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달콤한 꿈 11
[‘후원자’ 안식의 신이 한지수를 바라봅니다]
해당 메시지 창이 사라졌지만, 이번엔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후원자와의 대화에 그새 익숙해진 지수는 재촉하는 대신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신규 메시지가 떠올랐다.
[‘후원자’ 안식의 신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움과 달리 슬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하게 흐려진다고 장담합니다]
“……응…… 그렇구나…….”
지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안식의 신의 답을 곱씹으며 심호흡했다.
듣고 보니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듯싶었다. 다만 제 경우엔 시간이 지나도 슬픔이 가시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격변으로부터 5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러비스 형들과 제 가족의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떠올리면 슬프고 괴롭고 여전히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리워서 언급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5년이 지났어도 이러는 걸 보면 아마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의기소침해졌지만, 이 부분은 지금 당장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 내린 지수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후우…… 그럼…… 이제 다 울었으니, 할 일을 하러 돌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해?”
[‘후원자’ 안식의 신이 그냥 조금 더 있다 가는 건 어떻겠냐고 권유합니다]
“……왜?”
예상치 못한 대답에 지수가 대놓고 미심쩍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자, 이번에도 제법 빠르게 메시지가 왔다.
[‘후원자’ 안식의 신이 자신은 매우 바쁜 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가롭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아마 앞으로 없을 거라며 궁금한 게 있으면 이참에 다 물어보라고 합니다]
“……아니, 근데 질문하면 뭐 하냐. 내가 궁금한 건 다 무슨무슨 법 때문에 대답 못 해 준다며? 그리고 슬슬 토토 밥도 주고 해야지. 현실에서 시간은 얼마나 지났어?”
[‘후원자’ 안식의 신이 현실은 지금 1월 24일이라고 합니다]
“……뭐? 24일!? 벌써 그렇게 지났다고!?”
지수는 자신의 기억대로라면 성하진의 품에 안겨 병원에 온 게 19일쯤이라는 것을 상기하곤 경악했다.
“그럼 지금 토토는!?”
[‘후원자’ 안식의 신이 한지수는 입원한 상태이며, 토토는 지금 다른 인간이 잘 챙기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인간이라면 성하진 에스퍼?”
[‘후원자’ 안식의 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지수는 “토토가 성하진을 그나마 잘 따르니 그럼 다행이긴 한데…….” 중얼거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겨 눈을 크게 뜨고 허공을 향해 외쳤다.
“안식!”
[‘후원자’ 안식의 신이 한지수를 바라봅니다]
“궁금한 거 생겼어! 성하진 에스퍼 말인데, 혹시 정하진 에스퍼야?”
[‘후원자’ 안식의 신이 그]
“그?”
지수가 갸웃한 순간, 창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메시지가 팝업됐다.
[‘후원자’ 안식의 신이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왜 자기에게 묻는 거냐며 어이없어합니다]
“……아니라곤 안 하네?”
[‘후원자’ 안식의 신이 그런 개인적인 궁금증은 본인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알아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
뚱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지수는 맞는 말이라며 납득했다. 그리곤 타인의 정보를 편법을 써서 들으려 했던 게 조금 부끄러워져서 괜히 덧붙였다.
“아니, 그냥…… 좀 긴가민가한데,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1분 1초가 귀한 쓰급이 왜 나한테 붙어 있겠어? 근데 또 보면 묘하게 비슷한 것 같단 말이야……. 물어봤는데, 만약 아니라고 하면 쪽팔려서 죽을지도 몰라.”
[‘후원자’ 안식의 신이 자신은 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그 모든 세월 중 쪽팔려서 죽은 인간은 본 적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휴, 말을 말자. 그래도 슬슬 일어나야겠어. 너무 오래 잠들면 우리 토토가 걱정 많이 할 거야.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하면 돼?”
재차 물었지만, 이번엔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답이 없어 한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식. 혹시 내가 여기에 더 있었으면 좋겠어?”
[‘후원자’ 안식의 신이 그렇다고 합니다]
“……왜?”
[‘후원자’ 안식의 신이 현재 한지수는 뇌수면 치료 상태이므로 오래 잘수록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를 하나 더 굳이 붙여 보자면, 자신이 새로 피후견인을 들인 게 오랜만이라 조금 더 한지수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합니다]
“…….”
대답을 읽은 지수는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흐렸다. 저 말만 두고 보면 피후견인에게 관심이 많은 신처럼 보이지만, 뭔가 영 찜찜했다. 평소 다른 각성자들이 자신의 후원자와 있던 일을 들려줬던 것만 떠올려 봐도 그들은 피후견인과 이렇게 오래 말을 주고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보통 많으면 서너 마디 정도 대답해 주고, 금방 자리를 비웠다가 피후견인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나타나곤 한다는데, 이름 꽤 유명한 후원자치고는 자신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오히려 수상했다.
‘설마 현실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지수는 혹시 자신이 몰랐으면 하는 일이 생겨서 붙잡으려고 시간을 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억측이라고 결론지었다.
저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저런 유명한 후원자가 그렇게까지 신경을 쓴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자의식 과잉 같아 민망해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없던 무의 공간이 순식간에 꽃밭으로 변함과 동시에 푸른 하늘도 생겼다.
“……!”
갑자기 채워진 배경에 놀라 눈을 크게 뜬 지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끝없이 펼쳐진 꽃밭을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형형색색의 꽃잎이 흩날렸다.
“…….”
[‘후원자’ 안식의 신이 마음에 드냐고 묻습니다]
왜 꽃밭인지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예쁜 장소가 마음에 안 들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이름 모를 꽃이 잔뜩 핀 주변을 느리게 둘러본 지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멍하니 대답했다.
“……응. 엄청 예쁘다.”
정말이지, 혼자 보는 게 아까울 정도로 예쁜 장소였다.
바람이 불자 온갖 예쁜 색의 꽃잎이 뒤섞여 흩날렸다. 알록달록한 꽃잎의 춤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한지수의 앞에 웬 의자가 하나 생겼다.
“?”
이건 또 웬 의자냐고 물으려는데 이번엔 둥그런 테이블이 생겼다. 가만히 지켜보자 테이블에 그림자가 져서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서 새하얀 테이블보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둥근 테이블 위에 정확하게 얹어진 반듯한 테이블보 위로 이번엔 3단으로 쌓인 접시 트레이가 나타났다. 제일 밑에 큰 접시엔 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자른 샌드위치, 스콘, 커스터드 푸딩, 한입 사이즈 몽블랑, 슈크림이 가득 생겼다. 두 번째 접시엔 샤인 머스캣, 멜론, 껍질까지 제거한 귤 등 과일이 생겼고, 제일 위 접시엔 마카롱, 생초콜릿을 포함해 온갖 디저트가 가득했다. 신기하게도 전부 지수가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내 취향은 어떻게 알았대…….”
[‘후원자’ 안식의 신이 뭘 좋아할지 몰라 이거저거 준비해 봤다며 자신의 안목에 감탄합니다]
자화자찬이 녹아 있는 메시지를 본 지수가 뭐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피식 웃고는 테이블 앞에 앉자 그와 동시에 예쁜 꽃무늬가 그려진 찻주전자와 찻잔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둥실 떠오른 찻주전자의 분홍색 장미 무늬를 보고 있던 지수는 은은하게 풍겨 오는 레몬 향에 쓰게 웃고 말았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구성과 차라고 생각했는데, 오래전 러비스 콘서트 때 홍콩에서 강재윤과 호텔 카페에서 먹었던 애프터눈 티와 같은 구성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맞은편에 있지도 않은 의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리를 꼬고 앉은 강재윤이 작은 스콘에 블루베리 잼을 발라 제게 내밀며 웃는 모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뜨자 강재윤의 잔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끝없이 펼쳐진 꽃밭이 보였다.
“…….”
안식의 신이 직접 메뉴를 선정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제 기억을 기반으로 한 선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자, 새로운 메시지가 스르르 팝업됐다.
[‘후원자’ 안식의 신이 왜 먹지 않냐며 고개를 기울입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덧붙입니다]
꼭 쓰여진 문장 때문이 아니더라도 의아해하는 듯한 기운이 풍기는 메시지였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제 피후견인을 걱정하는 것 같은 기운도 느껴졌다. 눈치 보는 듯한 메시지가 스르르 사라진 걸 본 지수는 작은 스콘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이거면 충분해.”
* * *
지수가 뇌수면 치료를 받는 동안 현실의 토토는 한국대 병원 VIP 병실에 딸린 간병인 전용 침실에서 쉬익쉬익 화를 내며 정하진의 휴대폰 액정에 견과류를 마구 던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단순히 휴대폰 액정에 던지는 게 아니라, 화면에 나오고 있는 유명한 너튜브 씨박인지 수박인지 하는 인간의 얼굴에 대고 던지며 “쮜이익! 쮜이이익!” 역정을 냈다.
지수의 수면에 방해될까 봐 간병인 방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토토와 함께 있던 정하진은 잔뜩 화난 햄스터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토토 못지않게 화난 그는 지금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탓이다.
두 사람이 노려보는 영상 속의 너튜버는 이틀 전인 22일 새벽, 중국 산간 지대에 나타났던 측정 불가 던전에 대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이야기 중이었다. 문제의 방송은 현재 실시간 시청자 수가 이미 400만이 넘은 상태로, 전 세계 각국 언어로 미친 듯이 치솟는 채팅창은 아예 내용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어마어마한 수의 시청자가 모인 데는 저 너튜버가 하는 추측성 이야기와 방송 제목이 끈 어그로 때문이었다.
<실시간 스트리밍: 강재윤 에스퍼 생존 가능성 있다고 본다, 중국 태산 측정 불가 던전! 태종대와 99.9% 같은 던전임, 관련 이야기 들을 사람 드루와 드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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