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이기적인 부탁 2
지수의 말을 들은 토토가 이번엔 정하진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정하진은 작은 털 뭉치를 흘긋 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맡겨만 주신다면 토토가 가진 스킬이 전부 승급할 수 있도록 지도하겠습니다.”
“쮜, 쮜잇!?”
다행스럽게도 그는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며 지수에게 장단 맞춰 대답해 주었다. 지수는 그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살짝 보이며 은근히 덧붙였다.
“정말 고마워요, 정하진 에스퍼. 전 가이드니까 사실 토토에게 전술 지도 같은 건 못 알려 주거든요……. 아, 그리고 전술 지도 같은 게 힘든 건 저도 아니까, 귀찮은 부탁인 만큼 제가 꼭 보답할게요.”
“괜찮습니다. 토토와 함께 노는 건 저도 굉장히 즐거우니까요.”
“쮜, 쮜이잉…….”
어쩐지 혹독한 미래를 예감한 토토가 정하진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지수의 가느다란 다리를 등반했다. 지수는 제 허벅지로 올라온 토실토실한 털 뭉치를 쓰다듬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우리 토토 잘 부탁드릴게요.”
“예. 한지수 가이드가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토토의 수련을 책임지겠습니다.”
“쮸…….”
비장한 대답을 들은 토토는 파르르 떨며 지수의 허벅지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곤 짧은 앞발을 필사적으로 뻗어 귀를 꾹 눌렀다. 마치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으려는 듯한 행동을 본 지수는 작게 쿡쿡 웃으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토토를 양육하는 건에 대해선 김현아와 이미 계약서를 작성했지만, 정하진의 대답까지 듣고 나니 한결 더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될 경우 남겨질 유일한 걱정거리가 완벽하게 해결된 셈이었다.
“토토. 휴식은 끝이다. 이리 와라.”
“…….”
“토토.”
“…….”
“토토야, 정하진 에스퍼가 부르잖아.”
“토토. 이제 내려와라. 충분히 쉬었다.”
“……찌잉.”
한지수와 대화 몇 마디 나눌 정도밖에 쉬지 못했지만, 정하진은 그 정도도 충분하다고 여기는지 지수의 허벅지에 웅크린 토토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쮜에엑!”
토토가 지수에게 앞발을 뻗으며 울었지만, 지수는 차마 토토를 다시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정하진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한 양육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 토토야. 오늘 수련 열심히 하면 아빠가 맛있는 간식 줄게.”
“자. 다시 내 손가락 밑에 발 넣고. 바로 시작하자.”
“쮜에에엥~!”
“하나.”
“쮜!”
“둘.”
“쮜이!”
지수는 찡찡대면서도 열심히 단련을 시작한 토토를 보며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저 귀여운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둬야겠다는 생각에 주머니를 뒤지다 멈칫했다.
‘아, 내 폰 토토 인벤토리에 있지, 참.’
머쓱하게 손을 내린 지수가 토토와 정하진쪽으로 머리를 대고 옆으로 누웠다. 담요를 덮고 열심히 수련 중인 토토를 향해 눈빛으로 응원해 주고 상태 창을 불렀다. 얼마 전 뇌 수면 치료 이후 생긴 새로 생긴 편지 봉투 모양의 아이콘을 확인했지만, 보낸 메시지에만 1건 있었고 받은 메시지는 0건이었다.
‘안식이 진짜 바쁘긴 한가 보네.’
메시지 창을 닫은 지수는 인벤토리에 자신이 즐겨 찾는 물품들을 쭉 확인했다. 인벤토리 내부는 마치 20일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1월 6일 아침에 정리한 인벤토리 상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목적이 있어서 인벤토리를 들여다본 것은 아니었기에 쓱 훑어보다 눈에 들어온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작년 3월부터 강재윤 때문에 쓰기 시작한 ‘하루하루 감사 일기’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안 썼네.’
지수는 자신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당시 강재윤이 볼 때 지수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그는 틈만 나면 함께 상담받자고 부탁했었다.
처음 지수는 강재윤이 그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상담받을 필요도 못 느껴 거절했지만, 강재윤의 지속적인 설득에 결국 수락해 버렸다. 사실은 혼자 상담하는 게 아니고 강재윤과 함께 상담받는 거라고 해서 동의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상담 시작 전까지만 해도 지수는 자신의 정신은 아무 이상 없고, 남들처럼 적당히 피곤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상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담을 통해 사실은 지독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도 꽤 오래 앓은 상태였을 거라고. 추가로 가이드 우울증 초기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상담 선생님도 약물 치료를 병행하자고 하셨지.’
그 말에 자기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나진 않았지만, 처방받은 약이 추가되지 않은 걸 보면 아마 대충 미룬 게 아닐까 싶었다. 지수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구간을 굳이 떠올리려 애쓰는 대신 일기장을 넘겼다.
3월 7일 흐리다 맑음
1. 재윤이 형이 쓰라고 해서 오늘부터 즐겁고 감사한 일기 쓰기 시작. 현아 누나가 같이 있어서 그런지 가이딩 중에 은근히 스킨십하는 진상이 없었다.
2. 현아 누나가 점심으로 은색 뿔 소 스테이크 사 줬다. 맛있었다.
3. 여의도 화염 던전 게이트 때문에 그 주변만 꽃이 만개했다. 예뻐서 좋았다.
‘와, 진짜 대충 썼다.’
초반엔 자발적으로 쓴 게 아니다 보니, 억지로 쓴 티가 나는 내용밖에 없었다. 일기는 대부분 3~4줄 안으로 끝나는 짧은 내용이었는데, 그날그날 사소하게나마 감사할 일, 좋았던 일이 적혀 있었다.
일기의 목적 자체가 일상에서 긍정적인 일을 떠올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거였기에 뭐라 적어야 할지 몰라 정말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던 기억이 났다.
“쮜, 쮜익!”
“옳지. 그 페이스다, 토토. 잘하고 있다.”
“쮜!”
“옳지. 그렇지.”
지수는 정하진과 토토의 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일기장을 계속 넘겼다. 3월과 4월이 지나가고 5월 말쯤이 되자 정말 어쩔 수 없이 쓰던 내용은 나름대로 성의를 갖춰 갔다.
5월 28일 맑음
1. 오늘은 여름처럼 더웠다. 에어컨 켜기엔 조금 그래서 저번에 재윤이 형이 사 준 냉기 수정을 꺼내 봤다. 이거 진짜 시원하고 좋다. 침대 주변에 냉기 수정 두세 개 깔아 두고 이불 덮고 있으니 너무 좋다. 토토도 좋아해서 다행이다. 다음에 냉기 수정을 잔뜩 사야겠다.
2. 해양 생물 다큐를 봤다. 대격변 이후 인구가 절반 정도 죽은 덕분인지 해양 생태계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초기 던전 브레이크 때 쏟아져 나온 몬스터 중엔 지구 생태계에 적응한 종이 꽤 있다는 내용이었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토토가 돌고래 말을 할 줄 아는 것 같다. TV에서 돌고래 떼가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 집중하는 걸 보니 분명히 알아듣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토토는 천재인 것 같다. 한국대도 입학할 수 있을 것 같다.
3. 재윤이 형이 던전산 열매로 만든 과일 케이크를 사 왔다. 토토가 제일 많이 먹었다. 체리같이 생긴 과일이 특히 맛있었다. 다음엔 내가 사 와야지. 형은 내일부터 S급 던전 공략한다고 하니 오늘 밤을 새우더라도 꼭 0%로 만들어야겠다.
5월 29일 맑았던 것 같음
1. 재윤이 형은 변태다. 당분간 형을 위한 가이딩은 없다. 오늘은 도저히 못 일어날 것 같아서 병가를 냈다. 점심 먹고 내내 자고 일어나니 벌써 밤이다. 푹 자서 좋았다.
2. 토토가 허리랑 어깨에 올라타서 콩콩 뛰며 마사지해 줬다. 아파 죽을 뻔했다. 허리는 부러진 것 같다. 그런데 묘하게 괜찮아진 것 같다. 이게 어른들이 말하는 그 시원함인가……. 토토는 정말 효자다.
3. 오랜만에 야식으로 찜닭을 시켜 먹었다. 당면이 계속 자가 증식해서 걱정했는데 토토 덕분에 남기지 않고 전부 다 먹었다. 우리 토토는 당면도 잘 먹고 못 먹는 게 없다. 천재 같다. 솔직히 당면 킬러였던 지율이가 생각나서 조금 슬프긴 했지만, 그래도 토토가 너무 귀여워서 금방 기분 좋아졌다.
“…….”
일기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길드에 출근해 가이딩을 하고, 아주 가끔 하급 던전을 공략하고, 주로 김현아나 소수의 지인과 밥을 먹었다는 내용이 많았다. 그 외에는 강재윤, 토토와 함께 보낸 이야기가 전부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인 것 같은데도 날이 지날수록 사소한 것도 긍정적으로 보는 일이 많아졌고, 내용도 점점 길어졌다. 어느 정도 봤다 싶어 중간을 전부 후루룩 넘긴 지수는 일기의 마지막 장을 확인했다.
1월 5일 흐리다 맑아짐
1. 페널티 강의 때문에 기분 안 좋았는데, 오후엔 재윤이 형이랑 토토랑 부산에 와서 기분이 좋아졌다. 출발할 때 흐려서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도착했을 땐 해도 뜨고 하늘도 맑아져서 좋았다. 토토가 바다에 뛰어들려고 해서 말리느라 혼났다.
2. 재윤이 형이랑 오랜만에 회도 먹었다. 이번엔 토토가 회를 먹을까 궁금했는데 역시 마카다미아랑 튀김이랑 콘치즈만 먹는다. 회는 못 먹고 콘치즈만 네 번이나 추가해 먹는 걸 보니 지율이가 생각난다.
3. 형이랑 오랜만에 시장도 구경하고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알아봐서 호텔로 돌아올 땐 변신 스킬을 써야 했지만 즐거웠다. 나중에 휴가 맞춰서 사람 없는 섬에 휴양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이후 페이지는 모두 공백이었다. 지수는 마지막으로 기록된 내용을 바라보다 엎드려 자세를 바꿨다. 그리곤 일기장에 꽂아 둔 펜을 집어 들어 날짜를 썼다.
1월 26일 눈보라 엄청나게 휘몰아침
1.
“…….”
강재윤이 제게 부탁했던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게 무색하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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