘되지 않았다.

1%라도 좋으니 수치를 더 감소시켰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그저 강재윤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제 곁에 있길 바랐다. 토토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가이딩받던 재윤은 걱정스러워서 그런지 도통 집중하지 못하는 지수의 등을 보듬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지수야.”

“…….”

“지수야?”

“……부르지 마. 나 집중해야 해.”

“그럼 말하지 말고 그냥 들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안심하라고 하는 말 아냐. 알잖아. 형 강한 거.”

“…….”

“지금 형 걱정은 하나야.”

“……뭔데…….”

집중하겠다고 해 놓고 결국 대답해 버린 지수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재윤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생일에 날짜 못 빼서 무단결근하고 여행 갈까 봐.”

“……그럼 안 되지.”

“하하. 최대한 협상 잘해 볼게.”

“……풉…….”

재윤의 농담 때문에 결국 집중에 실패한 지수가 작게 실소했다. 하지만 아직 약간의 시간이 더 있으니, 이제 정말 조용히 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다시 가이딩에 집중했다.

* * *

어떻게든 수치를 떨어뜨리겠다는 집념 덕분인지, 2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지수는 최종 수치를 7%까지 떨어뜨리는 성과를 냈다.

“……으음, 조금만 더 하면 좋을 텐데…….”

아쉬움 가득한 한탄을 들은 재윤은 코트를 입으며 말했다.

“현장 가서 브리핑하는 동안 방사 가이딩도 받을 거니까 이만하면 충분해. 토토랑 푹 쉬다 가.”

“……어. 아, 맞다. 형. 내가 준 식량 키트 전부 챙겼지?”

“10년은 거뜬할 만큼 챙겼어.”

재윤은 지수가 안심할 수 있도록 어제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큰 아이템 시장에 들러 인벤토리에 꽤 많은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

사실 10년은 오버였지만, 지수가 직접 사 준 비상식량 키트만 해도 4년 6개월 정도는 버틸 수준이었으니, 원래 가지고 있던 키트까지 합치면 5년은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인벤토리를 채운 건 식량뿐만이 아니었다. 지수는 제 연봉의 40%에 가까운 돈을 가이딩 포션을 구매하는 데 썼다. 온갖 종류의 값비싼 포션은 당연하게도 재윤의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강재윤은 길드에서 지급한 가이딩 포션을 이미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등급 측정 불가 던전에 지수가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또 지수가 이런 강박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 잘 알기에 순순히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혼자 국가를 하나 박살 내러 간다고 해도 믿을 만큼 든든한 인벤토리가 생겨 버렸다. 어제의 폭풍 같은 쇼핑을 떠올린 재윤이 실소를 삼킨 것도 모르는 지수가 몇 번이고 강조한 말을 또 했다.

“첫째도 둘째도 안전, 죽은 몬스터도 다시 보고.”

“응. 꼭 그럴게.”

“아, 잠시만. 내 귀환석 하나 줄게. 여분으로 챙겨 가. 예전에 형이 준 거긴 한데, 그래도 일단 챙겨.”

지수는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귀환석을 꺼내려 했지만, 재윤이 손목을 부드럽게 잡는 바람에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정말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수야, 형 귀환석 많아. 걱정하지 마.”

“…….”

“늦을 것 같으니 이젠 정말 가야겠다.”

“…….”

한지수가 못내 걱정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바라보자, 강재윤은 조심스레 지수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이마에 쪽 키스해 준 후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지수야. 형 금방 다녀올게. 토토랑 재미있게 놀고. 그럼 다녀와서 보자.”

“……응……. 먼저 서울 가서 기다릴게.”

“그래.”

* * *

강재윤이 떠난 후 한지수는 토토와 아침 식사로 간단히 룸서비스를 시켜 먹고 목욕을 했다.

보통 햄스터라면 물에 들어가선 안 되겠지만, 토토가 워낙 물놀이를 좋아하는 데다가 S급 몬스터라 그런지 물에 빠져도 끄떡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고무 오리를 타고 신난 토토 덕분에, 온몸이 붉어질 정도로 장시간 욕조에 늘어져 있던 지수는, 욕실을 나와 열기를 식히며 TV를 켰다. 채널을 돌릴 것도 없이 바로 던전을 취재 중인 기자가 보였다.

-……~까지 대피를 마쳤습니다. 또한 조금 전 새로 측정된 등급은 F등급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균열 발견 직후 측정된 등급은 모두 F, E, D로 다소 낮은 등급이었으며, 전문가들은 최대 B등급 이상의 이변은 없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방송국 드론이 촬영한 영상 속 이글거리는 게이트는 연두색이었다. 최하위 등급 던전 게이트들이 주로 녹색이나 연두색 빛을 띠곤 했지만, 등급 측정 불가 게이트는 들어갈 때까지 그 등급을 알 수 없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토토 역시 TV를 보고 있었는데, 카메라 화면이 조금 옆으로 이동해 한구석을 확대하자 눈이 커졌다. 화면에 잡힌 헌칠한 남자는 아까 아침까지만 해도 이 방에 있던 강재윤이었다.

“쮯!”

강재윤을 알아보고 반갑게 운 토토가 일순 흠칫하더니 고개를 핏 돌리며 딴짓을 했다. 강재윤이 늘 잘해 주는데도 왜 이렇게 새침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한지수의 추측일 뿐이지만, 어쩌면 가이딩이 격해질 경우 강재윤이 제 집사를 괴롭힌다고 생각해 그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뭐든 토토의 이런 반응 하나하나가 전부 다 귀여워 피식 웃은 지수가 토실토실한 몸을 보듬으며 화면을 봤다.

-이번 측정 불가 던전 공략팀의 리더는 평화 길드 브라보 팀 리더 강재윤 에스퍼입니다. 강재윤 에스퍼는 작년 세계 에스퍼 랭킹전에서 개인 사정으로 기권해 종합 성적 9위에 그쳤으나, 염력계 에스퍼 중에서는 1위를 차지했으며…….

강재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동안, 그가 방송국 드론을 발견하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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